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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가 함께 하시니 (습3: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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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가 함께 하시니 습3:14-20, 행18:1-10


중국 복음화에 80년 생애를 바쳤던 허드슨 테일러 (James Hudson Taylor) 선교사의 조언을 듣기 위해 후배들이 방문하였습니다. 테일러가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선교사의 길을 가려고 합니까?” 그들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저는 황무지 같은 중국 땅에 교회가 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중국인들이 복음을 들고 미개한 삶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그러자 테일러가 말했습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는 중국이 사랑스러워서도 아니고, 모래바람이 일고 미개한 사람들이 많은 이곳의 생활이 즐거워서도 아닙니다. 이곳 생활이 무얼 그리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사랑에 붙잡히면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조금도 즐겁지 않은 것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그 길도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기뻐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능자가 함께 하시면 어떤 일을 만나도 강하고 담대할 수 있고, 주께서 원하시는 일을 멈출 수도 없고, 그 길이 아무리 어려워도 기쁘고 행복하게 걸을 수가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전능자가 함께 하시니”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전능자가 함께 하시니,


 


1.두려워 말고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구약 본문 13절에 ‘그들(이스라엘의 남은 자)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했고, 15-16절에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환경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신분의 바벨론의 포로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성전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성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합니다. 이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의 장정들은 모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에 갈 수 없다는 것은 곧 절망을 의미합니다. 암담한 현실이지만 스바냐 선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무리 암담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가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전능자를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으로 대하시며, 구원해 주시고, 돌보십니다.


신약 본문 행18:9에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위로가 됩니다. 바울이 어려울 때, 힘들 때 하나님은 늘 말씀으로 그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하십니다. 전도하면서 위협을 당할 때 바울도 사람인지라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성도들이 됩시다. 우리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러면 온갖 두려움과 염려, 근심들이 물러갑니다. 주님이 주시는 강 같은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지혜로 승리하는 성도가 됩니다.


아프가니스탄 선교사 크리스티 윌슨(Christy Wilson)의 이야기입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양 사육이었습니다. 털을 비롯하여 고기, 그리고 가죽까지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염병이 돌아 갑자기 양들이 죽어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모두 근심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윌슨 선교사는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응답을 주셨는데 미국의 롱아일랜드 산 오리를 들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윌슨 선교사는 항공편으로 상자를 받았는데 24개의 오리 알 가운데 22개가 깨어지거나 썩어버려 부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2개의 알을 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두 개의 알이라도 부화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암컷과 수컷으로 태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교사의 기도대로 각기 암컷과 수컷으로 부화했고 계속 생산을 거듭하여 오리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오리들은 양들이 물을 마시는 냇가에 번식하고 있던 뱀들을 잡아먹었습니다. 그러자 양들에게 번져가던 전염병이 그쳤습니다. 전염병을 옮긴 숙주가 뱀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국왕은 윌슨 선교사를 불러 치하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음껏 선교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때 윌슨은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어려운 위기를 만나 절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가운데도 구원과 명성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 본문 습3:16에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했습니다. 여기서 ‘손을 늘어뜨린다.’는 말은 원어로 ‘이르푸 야다이크’라는 관용구입니다. ‘절망이나 낙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정어 ‘알’과 같이 사용하여 여호와께서 왕으로 계시기에 결코 두려워할 것도, 낙심하거나 좌절할 일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여러모로 암담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태양신과 바알신이 득실거렸고 우상숭배와 매춘행위가 기승을 부리는가 하면 국민들은 한 결 같이 가난과 사회적 혼란으로 저마다 낙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도탄 속에 겨우 여덟 살 된 요시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밝아오는 구원을 바라보고 기뻐하라는 겁니다. 오히려 기죽지 말고, 기를 펴고 살라는 것입니다. 즉 위축되지 말고 힘과 용기를 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싸워주시기에 어떤 대적과의 싸움에도 절대로 패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때 둘러싸고 있는 온갖 어려움과 두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신약 본문 행18:10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시 바울 사도는 지식과 지혜의 도시인 아테네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하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허탈한 마음을 가지고 맥없이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한 없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실패한 사도 바울이 다음의 사명지로 삼은 곳은 고린도입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로마에서 아시아로 가는 뱃길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교통과 무역과 정치의 중심지입니다. 부유한 도시 고린도는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와 함께 고대 헬라의 4대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는 그 당시 60만 명의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자유인이 20만 노예가 4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의 빛으로 불렸습니다. 고린도에는 미의 여신, 사랑의 여신인 헬라 이름으로는 ‘비너스’, 로마 이름으로는 ‘아프로디테’의 거대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에는 1000명의 여사제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신의 여사제가 신께 제사 드린다는 것이 매춘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음란한 도시, 부도덕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 고린도 같은 사람아” 하는 욕이 있었는데 “이 방탕한 놈아!” 하는 뜻이었답니다.


사도 바울이 지식과 지혜의 도시인 아테네에서 실패하였는데, 이번에는 부유한 도시, 그러나 부도덕하고 음란한 도시인 고린도에서 다시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고린도로 가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고전 2: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그의 마음이 매우 연약해져서 두려운 마음, 떨리는 마음으로 고린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지켜주니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염려하지 마라. 이 성에는 내 백성이 많으니 잠잠 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고 격려하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 이민 가서 일하고, 쉬는 날이면 전도에 열심을 내던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이 한 번은 주택가를 돌아다니다가 한 웅장한 저택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집 벨을 누르고 싶은 견디지 못할 충동을 받았습니다. 물론 외국 사람의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에서 황인종이 벨을 눌렀다가 거절한다면 자존심이 많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누르고 싶은 것입니다. 벨을 세 번째 누를 때까지 아무 소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되돌아가다가 왠지 견딜 수가 없는 마음이 또 들어서, 다시 네 번째로 벨을 눌렀습니다. 그랬더니 안에서 늙은 영감님이 고개를 내밉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예수 믿으십시오.” 집사님은 단지 그 말만 하고 전도지를 주고 돌아갔습니다. 그 전도지 속에는 집사님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튿날 전화가 왔습니다. 바로 그 영감님이 만나자는 전화였습니다. 집사님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성령님의 뜻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집사님이 벨을 누르는 순간, 그 노인은 이 세상이 싫어져서 자살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대들보에 끈을 매고 목을 걸려는데 벨이 울렸고 또 울렸습니다. 세 번까지 울렸습니다. 소리가 그쳐서 다시 목을 걸려고 하는데 네 번째 벨이 울리더랍니다. 그리고 받은 전도지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전도는 죽을 생명도 살리는 일입니다. 잠24:1에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했습니다. 우리 모두 현실이 낙심되는 상황일지라도 손을 늘어뜨리지 말고 힘써 주의 일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하나님과의 교제는 언제나 최고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구약 본문 습3:17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너무나 기뻐하시는 분이요,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하시는 분이요,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분으로 우리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즐거운 노래를 부르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를 절망에서 소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 사랑이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켰습니다. 그 사랑이 이혼을 다섯 번이나 했지만 여전히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수가성의 여인을 변화시켰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고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참 좋으신 모습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교제가 최고의 기쁨이요, 최고의 행복입니다. 이 관계를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 세상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세상 연락에서, 물질에서, 명예와 권세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고 주님을 떠나 사단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게 되고,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 기쁨도, 만족도,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한 삶의 결과는 탄식이요, 절망이요, 영원한 형벌이요,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요, 후회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시고 너무 안타까워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과거의 잘못된 실수나 죄책감 때문에 열심히 믿음생활을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때 마귀는 과거의 실수나 잘못을 계속적으로 지적하면서 "너 같은 것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 라는 속삭임으로 우리의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과거의 모든 죄로 인한 더 이상의 형벌은 없다고 선포하십니다. 본문 15절에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즉 "과거는 모두 용서하고 잊어버리겠으니, 다시 새롭게 희망을 가지고 시작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 회개 하고 아버지께 돌아올 때 기쁨이 회복되고, 만족함과 행복이 회복되고, 명성과 칭찬을 얻게 됩니다.(20절)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통하여 다시 힘을 내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우리를 정죄하는 어떤 자들의 소리에도 자유롭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기죽지 말고 하나님의 용서의 확신을 가지고 자유 함을 얻는 성도가 됩시다.


세상에는 주님의 긍휼과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탕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돌아 올 때 얼싸 안고 기뻐하며 맞아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의 "The Capitol of the World(세속의 신전)" 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보면 스페인의 한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간 아들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야, 모월, 모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약속한 날 약속한 장소에 나가보니 ‘파코’ 라는 이름을 가진 800여명의 젊은 남자가 저마다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헤밍웨이 자신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용서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사도 바울을 격려 하시면서 잠잠 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 하신 것 역시 주님을 떠난 백성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고, 칭찬을 받고, 존귀케 되는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전능자가 함께 하시니”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전능자가 함께 하시니,


 


◎.두려워 말고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언제나 최고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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