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호13:1-8)

본문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 호세아 13:1-8                                                                                    


 



본문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탄식하는 말씀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수가 많지 않은 백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500-600만 정도였고, 지금도 500-600만 정도로 그 수에 변동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까닭에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단히 무서워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원도 땅만한 곳인데도 세계인들은 이스라엘을 함부로 다루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의 바로가 얼마나 혼쭐이 났는지 모릅니다. 끝끝내 출애굽 시켜 주지 않으려 하다 마지막에는 아들이 죽고 난 후 할 수 없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다 데리고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백성은 이렇게 남들이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도,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리고 성은 공격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이 성이었고, 그 성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커서 정탐 갔던 사람들의 보고가,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고 할 정도였으며, 그 땅은 기름지고 먹을 것이 많고 금, 은, 동, 철이 풍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담대한데 비해, 여리고 사람들은 무서워 떨며 이스라엘의 침공을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정신무장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전쟁 무기가 아무리 많더라도 정신 무장에서 지며는, 지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미디안과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 싸울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미디안의 연합군은 메뚜기처럼 많고, 기드온 쪽은 300명의 결사대밖에 없었으나, 간담이 서늘했던 쪽은 300명이 아니라, 군단 병력을 가진 미디안의 연합군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이 종의 신세로 애굽으로 팔려갔지만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 요셉 한 사람 앞에 모든 사람이 무릎 꿇고 절을 하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과 그 민족은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고, 안전한 삶을 살 수 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1. 그런데 에브라임은 그 권위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본래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의 두 아들 가운데 둘째인 에브라임의 자손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공로가 많다 하여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각각 한 몫씩의 기업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의 후손인 에브라임 지파에서 여호수아가 나왔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 1세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명문세가였습니다.


그러한 에브라임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자기를 높이는 교만 때문입니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라고 본문 1절에 말씀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것은 교만입니다. 남이 나를 높여 주어야 그것이 진정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가까이 하는 법이 없습니다.





둘째, 바알 숭배의 범죄 때문입니다.


또 본문 1절은 “바알로 인하여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망했다는 것은, 죽었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재기 불능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 가서 70년 동안 고생하였으나 그루터기가 남아서 다시 와서 나라를 재건하였습니다만, 북왕국은 완전히 망해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중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망해도 뿌리는 남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거꾸러져도 뿌리는 남아야겠다, 뿌리가 뽑혀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왜 에브라임이 뿌리째 망했습니까? 그것은 악한 행위를 버리지 못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우상을 섬기는 죄 때문이고,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을 섬기고 찬송하기 위해서 선택받은 민족이었으므로 그 존재 가치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었는데,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얘기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도 숨쉬고, 눈을 깜박거리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도 많은 사람이 화장터로 가는데 유독 우리는 살아서 숨쉬고 활동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두신 이유, 이 땅에 남겨 두신 이유는,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그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후, 아들의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돼지 인생으로 전략했던 것과 같습니다.




만세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그리스도인 답게 살다가, 죽을 때도 그리스도인 답게 죽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며, 우리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시겠습니다.





2절은 이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본래 은, 금, 동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학개서 2장 8절을 보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신명기 8장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제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할렐루야!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둘째는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공교함이란 “자기의 재주껏”이라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지혜와 기술을 다해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2장 28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나라를 남북으로 찢어 나누어 나간 뒤에 사마리아 성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금을 모아다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금송아지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재주가 있어야 합니다. 또 아론은, 모세선지자가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금식 철야하면서 율법을 받는 동안에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도 인간들은 자기들의 지혜와 첨단 기술의 산물들을 창조주의 자리로 격상시켜 놓고 있습니다.




재주 없는 사람이 죄 짓는 것과, 재주 있는 사람이 죄 짓는 것은 방법과 차원에 있어서 다릅니다. 그래서 가진 지식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죄를 짓기로 하면 지식을 가진 사람이 조직범죄, 지능범죄를 할 가능성이 많은 법입니다.




내가 가진 재능, 탤런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져야지 그것이 육신의 정욕을 위해,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쫓아 금송아지나 우상을 만드는 데 쓰여져서는 안 됩니다.




“컴퓨토피아”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앞으로 디지털 사회에서 컴퓨터 중심의 세계가 도래하리라는 뜻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곳에서는 사람 대신 기계가 왕 노릇하게 되고, 사람의 건강도, 공장도, 회사도 컴퓨터가 관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과학 문명이나, 기술 문명이, 정신 문명을 누르고, 지배하기 시작하면, 소위 비인간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장차 되어질 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셋째, 금송아지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맞춤은 경배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최고의 경배를 금송아지에게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들이 만든 우상에게 돌린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경배를 돌리고, 찬양을 돌렸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3절을 보니까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구름, 이슬, 쭉정이, 연기 모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다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식이나 기술, 경험을 믿고 사는 인간 숭배 문화의 결국은 알맹이 없는 쭉정이요, 연기요, 이슬입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도 그랬습니다. 창세기 11장 4절에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가 악함을 보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흩어 버리셨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나팔을 불어댈지라도, 하나님께서 흩으시면 그날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4절에서 새롭게 들려오는 복음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만이 구원자란 말씀은, 곧 복음입니다.


이같이 우리는 무서운 진노 뒤에, 용서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서 43장 11절 말씀을 보면,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45장 21절은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나는 구원자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라는 말씀은, 신약에 와서, 창세에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우리를 지으신 예수그리스도 그 분에 의해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또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귀한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구약에서 “나는 구원자다,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라는 말씀은, 인간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와 진노 다음에 들려주시는 구원의 메시지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나는 구원하는 하나님이다” “나에게로 나아오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떠날 때 받는 징계와 심판은 무엇입니까?





5-8절을 보면 사자, 표범, 곰이 저희를 찢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들은 아주 포악하고 사나운 짐승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을 떠나면 그것들이 찢고 삼키고 만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 해외토픽란에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한 안내원이 관광객들과 함께 사자 공원을 차를 타고 돌다가, 사자떼들이 누워있는 근처에서 외국 관광객들 앞에서 안내원이 객기를 부려 안전한 차 안에서 보호막이 전혀 없는 차 밖으로 나갔습니다. 차 밖으로 나가서 사자에 대해 설명을 하던 중, 근처에 누워있던 사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만 관광객들이 보는 가운데 사자공원 안내원이 사자 밥이 되고 말았다는 끔직한 내용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 분 밖으로 나가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 원수 마귀가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삼킴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안전한 것입니다.




예수 밖으로 나가면 그 순간이 삼키우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혹 우리의 삶에 아픔과 유혹이 오고, 영적으로 고통이 온다면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병상에 누워 “함께 찬양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기도드리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하는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 분 곁에 있고, 예수, 그 분 안에만 있으면, 내 마음속에는 평화가 넘치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못 자국난 피묻은 거룩한 손이 나를 덮어 보호해 줍니다.


그래서 시편 63편 7절에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라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52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