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하나님의 강한 위로 (수1:6-9)

본문

하나님의 강한 위로 (수 1:6-9)


 


 


흔히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내가 의학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스트레스와 질병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의학적인 근거를 들어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병원에서 진료 받을 때 의사들이 빼놓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푹 쉬라”고 충고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스트레스에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간다. 사방 천지가 스트레스 쌓이는 일 들 뿐이다. 우리는 주러 언제 스트레스를 받는가?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삶속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길 때, 그 변화에 맞춰 적응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발생한다고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변화에는 부정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변화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실직했을 때도 스트레스를 받지만, 취직할 때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든 사람과 이별 하는 것도 스트레스지만, 새로운 사람과 정을 붙여 나가는 것 역시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그런데 우리 삶속에서 이런 변화가 어디 한두 가지 인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예를 들어 가족 중에 수험생이 있으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눈치 아닌 눈치를 보게 된다. 또 가족 중에 누군가가 큰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건강상의 변화) 가족 전체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른다. 이렇게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 그 중에서도 부정적인 변화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변화 중에서 가장 크고 심각한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다.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크나큰 상실감과 두려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특별히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경우, 그 마음은 그 누구도 위로 할 수 없고, 대신 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여호수아는 지금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모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여호수아에게 모세는 너무나도 특별하고, 각별한 사람이었다. 둘 사이가 어느 정도로 가까웠냐면 모세가 여호수아의 이름을 새로 지어줄 정도였다.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구원)였다(민13:8). 그런데 모세가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민13:16). 별명도 아니고 이름을 지어 주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는 젊었을 때부터 모세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섬겨 왔다. 한마디로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였다!(1절). 그러니 모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얼마나 큰 충격과 슬픔,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겠는가?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모세는 이미 죽었다. 이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더 이상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여호수아는 모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과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 속에서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서 하나님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6절).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모세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그리고 온갖 잡다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모세처럼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갑자기 모세를 데려가셨을까?’,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모세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일까?’, ‘모세가 죽은 것만 해도 슬퍼 죽겠는데, 이 와중에 무슨 백성들을 지도하고 통솔한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못 하겠다’ 아마 별에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대부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내용이었을 것이다.


 


물론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두렵다’, ‘슬프다’, ‘걱정 된다’고 하는 내용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면 여호수아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모세가 죽은 직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이미 충분히 담대한 사람에게 담대하라고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세 차례나 반복하셨다(6,7,9절). 여기서 뭘 알 수 있는가? 모세가 죽은 이후로 여호수아의 마음이 약해졌고, 겁을 먹었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걸 가지고 여호수아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호수아는 그저 지극히 보편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겪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슬픔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호수아 입장에서는 감정을 추스르는 것만 해도 힘겨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가나안 정복은 단순히 여호수아가 슬픔을 떨쳐내고 현실을 직시한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나안에는 여러 민족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만의 정치체제와 문화, 역사와 종교를 구축하고 있었다. 가나안은 결코 호락호락한 땅이 아니었다.


 


그토록 믿고 따르던 모세는 죽었고, 가서 차지해야 할 가나안은 너무나 굳게 잠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가나안이고 뭐고 그냥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지 않았을까? 지금 내 마음도 추스르기 힘든데 무슨 땅을 차지하고, 전쟁을 치르고, 백성들을 이끌고 간단 말인가?


 


 


좀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충격에 빠져 있는데, 하필이면 바로 그때 이력서를 넣은 회사에서 내일 면접 보러 오라는 문자가 왔다고 생각해보라. 아무리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된다고 하지만, 맨 정신으로 면접 보러 갈 수 있겠는가? 아니, 면접 보러 갈 정신이나 있겠는가?


 


여호수아의 심정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리신다. 그게 뭐냐면 “위로”이다. 그것도 보통 위로가 아니라 강한 위로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얼마나 강하게 위로하시는지 보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떠나지 않겠다’, ‘버리지 않겠다’(5절), ‘니가 어디로 가든지 나도 함께 하겠다’(9절),‘강하고 담대하라’(6절),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7절),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9절)는 말씀을 반복하신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시는가?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위로할 때는 원래 그렇게 말하는 거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로할 때 했던 말들을 한번 떠올려 보라. ‘괜찮아’, ‘잘 될 거야’, ‘괜찮아, 괜찮아 걱정마’, ‘힘내, 힘내, 그래 괜찮아’ 결국 똑같은 말의 반복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듣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용기를 얻는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수아를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본문을 보면 전혀 위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엄한 명령처럼 보이고, 심지어는 꾸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명령형 ‘-하라’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따끔한 명령이기 전에, 따뜻한 위로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 역시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야! 힘내라” 이 말이 힘을 ‘내라’는 명령인가? 아니면 힘을 내기 바란다는 위로인가? 당연히 위로다. 만약 이 말을 듣고,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너까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니가 뭔데 나한테 힘을 내라고 명령하느냐”라고 한다면 말귀가 어두운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래, 고맙다. 힘내야지!”라고 답한다. 명령이 아니라 위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몇 차례씩 반복하신 것은 분명 위로의 말씀이다.


 


 


그런데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무 의미 없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알맹이도 없이 그저 위로용 멘트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 하시는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상황에 맞추어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은 “파이팅”이라는 응원도 시험을 치러가는 학생에게 할 때와 수술을 받으러 가는 환자에게 할 때 그 안에 담긴 뜻이 다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도 그랬다.


 


첫 번째로, 6절과 9절에 기록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장차 여호수아가 싸워서 차지해야 할 가나안 땅과 관련이 있다. 본문을 함께 읽어 보자.


 


(수 1: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수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여호수아가 가장 먼저 가야할 곳이 어딘가? 가나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6절과 9절을 통해서 “니가 가나안 땅으로 갈 때, 내가 함께 할 것이고 니가 가나안 땅을 차지 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고 강하고 담대해라. 그 땅에 살고 있는 민족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앞에 놓인 수많은 장벽 때문에 놀라지 말라”고 위로하셨다.


 


두 번째로, 7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신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수 1:7-8)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리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이 세상에서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와 담력이 필요하다. 특히 지금처럼 코로나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교회 나오는 것 자체로 온갖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할 지경이다. 하물며 하루아침에 모세를 떠나보내고, 철옹성 같은 가나안에 입성해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지키는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겠는가? 실제로 말씀을 지키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말씀을 지키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지키기 위해’ 강하고 담대하라고 위로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날-그러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느냐 마느냐는 여호수아가 슬픔을 떨치고 일어나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가나안은 호락호락한 땅이 아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능한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술전략은 둘째 치고 변변찮은 무기도 없었다. 심지어 전투력(사기)은 거의 제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상 대대로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이제 막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서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던 민족에게 무슨 전쟁 준비가 되어있겠는가? 그 와중에 그나마 믿고 의지했던 모세까지 죽었으니 무슨 수로 가나안을 정복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의지할 것이라고는 하나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앞날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턱대고 아무나 도와주지는 않으신다.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형통을 약속하셨다(7-8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얼마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어느 정도로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가?


 


말씀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의 내용들을 다 지켜 행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가나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될 것이다.


 


(수 1:7-8)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리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이 시간 잠시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묵상이라고 하면 뭔가 사색적이고 정적인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묵상을 Q.T(Quiet Time)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차분하게 말씀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이게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묵상’을 순전히 한자의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이다. 한자로 묵상이란 ‘묵묵할 묵’에 ‘생각할 상’이다.「묵묵히 마음속으로 생각함, 말없이 마음속으로 기도 드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침묵의 사색’과는 정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당히 활동적이고, 과격하다. 거칠다.


 


히브리 원어로 ‘묵상’이라는 말은 굶주린 들짐승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혹은 반추 동물(되새김질 하는 동물)이 배 속에 있는 음식물을 끄집어 올려서 되새김질 하고 또 되새김질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쓰였다. 무슨 말인가?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조용한 시간에 말씀을 마음속으로 되 뇌이면서 ‘음 그렇지, 그렇지’ 하는게 아니다. 굶주린 짐승이 먹잇감을 찾듯이, 그렇게 간절하고 애타게 말씀을 대하는 것이다. 또 반추동물이 되새김질을 하듯이 그렇게 끈질기고 진지하게 말씀을 섭취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묵상’은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태도, 갈급함과 간절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형통을 맛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고 지켜 행하라고 위로하시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다(2-4절, 6절). 비록 모세가 죽긴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가나안 입성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도록 축복하시고 함께 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위험을 겪게 될 것이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할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할 것이다. 아니, 시작도하기 전에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고,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담대 하라,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고 따뜻하게 위로하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여호수아는 더 이상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대로 강해져야 한다. 담대해야 하고 두려움을 떨쳐내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한다.


 


모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마음의 부담감을 극복해야 하고, 가나안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야 한다. 또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 나가는데 필요한 용기와 담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형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말씀을 맺겠다. 지금 여호수아가 겪고 있는 인생의 변화-스트레스 상황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변화와 장애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순 없지만 두렵고 긴장되고 걱정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위로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은 저마다 다르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두려움과 근심 걱정, 불안의 강도역시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신실한 분이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강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있는 것이다.


 


(수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위로는 강한 위로이다. 강하게 위로하시기 때문에 강한 위로이고, 그 위로가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강한 위로이다. 여호수아를 보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후에 그는 마음이 강해졌고 담대해졌다.


 


(수 1:10)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여호수아는 관리들을 불러 모아서 명령을 하달한다. 가나안 정복을 위한 본격적인 첫발을 내 디딘 것이다. 이제 비로소 모세의 후계자다운 모습,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여호수아에게 실제적인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인생의 수많은 장애물과 문제 앞에서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말씀을 지켜 나가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강하고 따뜻한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하길 바란다. 이를 위해 말씀을 묵상하기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형통을 맛보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기 바란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 누구의 위로보다, 그 어떤 위로 보다 강한 힘이 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5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