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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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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15:29~41


 


요즘은 의학상식이 발전을 해서 누구나 알고 있는 정보입니다. 우리 몸의 온도를 1도만 올려도 우리 안에 면역력을 높일 수 있다고 합니다. 면역력이 높아지면 병도 안걸리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운동을 하는 것도 우리 몸을 더웁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차가운 것을 먹으면 건강에 나쁘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오죽하면 여름에도 보양식으로 뜨거운 삼계탕을 먹으니까요. 몸이 따뜻해야 건강한 것이고 반대로 몸이 차가우면 안좋은 것입니다.


 


요즘 깨우친 것 중에 또하나는 피가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혈액이 골고루 도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몸에 혈액이 중단되면 그 부분은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한쪽팔이나 발에 피가 안통하면 그 부분이 저리게 되어 있습니다. 혈액이 공급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에 혈액이 공급이 안되면 그것이 뇌졸중입니다. 모두 다 피가 제대로 안돌아서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체에 피가 골고루 돌아야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경은 이미 구약에서 입증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피는 생명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모세오경에 보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피를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해장국에는 선지를 넣어야 맛이 있는건데 그렇다고 해서 선지해장국을 안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성경말씀은 진리입니다. 피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우리 몸에 골고루 돌아야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현대의학에서 입증이 된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논리를 사도바울은 한 장 전체에 걸쳐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간단하게 말해서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하면 산다는 말입니다. 오늘 부활장에서 바울은 왜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말을 했는지 듣고자 합니다.


 


1. 죄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중단시킨다는 것입니다.


 


34절.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들어 놓으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이 세 가지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땅에 충만해라. 땅을 정복해라. 생물을 다스려라. 이 말씀이 아담과 하와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때 에덴동산에 뱀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축복의 땅인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가정도 파괴되었습니다. 큰아들이 작은 아들을 죽이는 비극도 일어났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죄는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것이고 가정파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화인들을 맞아서 마음이 굳어져 버린 탓입니다.


 


지난 주에는 충격적은 뉴스를 접했습니다. 서울시장 박원순시장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3선을 했습니다. 차기대권주자입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이런 비극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그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결론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연약한 부분을 먼저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먼저 여자인 하와를 공격했습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갈대를 먼저 공격한 것입니다.


3선에 당선되면서 4년 임기가 보장되었습니다. 장장 12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분의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너무 잘나간 것이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잘 나가는 것이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안나가는 것보다 잘나가는 것이 축복이기는 하지만 축복을 축복되게 할려면 받는 자가 겸손과 절제로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잘 된 것이 오히려 선악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추축해 보건데 그분은 장기집권을 하면서 겸손과 절제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러닝머신을 한시간 뛰고 샤워를 해야하는데 하필이면 그시간에 수돗물이 단수가 된 것입니다. 급하게 물을 확인해보니 다라에 받아놓은게 있었습니다. 저거를 잘 나누어서 써야 양치질도 하고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합니다. 그래서 잘 분배해서 아끼면서 썼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물이 남더라구요.


하나님이 주신 것은 한 번 끊어져 봐야 귀중한 것을 압니다. 물관리도 잘해야 물이 복이 되는 것이지 물관리 잘못해서 홍수나면 다 날라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잘 관리해야 복이 되는 것입니다. 잘 관리하지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재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스톱시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 때문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사역은 끝장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역성경에서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죄를 멀리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번에 전 세계가 코로나의 영향을 받습니다만 코로나가 가져온 것 중의 하나가 죄에 대한 올스톱입니다. 사람들이 꼼짝 못하고 집에만 있게 됨으로서 죄가 스톱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코로나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긍정적인 면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죄가운데 살았습니다. 이런 것을 정화시키는 것이 코로나입니다. 사람들을 보다 더 겸손하게 만들고 보다 더 낮아지게 만들고 보다 더 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코로나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땅을 정화시키는 과정인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모든 죄악을 물에 잠기게 한 것처럼 코로나로 인하여 이 땅의 모든 죄악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죄를 멀리 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죄를 멀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영적인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31절.


 


제자들이 루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았을 때 루터는 대답했습니다. 첫째도 겸손이고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절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절제될 때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가정총무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노예로 팔려와서 어렵사리 편한 자리를 하나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나와 동침을 하자고 하면서 요셉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을 요셉은 뿌리치고 도망쳐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요셉은 모함을 받게 되었고 결국 감옥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감옥에서 왕궁직원들을 만나게 됩니다. 왕궁직원이 감옥동기로 들어온 것입니다. 거기서 얼굴을 트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바로왕의 꿈을 해결해 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애굽의 국무총리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자기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는 노력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웬만하면 쉽게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거룩한 자존감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비록 애굽의 노예로 팔려온 사람이지만 자신의 몸을 함부로 굴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자존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자존감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요셉은 죄를 멀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데 실습을 시켰습니다. 물 한 양동이를 가득 채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양동이에다가 물을 가득 가득 채우고 동네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가는 길에 아는 사람도 만나고 볼거리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에는 물 한 양동이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다 돌고 난 뒤에 스승이 물었습니다. “동네를 돌면서 무엇을 하였느냐?” 그때 제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 한 양동이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함부로 몸가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먹을 다 먹어가면서 놀 거 다 놀아 가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명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 때문에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 나는 매일 나를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고 갈파했습니다. 죄 가운데로 향하는 자신의 몸을 고민하면서 괴로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다하고 사는 것이 아니다. 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다 먹는 것 아니다. 마음대로 하고 살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절제가 들어갈 때 나를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하고 절제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이라는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활 때에는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41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별의 영광도 다른 데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소망하면서 힘쓰고 애쓰는 사람은 나중에 받을 상급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자신을 쳐서 복종을 시키고 날마다 죽는 그런 절제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부활 때에는 받는 상급은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공평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부활 때 받을 영광을 위하여 모진 고통과 수고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받을 기대감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배려를 많이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들고 나오는 제물까지도 빈부격차에 맞게 적절하게 차등을 두었습니다. 가정형편을 고려해서 제물을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족장이나 지도자들은 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지만 먹고살기도 힘든 빈곤층에게는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잡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는 많이 날라다니니까요. 그것을 잡아다가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배려를 많이 했습니다.


추수때도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추수를 할 때 모두 다 하지말고 한 모퉁이를 남겨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인이나 못사는 사람들이 베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걸인이나 못사는 사람일지라도 직접 낫들고 가서 자기가 베어서 먹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곡식을 찧어서 빻아서 갖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손으로 직접 낫을 들고 나가서 직접 베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없는 사람들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이예요. 그들에게 자립심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구제사업을 하다보면 문제가 뭔가 하면 항상 받아먹고 사는 사람들은 받아 먹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얻어먹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불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구제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 노력해서 자립심을 길러줄 것인가? 이것이 구제사업의 최종목표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식에게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주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잡는 밥을 가르쳐 주면 스스로 계속 잡아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애쓰고 수고한 자들에게는 그 수고한 대로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애쓰고 수고한 자가 더 받는 것이 공평입니다.


밤에 보면 풀려진 개들이 몰려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강아지들도 묶여 있는 강아지와 풀려져 있는 강아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차이점은 무엇인가? 풀려진 강아지는 자기가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찾아야 하지만 묶여져 있는 강아지는 주인이 직접 밥을 챙겨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매여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챙겨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애쓰고 수고한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실망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서 승리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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