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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하나 짐승 같은 사람 (시4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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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하나 짐승 같은 사람/시편 49 : 12- 20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2).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라는 말씀있습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 짐승 같다’라는 말씀은 너무나도 절실한 교훈을 줍니다. 존귀한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은 가장 존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물질만 좇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짐승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으로서의 참 가치는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가끔 사람으로서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사람 좀 되라’고 말 합니다. 짐승을 보고 ‘짐승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사람이 되라는 말은 사람답게 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람을 ‘존귀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만물을 다스릴 만큼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존귀한 사람이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죄를 범한 이후로부터 사람은 짐승과 같은 존재로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비록 타락은 했지만 그래도 사람에게는 짐승과 다른 이성이 있습니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하고 사람으로서 잃어버린 존귀함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옳고 그름을 깨닫고 옳은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동물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모릅니다. 단순하게 본능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을 합니다. 선과 악을 구분합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배우고 깨닫고 연구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비록 타락은 했지만 그런대로 잃은 존귀함을 회복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서의 짐승에 가까운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짐승 같다고 합니다.


인도의 교육학자인 케일리는 ‘현대인에게 세 가지 정신적 죄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것을 남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치지 않는 것 역시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는 것도 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배운다는 것도 항상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울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배울 수 있는 길이 없게 됩니다. 가르치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을 놓치면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할 수 있는 것도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베푸는 것도 기회를 놓치면 베풀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놓치는 것도 죄가 됩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때문에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은 소홀히 여기고 별 쓸모없는 것을 붙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한심한 짓을 하고 있는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돈을 벌어 모으는 사람입니다. 죽기 살기로 일을 하였습니다. 남들은 쉴 때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먹을 것도 먹지 않고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은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벌어 모은 돈으로 병원비로 다 쓰고 죽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돈 보다 자신의 건강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짐승도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압니다. 소가 풀을 뜯어 먹지만 아무 풀이나 먹지를 않습니다. 자기 몸에 해로운 것은 골라내고 이로운 풀만 먹습니다. 동물도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정도는 압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몸에 해로운 것을 뻔히 알면서 먹습니다. 해가 되고 죽는 것을 알면서도 먹습니다. 위 수술을 받은 사람이 술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마십니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웁니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담배 값을 크게 올리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담배를 피웁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존귀하나 멸망하는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이미 타락한 이후부터 범죄한 사람에게는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짐승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리라”(1)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 모든 족속에 이르기까지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옛날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2)라고 하셨습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경제적인 빈부의 관계없이 모든 인생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럼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환난의 날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5절에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는 말씀에서 존귀하나 짐승과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환난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환난의 날’은 ‘세상 끝 날’이며 ‘대 심판의 날’입니다.


5절을 다시 봅시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고 에워싼다’는 말은 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죄를 먹고 마셨습니다. 죄와 더불어 살았습니다. 죄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환난의 날에 나를 따라다녔던 그 많은 죄악들이 나를 에워쌀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 같은 사람은 그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는 말은 환난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환난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환난의 날은 하나님의 정하신 날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도 환난의 날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아직도 환난의 날을 두려워하고 준비하는 것보다는 세상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 같은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9)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짐승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6)를 존귀하나 짐승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물질적 부요함을 신뢰하고 물질로 인해 만족하게 여기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사람입니다. 현세적인 만족과 육신의 안일만을 좇는 사람이 존귀하나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은 그들의 재물이 영원히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진 집이나 토지가 영원한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과욕을 부리고 물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과 그들의 토지는 어떻게 됩니까?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죽지 않고 좋은 집에 영원히 살 것처럼 재물에 애착을 두었지만 그 모든 것 다 남에게 주고 빈손으로 떠납니다. 이러한 짐승 같은 사람에게도 ‘환난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속전’(7)과 ‘속량’(8)이는 말씀이 있습니다. ‘속전’은 속죄함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 예물로 바치는 예물입니다. ‘속량’은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성전 세’로 반 세겔씩 속전을 받쳤습니다. 죄를 속함 받은 것을 감사해서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바쳤던 것이 ‘생명을 속량하는 값’으로 ‘속전’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바치는 예물이 속전입니다.


그런데 짐승 같은 사람에게는 그 생명을 속량할 값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영원히 마련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8)고 했습니다. 속전을 영원히 마련해도 죄를 속할 수 없다는 말씀은 죄는 속전으로 값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속량할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이라도 죄를 속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오직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써만이 속죄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존귀하나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짐승 같은 사람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14)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올’은 지옥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가운데가 그들의 거처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불이 짐승 같은 자들의 거처가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짐승 같은 사람은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지만 그러나 존귀한 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15)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올에서 건져내시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스올(지옥)에 던져진 자는 아무도 건져낼 수 없습니다.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신다’는 말씀은 스올에 던져지기 전에 건져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스올의 권세’는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 마귀의 권세’입니다. 사탄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스올에 던져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신다’고 했습니다. 스올에 던져지기 전에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환난의 날에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여 스올의 권세가 손도 댈 수 없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존귀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수있도록 인도하여 들이십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물질적 풍요가 인간을 죽음에서 영생에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어 전혀 무가치하며, 현 세상에서 누리는 인간적인 영광이 내세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 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6). 짐승 같은 사람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17). 욕심을 부리고 좋은 집에 살고 많은 재물이나 세상 영광도 죽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의 제물로 인해 이 땅에서 누리던 영광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헛것이며 그 영광은 단지 현세에서만 일시적으로 누릴 수 있을 뿐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얻은 재물과 지위 따위를 스스로 도취되어 자화자찬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18) 라는 말씀은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가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하며 부자는 스스로 자화자찬을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19,20)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의 종말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짐승 같은 사람은 죽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는 어두운 지옥불 속에 던져져 그곳에서 영원히, 영원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사람이 짐승 같이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는 이 불행을 왜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짐승 같은 존재가 아니라 환난의 날을 두려워하고 그날을 준비하는 존귀한 자가 됩시다. 하나님께서 영접하여 들이시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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