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3:14-22)
본문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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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의 설교 본문과 제목을 기억하십니까? 지난 주 설교 제목은, “영혼을 살리시는 은혜”(사 55:1-3) 였습니다. 그리고, 송구영신 예배의 설교 제목은 올 해 교회의 주제 말씀인,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였습니다. 바쁘게 사시느라, 말씀의 흔적은 금세 사라집니다. 내가 스스로 말씀을 사모 하지 않는 한, 말씀은 가깝고도 먼 이웃 사촌이 됩니다. 신앙생활이 연수가 쌓여가면서 점점말씀이 현실이 되고, 생활이 되어야 하는데, 한 주간에 선포 된 말씀조차 기억하고, 지켜가기가 힘듭니다. 말씀으로 영적 무장이 되신 분들은 굉장히 민감합니다. 그때그때마다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이 불쑥불쑥 떠오릅니다. 그만큼 내장되어 잇는 말씀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다는 겁니다. 떠오른 말씀에 의지하여 얽히고, 꼬여있는 문제의 해답을 찾아갑니다. 올바른 것을 선택하고 방향을 결정하는데 떠오른 말씀이 기둥이 됩니다. 생채기가 나고 찢어질 것 같은 아픔 가운데 떠오르는 말씀은 한량없는 위로와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말씀이 떠오른다, 해답 찾고, 방향 설정하고, 위로 받는다”는 것은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말씀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십 년을 교회 생활 했다고 해도, 한 번도 말씀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고, 말씀이 나를 붙잡아 주고, 변화시켜 가는 주체라는 것을 깨닫고,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말씀과 담을 쌓고, 말씀 따로, 나 따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길 같은 신앙생활은 백년, 천년이 가도 말짱 헛일이요, 말짱 도루묵입니다. “주님! 내가 주여, 주여 하며 신앙생활 정말 열심히 했는데, 주님은 왜 나를 모른다고 하십니까?” “내가 너에게 준 말씀은 어디에 두고 너 혼자 돌아다녔느냐, 불법을 행한 자여,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 곁에서 떠나가라!” 무서운 결말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은 끊임없이 교회들에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교회는 믿음을 가진 성도, 곧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귀가 닫혀 있는 우리들의 귀를 성령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열어젖히고, “제발 좀 내 말을 들어라!, 들어라!” 끊임없이 선포하시고 계십니다. 올해 성경통독 달력을 만들면서까지 성경일독 하실 것을 권하였습니다. 잘하고 계시죠? 또한 이달의 말씀을 한절씩 암송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가까이 하려는 노력들은 그냥 한 번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저를 통해서 00교회와 성도들에게 하시는 가장 시급한 명령이고, 권면입니다. 암송하고, 일독하는 것이 쉽지는 않죠. 성경이 어렵고 이해도 되지 않아서 매일 같이 읽는다는 것은 고문 수준의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건 당연한 초기 증상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무지하게 불편하게 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보고, 듣고, 움직이는 모든 일상을 하나하나 묻고 행동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마음대로 세상 편하게 살던 사람이, 보이지도 않는 말씀에 의해 내 삶이 조종당하는 기분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던 나의 원형이 왜곡되고, 변형되고, 죄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나에게 들어와 죄악 된 나의 형상을 무참히 깨트려 가기 때문에, 비명소리가 날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말씀 앞에 내가 산산이 부서져야 하니 당연히 아프고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일단 거부하고 보는 것이 인간의 죄악 된 본성입니다. 여러분, 말씀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불순종하고, 거부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이 주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려고 방해하는 음모요, 전술이라는 것을 아여야 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말씀을 계속 접촉하려고 시도하다보면, 말씀 안에서 어느 순간 빛 되신 주님을 찾고, 만나게 됩니다. 만나는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 보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천배, 만 배는 더 강하십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서기만 하면, 빛 되신 주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게 신속하게 찾아오십니다. 빛이 들어오면, 내 면의 부패함이 속속들이 다 보이기 때문에, 말씀 앞에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토록 잘난 내 자아가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빛 앞에서 여지없이 굴복 당하게 됩니다. 빛이 들어오기만 하면, 말씀을 거부하던 도도한 마음은 어디가고 주님 앞에 완전한 항복을 선언합니다. “주님 제가 졌습니다. 더 비춰 주시고, 더 부숴주시고, 더 순종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씀 앞에 굴복해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리스도인, 성도,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쯤 되어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무시로 들을 수 있는 열린 귀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도 여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오늘 부르신 찬송 408장은, 저에게는 사연이 있는 찬송입니다. 제가 신학 공부를 시작할 무렵, 말씀과 접촉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농도가 점점 짙어지자 내 안에 강력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빛이 들어오자 어둠 가운데 깊이 숨겨져 있던 내 내면의 추악한 죄악들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죄의 실체를 보자 제 양심은 미치도록 괴로웠습니다.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죄의 덩어리들은 점점 커져가고, 죄의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져 갔습니다. 이것도 죄, 저것도 죄, 살면서 저지른 모든 행위들이, 말들이, 죄가 아닌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죄악의 부피가 점점 커져서, 마치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높이 매달린 애드벌룬처럼 인내의 한계점에 이르렀습니다.
도저히 저로서는 감당하지 못해서 괴로움에 몸부림 칠 때, 말씀이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풍선과도 같은 나의 죄악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푹 찔러 주셨습니다. 한 방에 펑~ 하고 터져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정말 말로는 형언 할 수 없는 평안함과 자유함이 찾아 왔습니다. 저는 소리쳤습니다. “이것이 죄악을 알게 하는 빛의 역할이구나!, 이것이 죄의 무게를 벗겨주시는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구나!, 이것이 말로만 듣던 말씀이 주시는 하늘 평안이구나!”아멘. 저는 찌릿찌릿한 성령의 체험을 했습니다. 제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찬양이 흘러 나왔습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 하도다”아멘.
이후부터는 내 몸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날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격해서 제일먼저 학교에 갔습니다. 텅 빈 교실에서, 아니면 독방 기도실에서 큰 소리로 찬양했습니다. 찬양하면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고, 내 입술은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능력이요, 소망 이십니다”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매일 똑 같은 찬양, 매일 똑 같은 고백인데, 하나도 싫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거의 일 년 동안은 이렇게 했나 봅니다. 말씀의 능력은 잘난 체 하는 나의 껍질을 산산이 부숴주고, 주님의 거대한 은혜 앞에 복종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이 모든 것이 말씀과 접촉해야 일어나는 현상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제가 말씀과 접촉하는 일이 없었다면, 말씀 속에서 주님이 찾아오심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저와 여러분의 만남도 없었을 겁니다. 저는 여전히 세상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제 잘난 맛에 허랑방탕하며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갔을 겁니다.
여러분은 정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구원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주님이 나의 삶과 동행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시는 주인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여러분도, 저와 같지는 않지만, 다른 상황에서, 빛으로,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셨으리라 믿습니다. 말씀은, 빛으로 찾아오심과, 구원 주심과, 동행하여 주심을 계속 확고하게 해 주는 원천입니다. 반복해서 주님을 만나고, 고백하고, 찬양할 수 있는 동력과도 같습니다. 말씀을 잠시라도 멀리하면, 그 시간은 사탄이 쉽게 점령합니다. 사탄은, 그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사탄의 입장에서는, 말씀을 멀리하고, 손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관리 제외 대상입니다. 내버려 두어도, 주님과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나는 아직 빛 되신 주님, 말씀이신 주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올 해 말씀 붙잡고 담판을 져야 합니다. 결단하며, 실행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초대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시는 성령의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들으십시오. 그리고, 현재의 나의 신앙태도를 점검해 볼 때, 말씀을 받고서도, 빛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아직도 온전한 복종과, 순종을 거부하는 연약한 믿음을 바라보십시오.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지 못한 우리 자신들을 인정하고, 새로운 결단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교회를 교회로 교회되게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 갈 수 있습니다. 영혼을 살리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이 말씀 따라서 주님 앞에 고백한다고 생각하시고, 귀 기울여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의 근본이시며, 모든 말씀이 「아멘」임을 믿습니다. 제가 이 고백을 함으로 제 몸과 마음이 충성되게 변화하여, 주의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지는데 쓰임 받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저는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았지만,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이러다가 주님의 입에서 제가 토해져 버려, 버려질까 두렵습니다. 저는 재물이 많으면 부자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만 했지만, 정작 제 영혼이 가난하고,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겨져 있는 수치를 당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참으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주님! 저에게 성령의 안약을 발라 주셔서, 저의 부끄러운 수치를 보게 하소서. 주님! 주님이 저를 호되게 책망 하시는 것은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제가 진실로 회개는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소서. 문을 열도록 마음이 움직이게 하소서. 주님!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싶습니다. 끝까지 이기는 자가 되어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 곁에 영원토록 머물도록 인도하소서. 말씀을 붙잡고 다시 시작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주님! 저를 긍휼이 여기시고,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멘.
여러분들이 이 고백을 다 함께 합창으로 고백하고, 아멘으로 받으신 줄 믿습니다. 집에 가셔서, 올려놓은 설교문을 보시고, 여러분의 입술로, 소리 내어서 한 번 더 고백해 보세요. 주님이 큰 기쁨으로 받아주실 겁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영혼을 살리시는 은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세 편의 설교가 연속된 시리즈로, 오늘이 마지막 마무리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들리셨다면, 들리신 대로, 감동을 주신대로 실천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빛 앞에, 말씀 앞에 똑바로 서셔서, 성령 받으시고, 은혜 받으시고, 열린 귀를 소유하는 굳센 믿음의 양무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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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에 들린 대로 말씀 앞에 서겠습니다. 빛을 내려 주시고, 구원의 은혜와 감격속에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가는 충성 된 일꾼들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 주시고, 은혜 주시고, 말씀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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