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듣는 고넬료의 자세 (행10:24-33)
본문
말씀을 듣는 고넬료의 자세/사도행전 10 : 24 - 33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심방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춘계 대심방, 추계 대심방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성도들은 심방 받을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교회는 누구 집에는 며칠 몇 시 쯤 심방을 할 것이라고 광고를 하였습니다. 심방할 때는 목사, 장로, 권사들과 집사들이 작게는 대여섯 명, 많게는 열 명 이상 이였습니다. 성도들은 집안 청소를 하고 대접할 음식도 장만하고 그리고 그 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큰 방에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작은 상을 펴 놓고 방석을 깔아 놓고 기다렸습니다.
심방대원들이 그 집에 들어서면 반가이 맞이하고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과 혹은 이웃 사람이나 친척까지도 하던 일을 멈추고 함께 예배에 참석시켰습니다. 목사님은 그 집에 알맞은 말씀을 전하고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집은 마치 큰 축복을 받은 것처럼 감사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심방이 잘 되지 않습니다. 산업사회가 되다보니 모두 바빠서 심방을 받을 준비도 없고 겨우 틈을 내어 심방을 하면 바쁜 시간이다 보니 말씀을 듣는 자세도 준비가 되지 않고 심방 같지 않고 형식적인 심방이 되어져 심방이 주는 축복을 받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언제부터 대심방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의 심방을 받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베드로의 심방을 통해 크게 복을 받았습니다. 고넬료는 이방 사람입니다. 로마 황제로부터 명을 받아 이달리야 부대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백명의 군인을 데리고 온 가이사라의 치안을 책임자 입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당시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 오는 것이 위법인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였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이지만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가운데서도 특별히 고넬료를 택하셨고 그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섬기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습니다’(2) 고넬료는 이미 유대인들처럼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고 구제도 하였습니다. 기도하고 구제하였던 것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습니다(4). 이제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사자를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여 복음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5).
그때 하나님은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며 고넬료의 집으로 인도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의 집에 가는 것은 위법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 온 것을 보고 고넬료의 집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그 사람들을 따라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를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자기 집으로 오는 것을 환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감사한 마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크게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말씀 듣는 자세입니다.
먼저 고넬료의 말씀 듣는 자세는 절하는 마음입니다. 고넬료는 자기 집에 들어 올 때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어 절했습니다(25).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서 백부장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로서 촌사람입니다. 외모로 보면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온 집안과 더불어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오자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는 하나님의 사자로 정성을 다하여 환영하였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사자 앞에 겸손했습니다. 그넬료는 백부장이란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많은 권력자들이 복음 앞에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세상적인 어떤 권력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고넬료는 인간 베드로 앞에 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 앞에 절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 앞에 어떤 권력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되고 그 말씀이 주는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성도들 가운데는 목사님과 마음이 맞지 않아 불평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은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설교자와 마음이 털어지면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교자를 하나님의 사자로 존경하는 마음이 없이는 그 말씀이 옳게 들려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너희를 영접한 것은 나를 영접한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것을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전도자로 파송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10:40).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하나님의 사자로 자기 집에 온 베드로이기에 그를 극진하게 영접하고 그 앞에 절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인간 베드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로 보았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절하는 것이 형식적인 눈가림으로 하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을 때, 베드로가 황송해서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고 절하는 고넬료를 말렸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심방을 하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면 준비를 해서 맞이하는 것을 볼 때 황송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영접하는 마음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하고 맞이하는 집에는 전해지는 말씀이 그 집에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세가 되어 말씀이 주는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고넬료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33)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보니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고넬료는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24) 있었습니다. 고넬료의 집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원하는 자세였습니다. 마치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였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듣기를 원하는 자세였습니다. 오늘도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우선 말씀을 들어보고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듣고자 하는 마음이 준비된 옥토였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들어보고 마음에 들면 듣고 순종하겠다고 벼르는 것은 좋은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고넬료는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는 다른 로마 백부장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는 자기 하인을 고치고자 예수님께 나아와서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마8:8)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가라고 하시면 가고, 오라고 하시면 오겠으니 주님은 말씀만 하시라’는 대단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들어보고 맘에 들면 오늘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동성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열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열린 마음, 열린 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 될 때 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간절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마른 땅에 물을 붓는 것처럼 그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들어오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말씀을 의미 없이 듣는 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마음 자세가 아니기 때문에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졸음이 오는 것입니다.
셋째로 고넬료는 하나님 앞에 있는 마음 자세였습니다. 고넬료는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33). 고넬료는 베드로가 전해주는 말씀을 ‘주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 말씀은 주께서 목사에게 전하라고 명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목사의 말이 아닌 주께서 부탁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얼굴을 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귀는 주님의 음성에 기울여서 하나님과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에 고넬료처럼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앙적 자세가 매우 필요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 역시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주신 말씀을 전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자세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면 고개를 숙이고, 아니면 눈을 감고, 다리를 꼬으고, 팔장을 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옛날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군수 앞에 선 직원들의 자세를 본 일이 있습니다. 마침 계장 한 분이 군수 앞에 결재를 받는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군수는 40대였고 계장은 다음해면 은퇴할 나이였습니다. 나이로 따지면 아들 앞에 아버지뻘입니다. 그럼에도 군수 앞에 선 나이가 많은 계장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똑 바로 서서 군수가 하는 말에 ‘예,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자세인가를 한번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어느 종교든 그 종교마다 경전이 있습니다. 회교에는 코란이 있고 유대교는 사서삼경이 있으며 불교에는 불경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책(the Book)’이라고 합니다. ‘그 책’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종교가 있어서 경전이 있지만, 기독교는 성경이 있어서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졌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감된 책이요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어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살아 있는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 앞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특별 계시인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들려지도록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전해 주어야 하고 가르쳐 주어야 말씀이 말씀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이디오피아 여왕 내시의 병거를 따라가다가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는 것을 보고 묻습니다. ‘그 성경의 뜻을 아느냐’고, 이때 내시는 ‘말씀을 읽기는 하지만 가르쳐 주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알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빌립은 내시의 병거에 올라 읽고 있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가르쳤습니다. 그 순간 내시는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내시는 돌아가서 이디오피아에 교회를 세운 최초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디오피아의 교회가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존속하게 된 중요한 역할을 한 자가 바로 내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누군가를 통해서 말씀을 전하며 가르쳐 전파하게 하십니다.
넷째는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듣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아무리 말씀이 전해져도 마음이 닫히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성령의 역사가 동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감동이 되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역사하실 때 말씀에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말씀을 듣기 전에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의 신앙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꿀송이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소서, 지키겠습니다’ ‘깨닫게 하소서, 따르겠습니다’ ‘말씀은 나의 등불입니다’ ‘내 생명입니다’ ‘나의 사랑입니다’ 라고 말씀에 대한 그의 애정이 구구절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사랑하는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광야나 굴속에 숨어 있을 때 성전을 사모하였던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여 그 마음이 쇠약했다는 고백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왕이 되었을 때 주의 법궤를 시온 성으로 메고 옮겼을 때 마치 어린 아이처럼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이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좋았든지 여러 편의 시를 쓰고 노래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넬료처럼 우리도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듣기 위해 마음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말씀 듣는 시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무슨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영혼의 양식이 될 뿐 아니라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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