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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뼈들아 살아나라 (겔3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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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뼈들아 살아나라 / 에스겔 37:1-14


 


(서론) 지난 주간에 제가 경험한 작은 에피소드입니다.


화요일 늘 다니던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았습니다.


집에 와서 바로 유 권사님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처방전을 보냅니다. 약은 20일치가 남아 있으니 나중에 천천히 주셔도 괜찮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에 권사님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처방전 보내주세요.’


알고 보니 약을 처방해달라고 하고는 정작 처방전은 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없네요.’ 하고 처방전을 보냈더니 ‘요즘 다들 그렇죠. 우울하고 침체되었고. 기운내세요 목사님∼∼’답장이 왔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코로나 19로 인하여 참 많이 힘든 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운 내시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19를 경험하면서 참 답답하고 힘든 것은,


먼저, 내가 감염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감염되면 나는 물론이고 가족들 이웃들 직장 사업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게 되는데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둘째는, 경제적인 어려움입니다.


바이러스로 일도 못하고 직장에 나가지 못하고 사업이 잘 안 되니까 당연히 가정 경제에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회복된다고 해도 다른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한국경제가 잘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셋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언제 종식된다는 확신만 있으면 이런 저런 어려움과 두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언제 끝난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2,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이 봄에 유행하다가 잠시 주춤하고 다시 가을에 2차로 유행했는데요, 1차 유행 때보다 5배나 피해가 심했다고 합니다.


이런 예를 들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도 언제 끝날지, 언제 다시 유행할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 이란 유럽을 거쳐 지금은 미국에서 확산하고 있는데 중남미 아프리카에 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4월 5일까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다가 학교가 개학하면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언제까지 이렇게 마음 졸이며 살아야하나?’


‘집에 머물고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이런 답답함과 두려움이 있지만 성도 여러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을 갖고 잘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의 기도가운데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이 어려운 시절을 잘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유다 백성들의 삶은 참으로 답답하고 힘든 생활이었습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삶을 살아갔는지 여호와께서는 마른 뼈의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이것이 너희들의 모습이요 삶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저는 마른 뼈가 수북이 쌓여있는 모습을 실제로 캄보디아에 가서 보았습니다.


킬링필드로 생겨난 수많은 해골과 마른 뼈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고 묻는다면 당연히 ‘살 수 없습니다.’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얗게 말라비틀어진 해골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런 해골을 보여주시면서 이 해골이 바로 ‘너희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소망 없고 절망가운데 살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마른 뼈를 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절망적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마른 뼈들을 향하여 에스겔 선지자에게 대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가 살아나리라’ 여러분 이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해골바가지 밖에 남지 않은 그 뼈들이 정말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렇게 대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이 뼈들도 살아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씀을 대언하라는 명령은 오늘 우리를 향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희망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 속에 살고 있는 바벨론 포로들을 향하여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신 주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들고 답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줄 압니다.


물론 우리들도 힘들고 어렵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내 말을 대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희망 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사명이 아닐까요?


그러면, 어떻게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부정적인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에스겔의 이 말은 대답하기 어려울 때 흔히 쓰는 말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목회자들에게 어떤 요청이 왔을 때 ‘한 번 기도해봅시다.’대답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정말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십중팔구는 못 도와주겠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에스겔은 분명히 자기 생각으로는 이 뼈들이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적인 상식을 갖고 사는 에스겔이 어떻게 마른 뼈가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에스겔은 여호와의 말씀을 부정하지 않고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이 에스겔의 대답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불가능하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왜요? 하나님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들 때는 자꾸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만 그럴 때 일수록 인간적인 생각을, 부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면 낫게 된다.’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면 안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10명의 정탐꾼들처럼 ‘우리는 결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했던 사마리아의 장관처럼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나의 생각이 늘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여러분의 생각이 결코 옳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거짓된 생각, 아집에 사로잡혀 틀린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모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만 인간적인 생각, 부정적인 생각, 절망적인 생각으로 흐르면 신앙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원망과 불평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울수록 여러분의 생각을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주께서 아시나이다.’ 했던 이유는 자기 생각에는 안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네가 대언할 때 살아나리라’ 고 하시면서 “이로써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된다는 말씀은 여호와는 이런 일을 행하심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바로를 항복시켰습니다.


그 바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천하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며 스스로 신으로 숭상 받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 바로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가르셔서 마른땅같이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40년 동안 200만의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32:27)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아무리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소망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셋째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마른 뼈들을 향하여 대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분명 우리의 생각으로는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의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시고 어떤 일도 능히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갖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해서 대언해야 합니다.


먼저는 우리 자신에게 대언해야 하는데, 어쩌면 우리 자신이 그 마른 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실망가운데 살아갈 수 있고 절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고 우울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하여 담대하게 외쳐야 합니다.


‘나는 소망 없는 자가 아니다. 나는 절망에 빠질 자가 아니다.’


‘나는 능히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소망가운데 승리할 수 있다.’


‘나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선포하여 연약한 마음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대언함으로 절망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절대로 절망에 빠져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우리는 절망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합니다.


오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정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언제 종식될지 알 수 없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힘들고 답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명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광풍에 휩쓸려가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지키실 것임을 선포하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너희가 먹지 못한 지가 벌써 열 나흘째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주고 소망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마른 뼈도 살리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가 먼저 희망을 갖고 긍정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복음만이 하나님만이 이 나라를 살리며 문제를 해결하실 분임을 선포하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울러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적은 사랑의 모습이라도 보여야 할 줄 압니다.


우리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긍정의 메시지, 사랑의 모습이 그들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되고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른 뼈들에게 대언했을 때 정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서로 연결되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그 위에 가죽이 덮이면서 사람의 모양이 됩니다.


에스겔이 다시 대언했을 때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어떤 마음으로 대언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여 대언했을 때 이런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지만 주님의 능력 안에서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현실 속에서 소망을 가질 수 없지만 주님의 임재 안에서 얼마든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보다 크시고 상황보다 크신 위대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어려운 시국을 잘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 부활의 메시지를 대언할 수 있는 이 시대의 희망의 등불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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