성숙한 기다림 (행1:1-5)
본문
성숙한 기다림(행1:1-5절)
1. 기다림의 매력 없음
얼마 전 은행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은행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 당일 안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로 초조하게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시 20분이 지나고 마침내 30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겨우 순번이 되어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데 먼저 어떤 아주머니가 “이것 어떻게 된 것인지 보아주세요?”하면서 말하자면 새치기를 했습니다. 뒤집어놓은 번호표를 보니까 90번입니다. 저희는 84번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의 일이 금방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옆으로 흘겨보면서 뒤집어 놓은 번호표보고 아주머니 얼굴보고 하다가 그만 항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가 4시45분이었는데 다른 은행에 돈을 입금해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겨우 일은 처리했지만 못내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 참 매력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기다림의 종류가 어떤 것이냐와 관계없이 즐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과거에 비해서 모든 것들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점점 빠른 것에 익숙해져서 기다리는 것에는 점점 못 견디는 체질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요사이 서점가에는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한 책들이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동일한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도 기다리는 것은 별로 그렇게 매력 있는 일이 아닙니다. 뭐든 좀 빨리빨리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듭니다. 그러나 기다림이 없이 되는 일은 없어 보입니다. 기다리지 않고 빨리 뭔가를 이루어보겠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부실 공사를 부르고 맙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신앙 활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지나친 빠름을 추구함으로 생기는 부작용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하루나 이틀 혹은 한두 달을 살다가 그만 둘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두 달 사이에 뭔가를 결정하고 끝내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매력이 없는 일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훈련해야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의 첫 걸음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몇 가지의 일들을 하시고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다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함께 본문을 관찰하시는 가운데 주님께서 요구하신 기다림의 의미를 깨닫고 이 땅에서 조급하지 않고 잘 참아 기다릴 줄 아는 삶의 자세를 새롭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2. 데오빌로에게
오늘의 본문말씀 1절을 보십시오. “데오빌로여”하고 시작합니다. '데오빌로(Theophilus)'는 '데오스'라는 말과 '필로'라는 말이 합해진 것으로, 전자는 '하나님'을 , 후자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데오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말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데오빌로'는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아마도 각하라는 호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누가는 그 사람을 상대로 기독교의 교리를 변증하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라고 변증하기 위하여 데오빌로에게 헌정된 글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행전은 변증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데오빌로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때는 교육적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 편지는 데오빌로를 대상으로 삼아 썼달 뿐, 사실은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가 읽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의 편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오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복음의 핵심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1-3절)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이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복음이 전파될 때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을 비롯하여 성경의 많은 증인들이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하시고 가르치시며,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승천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령을 약속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 예수는 바로 복음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이 곧 복음이다”라고 누가는 누가복음을 요약한 것입니다. 즉 본문 1-3절은 누가복음의 요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3. 부활 후 40일(3절, 5절)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주님은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부활하신 증거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전15:4-8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들에게 당신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말씀하셨는지를 증명해 줍니다. 실제로 요20:19-29절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20절에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문을 닫고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때 함께 있지 못했던 도마는 이 사실을 자신의 인식을 틀로는 수용이 되지 않아서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8일이 지난 후에 다시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도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너무나 제자들의 인식을 틀을 뛰어 넘는 사건이었기에 많은 설명과 보여 주심이 필요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낙심어린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왜 알아듣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아직까지 부활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 심히 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당신이 살아나셨음을 보이시는 것은 실망한 제자들에게 힘을 주고 신뢰를 회복하는 첫 번째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인간의 인간됨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회의를 아시고 이해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죽으셨을 때 제자들이 가지게 될 실망에 대해서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실제로 부활하신 증거들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시고 확고한 믿음 위에 서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바로 이런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확인시켜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직접 그 자리에 있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경험한 내용들을 영감된 저자들을 통해서 기록해 주신 성경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실망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는 주님을 만나시고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물론 주님이 순서적으로 말씀하셨는지 아니면 섞어서 말씀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구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마칠 때까지 지속적으로 말씀하셨던 주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행동 강령인 산상 수훈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시기 위해서 베푸셨던 수많은 이적과 기사들, 그리고 천국은 마치 이와 같다고 시작되는 수많은 비유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늘 말씀하셨던 주제였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성숙과 마지막으로 완성될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과거에도 그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따로 시간을 내어서 차근차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5절을 토대로 추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들은 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 성령께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과거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잘 아는 욜2:28-29절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그랬습니다. 그 외에도 사32:15절 이하에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기도 합니다(사35:6하; 43:19절 이하; 44:3; 겔11:19; 36:26-27; 37:11절 이하; 39:29). 선지자들이 성령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만민이 그것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이러한 성령의 강림은 주님의 통치하심의 주된 표지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통치가 그의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실재가 되게 할 것이라고 선지자들은 입을 모아 예언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그 성령을 너희가 몇 날 못 되어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명령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하신 명령에 대해서 관찰해 보겠습니다.
4. 주님의 명령(4절) -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주님은 당신께서 가르치셔야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더구나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을 말리셨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고향이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선생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미 자신들의 얼굴은 많이 알려 졌습니다. 자신들이 이제까지 추종했던 예수가 자신들이 원했던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이 예수의 무기력한 죽음에서 나타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위험하기도 하고 머물 이유가 없는 예루살렘에 제자들은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버립니다. 다시 옛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요2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의가 우리도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예루살렘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
예루살렘은 이제 제자들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은 너희가 나와 육신으로 함께 동행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와 내가 육신으로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주님이 기다리라고 말씀하실 때 몇 날 몇 일 몇 시에 성령이 오실 터이니 기다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다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구약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약속을 대망하는 믿음으로 온갖 고난과 핍박을 감내했을 뿐만 아니라 나온바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자 여지없이 고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라.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눅24:49절을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말씀과 한번 비교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9)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말의 순서를 약간 바꾸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성에 유하라, 즉 떠나지 말라. 언제까지입니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실 때까지, 즉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4-5절과 문맥만 조금 다를 뿐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누가복음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시작이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까지는 떠나지 말라, 성령의 지시를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에서 한발도 움직이지 말라! 그대로 머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다림을 원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여전히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기다림은 그렇게 매력 있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다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흉흉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말입니다.
적합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일생을 좌우하는 문제를 놓고 그 당장에 결정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성격이 대단히 급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만 어떤 일에 급한 가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급하게 해야 할 일은 천천히 하고 정작 너무나 중요해서 충분히 생각해야할 문제는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상의 한마디 없이 그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혹은 욕심에 끌리는 대로 그냥 결정해 버리고는 나중에 그것도 생각이 나면 하나님께 통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결정에는 거의 모든 경우에 후회와 쓰디쓴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 엄밀히 말해서 약하고 어리석어서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소망을 삼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아직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사자와 같은 일꾼들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고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는 절대로 요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판단도 하지 말고, 어디 갈 생각도 하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입니다. 그들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고, 증인이 되고,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언되었던 약속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다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져 저들이 성령을 받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교회를 세웁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교회는 제자들이 세워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뿌리가 되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를 제자들은 확장하고 세워갔던 것입니다.
5. 기다림은 무기력이나 무 활동의 근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관찰을 하지 않으면 이 설교는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주님이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기다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 활동, 무기력의 기다림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기다림을 매력적인 기다림으로 만드는 것은 무기력하고 무 활동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아닙니다만 1장 후반부에는 제자들의 기다림의 태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함께 힘을 합해서 기도했습니다. 1:14절에 의하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약속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시기를 소망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하나됨의 기도는 이들로 하여금 공동체로서의 결속력을 강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기도만 한 것은 아닙니다. 1:15절 이하에는 베드로의 주선으로 가롯 유다로 인해서 빈자리가 생긴 사도의 자리에 맛디아를 채워 넣는 일을 합니다. 아마 나름대로 이런 준비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을 받은 후에 제자들은 손을 놓고 그저 막연히 기다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의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기계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면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것이 인간의 인간됨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다린다고 해서 무조건 아무 것이나 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분별력이 있는 기다림입니다.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기다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성숙하기를 기다려 줄 때도 동일한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무조건 기다려만 주는 것이 성숙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권면도 필요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섬김도 필요할 것입니다.
6. 성숙한 기다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사도들의 기다림을 보면서 우리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잘 기다릴 줄 아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기다려 주는 성숙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본문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다림이라고 하는 주제에 직면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기다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잘 기다리지 못함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기다려 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은 얼마나 공동체에 치명적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30년을 훈련받아서 3년을 사역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한 후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내고 선교사로 파송되기까지 14년여의 세월을 기다려야했습니다. 바나바가 그를 불러서 안디옥에서 동역하기까지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기다림은 얼마나 절실합니까?
또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미와 아직의 기다림 속에 있다는 사실과 그 기다림의 기간은 무기력하고 무 활동적인 기다림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한 많은 역사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계산하거나 예측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종류의 기다림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리해야할 일들을 성실하게 처리하고 기다리는 삶입니다. 먼저 해야 할 것과 후에 해야 할 것들을 분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 교회가 처해져 있는 상황은 지혜로운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무조건 서둘러서 될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손을 놓고 맹목적으로 기다릴 상황도 아닙니다. 기다려야할 것과 처리해야할 것을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처리하느라 공동체가 손상을 입고 지체들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기도할 일입니다. 또한 너무 느리게 처리되어서 공동체가 탄력을 잃어버리고 힘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들의 성숙한 기다림이 좋은 본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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