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는 성도 (고전10: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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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는 성도(고전10:31-11:1)
오래전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장신대 교수 가운데 한 분이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를 사랑하여 제자들에게 하신 스승의 말씀입니다만 지금 생각해도 이 말씀같이 중요한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고 진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고 한국교회를 아름답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일찍이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 이하에 보면, 산상보훈의 결론적인 말씀으로 건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각자 집을 짓는데 어떤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고 어떤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습니다.
어느 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서 그 집에 들이닥칠 때 반석위에 지은 집은 그냥 서 있지만 모래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지고 만다는 비유입니다.
그 비유의 요점은 어떤 집을 지었느냐가 아니라 집을 지은 기초가 어떠냐에 있습니다.
집은 어리석은 사람도 짓고 지혜로운 사람도 짓고 누구나 짓습니다.
문제는 그 집의 기초가 어떠냐에 있습니다.
잘못된 기초에 집을 지으면 홍수가 날 때 무너져 버리고 반대로 든든한 기초에 집을 지으면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비유의 요점입니다.
집을 어떻게 짓느냐가 아니라 그 집을 짓는 기초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기초가 아니라 드러난 집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씁니다.
내가 얼마나 집을 잘 지었고 크고 화려하게 지었느냐에 관심을 갖다보니 기초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화려하게 지은 집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립니다.
무슨 신화를 이루었다고 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나 사업이 얼마 지나지 않아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얼마나 자주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 중요한 것은 보이는 집이 아니라 그 기초입니다.
든든한 반석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초는 무엇일까요?
물론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들은 것을 실천하는 모습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기초가 든든한 삶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그 기초가 성숙한 신앙적인 인격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서 말씀이 인격 속에 녹아들고 그 인격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기초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저는 우리 사회가 인간의 됨됨이, 성품, 인격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가 쌓아올린 업적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쌓아올린 업적만 있다면 그가 어떠한 인격자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풍조 속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인격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도 그가 이루어낸 업적이 없다면 그를 우습게보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 모습일까요?
주님의 가르침을 보면 전혀 옳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습이 고스란히 교회 안에서도 보여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격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많은 돈을 헌금하고 많은 일을 하느냐에 따라 신앙이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일을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다 좋은 것이고 훌륭한 일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업적에 의해 신앙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 23절에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많은 일을 행하고 업적을 나타내고 화려하게 보이는 집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기초가 예수님이 아니고 말씀이 아니고 인격적인 모습이 아닐 때는 그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집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업적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일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적인 변화에는 등한히 하고 그것을 모른 체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지금의 우리 사회는 너무 기능주의와 업적주의로 나가다보니까 인간성이 유린당하고 인간성이 상실되어가고 있고 삭막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최고의 신앙인 중에 하나로 꼽히는 욥이 나옵니다.
그에 대한 소개를 보면,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을 소개하면서 그가 무슨 일을 했다든지 무슨 업적을 많이 세웠다든지 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표현대로 하면 ‘교회를 몇 개 세웠다든지,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했다든지, 얼마나 많은 돈을 헌금했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욥이 어떠한 사람으로 살았는지, 어떤 존재로 살았는가? 하는 존재방식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인격, 어떤 성품, 어떤 사람으로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존재로 어떤 인격자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정말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중요한 부분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일부인데요, 사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많은 은사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 교회에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은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먼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와 같은 분쟁이 있었습니다.
시기와 음란이 있었고 서로간의 재산을 사취했으며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된 자유를 남용하였습니다.
애찬을 나누는 동안 술에 취했고 다른 은사들보다 방언의 은사를 우위에 두고 다른 은사를 무시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교회임에도 또 그렇게 많은 문제점이 유발되는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성숙된 영적 인격을 개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 결여된 인격을 개발하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제일 좋은 은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랑의 성품을 이해하고 사랑을 소유한 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될 때 비로소 그 은사들은 아름답게 활용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모습이 없는 은사는 문제만 일으키고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활이 좀 어려운 어떤 부인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받으려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찾아온 환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고 어떤 경우는 낫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생활이 어려운 이 부인이 자기가 기도해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금전관계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꼭 갚겠다고 약속하고 돈을 빌렸지만 약속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사람들이 그에게서 발을 끊고 돈을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이 부인도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얼마나 기도해주고 병을 고쳐주었는데 은혜를 모른다.’며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하여 많은 교인들이 시험에 들고 낙심하고 떨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신앙적 인격이 수반되지 않은 채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고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은사만을 강조하지 말고 은사를 주신 하나님과 그 분의 인격을 닮아 가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이 명령은 고린도교회와 진배없는 한국교회를 향하여서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좀 더 성숙한 교회,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주님의 인격을 본받고 주님의 형상을 내 속에 이루기까지 더욱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운 것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열매를 맺는 것도 어쩌다 한, 두 번 맺는 것이 아니라 늘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말합니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화평의 열매, 오래 참음의 열매,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이처럼 성도의 인격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자라는 것, 성품이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바른 사람이 되고 바른 살을 사느냐가 열매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은 그가 무슨 일을 했다는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격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느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는 존경받는 학자요 목회자였습니다.
이 목사를 기억하고 있는 한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존 스토트 목사의 인상적인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년에 자기가 설립한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지내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그가 평생을 섬겨왔던 교회의 은퇴목사로 있으면서 젊은 후임목사가 설교할 때 예배에 빠지지 않고 사회자나 헌금위원이 되어서 돕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스토트 목사의 어떤 명 강의나 설교보다도 깊은 감동과 은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앙적인 인격은 정말 감동을 주고 커다란 교훈을 줍니다.
인격자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런 존경스러운 인격자로서의 신앙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대학생들이 청년들이 흠모할 만한 인격자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대학생들과 청년들을 비판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를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인격적인 감화를 끼칠 인격자는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날 원하시는 신앙인은 인격자로서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필요한 사람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화려한 업적이 없어도 괜찮고 큰 능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없어도 괜찮고 많은 헌금을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단지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서 모든 교인들이 바라보고 흠모하고 따라가기를 다짐하는 인격적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기쁘게 맞아주실 줄 압니다.
그런 면에서 먼저 제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자로 살아가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성숙한 인격자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고 계속해서 조금씩 확장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청주 우리 봉명동에서도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우리 가까이에 바이러스가 다가왔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코로나 이후의 신앙생활은 많은 것에서 변화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 같습니다.
먼저는, 기초가 확실한 성도와 기초가 확실하지 못한 성도가 뚜렷이 구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기초가 모래위에 세워진 성도들은 신앙이 무너져 내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기초가 반석위에 세워진 성도들만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제는 대면하여 전도를 한다든지 복음을 전한다든지 하는 일이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만나려고 하지 않고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전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지상명령으로 주신 전도를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그나마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격적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전도하는 것입니다.
조금 느릴 수 있고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밖에 다른 대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라기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인격을 본받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므로 여러분의 신앙을 반석위에 세우시고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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