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유언을 남기며 살아요 (창49:1-33)
본문
축복의 유언을 남기며 살아요/ 창세기49;1-33(201206)
Good night 인사와 Good bye 인사
미국의 남부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장성한 네 아들을 둔 어머니가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침대에 둘러 있는 것을 보고 마지막 사랑으로 하나씩 이름을 부르며 엄마에게 키스로 작별 인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에게는 차례로
“얘야. 엄마에게 Good night 키스를 해다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내 아들 앤디에게만은 “앤디야. 엄마에게 Good bye 키스를 해다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막내 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니.... 왜 형들에게는 Good night 키스를 하게 하고, 나는 Good bye 인사를 해야 되나요?”
그러자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앤디야... 너의 형들은 이제 머지않아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된단다. 그러나 너와는 마지막이다.
이 엄마는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라고 여러 번 간곡히 가르치고 인도했지만, 너는 끝내 네 고집대로 어두운 길로 가버리고 말았어.
그러니 나는 너를 다시 만날 수가 없단다.
그래서 네 형들과는 Good night이지만, 너와는 Good bye의 인사를 하는 것이란다.”
이 말을 들은 막내 아들은 어머니의 침대에 엎드리며 눈물을 터뜨리며 통곡했습니다.
“어머니! 저도 Good night의 인사를 다시 하겠습니다. 어머니 저도 깨달았습니다!. 저도 천국에서 어머니를 만나겠습니다.”
하면서 젖은 뺨을 엄마의 볼에 비벼댔습니다.
어머니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글썽거렸으며 손은 앤디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만져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조용히 평안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천국에 가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서 천국으로 갈까요?
아니면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가게 될까요?
우리들 모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잘 믿어서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P4
믿음의 족장 야곱은 147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본향,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다.
야곱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더 영성이 밝아지고 순수해지고 깨어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온 몸으로 느끼고 고백하며 믿음의 족장으로 세워져 간다.
그야말로 철이 드는 것이다.
사람이 철들면 죽는다는 속담처럼 야곱은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 철이 든 사람이 되었는데, 이제 하늘 아버지의 부르심을 입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서 본향으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면서 아들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다.
야곱은 아들들을 자신의 침상으로 불러 모은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1-2절에서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라고 하면서 침상으로 모여든 아들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주권을 선포한다.
오늘 하나님은 모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하나님은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부모님께서 임종할 때가 되었을 때에 자식들이 다 한곳으로 모여서 부모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시는 유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부모님에게나 자식들에게나 모두가 대단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 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부모님이 유언할 때, 온 신경이 재산상속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나 민감해진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부모님께서 마지막으로 유언할 때 세상적인 재산분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모님께서 마지막 사력을 다하여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자손들에게 남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실까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의사가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하면서 자식들에게 다 연락하여 한번 모이게 하라는 말을 하기 전에 온 가족들이 한곳으로 모일 수 있고, 부모님에게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귀담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직업군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실 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면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온 가족들이 한곳으로 모여서 유언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너무나 좋은 일일까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오늘 야곱의 가족들은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아들들은 아버지를 천국으로 환송해 드리고 있는가?
야곱의 가족들은 어떻게 아버지를 위한 천국환송예배를 드리는 것일까?
D4.
① 아들들에게 일일이 축복하며 유언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야곱에게 12아들들과 그의 자녀들, 후손들을 위하여 일일이 축복하며 유언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신다.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특권 중에 특권은 자녀들을 위하여 일일이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일일이 축복하며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삶을 살려고 하면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확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들 자신이 신령한 세계를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의 세계에 대하여 확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삼위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의지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확신할 때, 힘차게 축복기도를 할 수 있고, 그 축복기도에 하늘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께서 닫아버리면 열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믿음으로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 신령한 세계를 활짝 열어주신다.
② 업적에 따라서 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야곱에게 아들들을 위하여 일일이 축복하도록 감동을 주시면서, 아들들의 업적에 따라서 차등적으로 축복하도록 감동을 주신다.
야곱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요셉을 위한 축복에는 이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따라서 차등적으로 축복하고 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서모인 빌하와 동침했던 사건 때문에 장자로서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놓치고 만다.
시므온과 레위는 숙곳에서 디나가 세겜성의 세겜에게 성폭행당한 수치를 복수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행할 수 있는 할례제도를 활용하여 세겜과 그의 모든 식구들과 심지어 세겜 성민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요구하고, 할례를 행하여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3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은 세겜 뿐만 아니라 모든 세겜 성민들까지 죽이는 살인사건의 주범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유다는 7년 대흉년이 발생하였을 때에 곡식을 구매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다녀올 때 희생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
유다의 희생으로 아버지 야곱도 살리고, 막내 동생 베냐민도 살리고, 다른 형제들도 살리는 일에 앞장선다.
이에 따라서 유다는 장자가 받을 축복권을 받게 된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의 자격으로 7년 대흉년으로 온 식솔들이 굶어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야곱의 모든 식솔들과 종들과 심지어 가축들까지 구원하는 대단한 일을 진행한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요셉의 삶의 모습이 야곱의 마음에 깊이 각인 되면서 야곱이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길 때, 그들의 업적에 따라서 축복의 경중이 달라지게 된다.
축복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그 축복을 선포하는 당사자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축복권을 대신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축복의 경중은 축복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축복의 차등은 축복자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노아의 축복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분명히 실수는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인사불성이 되어서 아랫도리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누워있는 노아가 실수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 실수를 함과 가나안이 조롱하고 우롱했다는 이유 하나로 함과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되고, 노아의 실수를 감싼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는다.
세겜성 사건은 분명히 디나의 아버지 야곱이 앞장서서 해결했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유부단했던 야곱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아버지 대신에 속 시원하게 그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속 시원하게 수치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칭찬과 보상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도 칭찬과 보상은 고사하고 제대로 축복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7년대 흉년으로 인하여 온 중동지역이 굶주림으로 호소하고 있을 때, 족장의 책임자로서 마땅히 야곱이 모든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했어야 하는 것들이다.
특히 베냐민의 문제도 야곱이 해결했어야 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야곱이 해결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유다가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면서 유다가 4번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장자권을 상속받게 된다.
굶주림의 문제를 족장인 야곱이 해결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해결하지 못하고, 요셉이 해결하면서 요셉도 두 지파의 축복을 상속받게 된다.
유다가 제1의 장자권을 상속받았다면, 요셉 특히 에브라임도 제2의 장자권을 상속받으면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
신앙인은 축복권을 가진 이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령 교회에서의 축복권은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위임해 주신 영적인 권위이다.
그러기에 목사님께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축복기도하는 것이다.
목사님께서 성도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기도할 때, 목사님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된다면 목사님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간적인 감정에 노출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리하여 목사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축복할 때 차등적으로 축복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목사님과 좋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좀 더 많은 축복기도, 좀 더 진지한 축복기도를 하게 된다.
목사님과 불편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면 불편한 마음으로 축복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가능하다면 목사님과 좋은 유대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지, 불편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이런 관계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일반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신앙인은 누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축복자의 위치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파악하면서 그 축복자와 좋은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사람이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은 축복에 대하여 늘 갈망하고 사모하면서 축복자에게 좋은 마음과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주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축복을 사모하는 신앙을 기복적인 신앙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축복의 주인이시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넘치도록 베풀어 주고 싶어하시는 분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축복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할 영혼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수 없다.
축복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축복을 부어줄 수 없다.
하늘에서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고 있는데 그릇이 덮어있다면 은혜의 단비를 담을 수 없다.
그릇이 단비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은혜의 단비를 받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축복받을 그릇을 준비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본래부터 하나님은 축복하시기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분이지만, 하나님은 그 축복을 사모하고 받을 준비 되어 있는 사람에게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는 준비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③ 미래의 꿈을 꿀 수 있는 축복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야곱이 아들들을 위하여 축복하며 유언하는 것은 현재 아들들을 위한 축복하는 것이 아니다.
야곱의 유언은 각 아들의 후손들로 구성되는 지파들을 위한 축복이다.
야곱의 유언은 각각 지파들의 미래를 위한 축복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현재보다는 먼 미래를 위한 축복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어쩌면 본인보다는 후손들을 위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37장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셨던 꿈과 축복은 요셉 본인에게도 해당되지만, 요셉의 후손들과 더 나아가 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주시는 꿈과 축복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 미래의 이야기보다는 당장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재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보다는 먼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현재 사회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현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과연 현재 삶에 대하여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목사인 저도 현재 삶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현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살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의 삶이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아 누리면서 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먼 미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아 누리는 삶을 축복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지금, 현재의 삶이 다른 사람들처럼 풍족하게 누리면서 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미래에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설령 우리들 자신이 마음껏 풍족하게 누리면서 살지 못하더라도 우리 후손들이 우리 신앙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소망과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이 배고프지 않고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 신앙의 선진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축복을 사모한 결과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해도 틀리지 않는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걸치면서 뼈아프게 보릿고개를 넘기면서도 교회에 나가서 순교자의 삶을 살았던 신앙의 선진들 덕분에 이처럼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애꿇는 기도와 축복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 믿음의 대가로 우리 후손들의 장래를 위한 삶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과 소망과 비전이 없는 사람은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없어서 주저앉고 만다.
비록 오늘의 삶, 현재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희망을 가진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 꿈이 있는 사람, 비전이 있는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이 솟아난다.
우리 하나님은 신앙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악한 마귀와 어둠의 권세들을 이기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다시 일어나서 뛰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④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맞이하게 하시는 하나님.
야곱이 소위 노인병이라는 치매나 중풍이나 각종 암에 걸렸다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마지막 사명, 축복하며 유언할 수 있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정신줄을 놓고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채 살아야 하는 치매, 사지가 마비되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중풍, 심한 고통을 동반해야 하는 각종 암에 걸려서 호스피스 병실과 같은 곳에 입원해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마지막으로 축복하며 유언할 수 있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야곱은 또렷한 마음과 정신으로 일일이 아들들이 살아왔던 삶을 조명하면서 축복하며 유언하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게 유언하면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가.
야곱은 이처럼 아름답고 복된 유언을 한 이후에 마지막으로 아들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면 자신의 시신을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메고 올라가서 장사해 달라고 부탁한다.
야곱은 29-32절에서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라고 하면서 자신도 조상들의 묘에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 후에 야곱은 조용히 숨을 거두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다.
어쩌면 야곱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노후생활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다.
우리 신앙인들의 노후생활도 야곱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L4 & B4.
오늘 야곱은 아름답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면서 아들들과 후손들을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유언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본향으로, 천국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도 자녀들이나 후손들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노년의 삶을 살고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축복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무엇이라고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유언하며 축복할 수 있을까?
① 가정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과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자.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전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가정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 줄 수 있고, 기도를 가르쳐 줄 수 있고,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고,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삶을 가르칠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가정예배를 통해서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모습을 그대로 가르치고 전해 줄 수 있다.
가정예배를 통해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고 선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고 합당한 일이다.
가장 큰 힘을 지닌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스토리를 가지고 자기가 만난 삼위 하나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들이 평상시에 사는 모습이 축복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와 유다와 요셉에게 축복하는 모습은 그들이 살았던 과거의 업적에 따라서 차별성을 두고 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사건은 여러 번 있었던 사건이 아니다.
단 한 번의 사건에 불과하다.
단 한 번의 사건에 불과한데도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는 하나님의 축복권에서 벗어나고 만다.
인생에서 단 한 번 밖에 저지르지 않는 사건들은 무수하게 많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사건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한다.
그 한 번의 사건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권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맺는 사람이라야 좀 더 큰 일, 좀 더 더 큰 일로 발전해 가면서 지금보다 더 큰 일도 잘 감당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축복의 기준이 된다.
작은 일에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 일을 맡겨주어도 감당할 능력도 되지 못하고, 매사에 소홀하게 되어 큰 결실을 맺을 수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달란트 비유의 말씀에서처럼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음으로써 징계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면서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된다.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들 자신에게 어떤 일을 맡겨주시든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면서 결실을 맺어갈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가정예배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정성을 다하여 감당함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귀한 축복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인으로 자랄 수 있다.
② 축복의 손을 자녀의 머리에 얹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기도해야 한다.
머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담겨 있는 지성소와 같은 곳이다.
지성소에 삼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듯이 머리에 손을 얹어서 축복하심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가 그의 영혼에 풍족하게 임재하는 은혜를 입게 된다.
머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은혜의 처소이다.
머리는 뇌를 감싸고 있어서 생각하게 만드는 두뇌와 육신의 모든 장기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움직일 수 있는 신경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뇌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자녀들의 머리에 축복의 손을 얹어서 축복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머리에, 뇌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서 축복하심으로 자녀들의 뇌에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능력으로 풍족하게 채워지게 된다.
③ 유일한 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을 확증해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구원의 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안 계신다면 구태여 신앙생활할 이유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한 방울의 피도, 물도 남기지 않으시고 다 쏟아주신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하게 전하고 확신시켜 주어야 한다.
어떤 인생이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까이하면 살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멀리하면 죽는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만이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세상에 미치면 패가망신하고 죽지만, 예수그리스도께 미치면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지인들, 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다.
인생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미친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생명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선포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하심과 축복하심의 놀라운 역사, 신령한 역사는 바로 우리들과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임재하여 나타난다.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인하여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왔던 2020년을 마무리하는 12월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넘치시길 기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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