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시18:28-29)
본문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18편 28절-29절
18편 28절-29절: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28절: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다윗의 등불은 하나님이다. 다윗은 진리생명의 말씀을 자기의 등불로 삼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무엇으로 자기의 등불을 삼고 있는 건지?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건지?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흑암’이란 일반적으로 어두운 것, 캄캄한 것이다. 그러면 다윗의 흑암이 무엇일까? 다윗은 무엇을 자기가 입은 흑암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다윗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자기의 흑암으로 생각을 하고, 무엇을 자기의 등불로 생각을 했을까?
오늘날 각자 자기에게 있어서 흑암이 뭐냐? ‘나는 이게 참 어둡다’ 할 때 어떤 면에서 그런 거냐? 아는 면에 있어서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흑암이다. 그리고 이것인지 저것인지 알쏭달쏭한 것이 흑암이다. 그리고 흑암 가운데 있으면 눈으로는 못 보니까 아무리 손으로 만지고 해도 분명치 못하니 이것도 흑암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을 하면서 ‘뭘 만졌다. 안 만졌다’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깨닫는 면에 있어서 분명치 못한 이것도 자기의 흑암이다. 그리고 못 깨닫는 것도 흑암이다. 다윗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자기의 흑암으로 여기고 있다.
자기가 불이 없는 캄캄한 곳에 처해있다면 무엇이 있기를 바랄까? 빛, 등불이다. 그래서 캄캄할 때는 플래시를 가지고 간다. 등불을 가지고 간다. 자기가 캄캄한 데 있으면 무엇을 알 수 있겠으며, 보고 듣고 만진들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빛이 있어야 한다. 빛이 있으면 정형이 드러나고, 정모가 드러나고, 정색이 드러나고, 그러니 확실히 정관할 수 있다. 정시할 수 있다. 정찰을 할 수 있다.
성경으로 볼 때 이 세상은 죄악세상이냐, 천국화 된 곳이냐? 죄악세상이다. 그러면 죄악세상이라는 게 뭐냐? 어두운 세상이라는 거다. 그래서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깨닫지 못하는 것,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은 선악과 따먹은 세상인지라 죄가 많은 어두운 세상이다. 캄캄한 세상이다. 예수 믿는 자기가 이런 세상에 살면서 자기의 등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하고 있느냐?
우리가 신앙사상 면에서 말씀 깨달음에서 지혜지식적인 이치, 신적인 도덕이치,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는 옳은 것을 많이 가지면 능력자인데, 이런 능력자가 되어서 능력성의 분별, 도덕성의 분별, 생명이치의 분별을 바로 해야 한다. 그리고 깨닫는 것도 목사님이 말을 할 때 일반적 개념을 가지고, 일반적 생각을 가지고 말을 할 때는 안 믿는 사람들은 그 말을 수긍할지라도 예수 믿는 나는 ‘이거는 하나님 말씀의 깨달음이 아니다’ 하고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뭘 보고 옳다고 하느냐? 이치적으로 옳아야 옳은 거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치적으로 옳아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은 거다. 무조건 ‘믿사오니’는 안 된다. 이건 이치가 아니다. 제 마음에 드니까 ‘아멘’인지, 말씀이치의 깨달음에서 모양도 색깔도 성격도 성질도 성분도 운동의 방향도 운동의 목적도 분별이 돼서 그게 옳기 때문에 ‘아멘’인지?
그래서 이걸 하나의 예를 들면 단7:에서부터 다니엘이 이상을 본 게 나오고, 에스겔서에도 이상을 본 게 나오고, 계시록에서도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것이 많이 있는데, 땅에서 나온 짐승,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 등 많이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짐승들을 볼 때 진리말씀의 이치의 깨달음으로 그 모양을 생각을 하라. 단:에 짐승의 모양이 나오는데, 표범도 나오고, 표범에 날개가 달린 것도 나오고, 또 수양의 뿔이 가운데서 길어져서 정복을 해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데, 이 짐승들의 모양을 보면서 일반적인 운동은 물론이고 기독교 종교계 안에서의 운동의 모양을 봐야 한다. ‘성경에서의 짐승의 모양이 교회 안의 무슨 운동을 비유하고 있는가’ 하는 그 사상을 봐라.
또한 색깔도 볼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 있는 말(馬)을 볼 때 그 말의 운동은 신앙운동을 말해주는 것인데, 영적인 차원을, 진리이치를 못 깨닫는 면으로 죽여 들어가는 것은 붉은 말의 운동이라. 살인이다. 교회운동인데 살인운동이라. 이걸 볼 수 있어야 한다.
‘영적’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분들이 있는데, 살인에는 먼저는 육신을 죽이는 살인이 있는데, 이 살인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알고 믿는 사람도 안다. 그런데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게 있는데, 안 믿는 사람들 세계에서도 십계명이 있기 전에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게 있다. 그러면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 것이냐?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일반사람들의 생각과 그 차원이 같은 게 되는 거다.
사람을 육신적으로 죽이는 것은 일반세상에서도 살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벌레 한 마리를 죽이는 것도 살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들이 길을 갈 때 땅에 기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라도 밟아 죽이지 않으려고 확대경으로 땅을 보면서 가더냐? 중이 불공드릴 때 모기가 와서 자기 몸을 뜯으면 살생을 안 하려고 손으로 때려잡지 않고 그냥 부채로 쫓기만 하느냐?
일반세상에서 사람의 육신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고 하는데, 말 한 마디를 가지고 사람의 인격을 죽이는 이 살인은 모른다. 몇몇이 모여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이웃을 말로써 씹으면 이건 인격살인인데 이들은 이걸 살인이라고 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말을 가지고 사람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살인도 있는 거고, 말을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모든 재산을 훔쳐가서 망하게 하는 살인도 있는 거다.
기독교 안에서 지금 다 말세라고 하고 있는데, 심지어 이단자들도 말세라고 하고 있고 안 믿는 사람들도 세상이 죄악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말세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말세에는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자기 교회 목사님에 대해 거짓 종인지 참 종인지 시험을 해 봤느냐? 성경 요일:에 보면 거짓 종들을 시험하라고 했고, 영들을 시험하라고 했으니 어떤 방법으로건 시험을 해 봐야 할 게 아니냐?
그러면 거짓 종들 속에는 무슨 영이 들어있을까? 거짓 영이 들어있다. 거짓 영이 들어있는 목사님의 입으로 통해서 나오는 말은 전부가 거짓말이 된다. 거짓 영이 들어있는 목사의 입으로 통해서 나오는 모든 말은 거짓말이 되는 거다. 거짓 목사에게는 거짓 영이 통째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목사는 전부가 저질적인 신앙으로 무장이 돼 있는 거다.
점쟁이가 점을 쳐서 알아맞혔다고 하면 알아맞혔기 때문에 성령이고, 틀리면 귀신이 한 거냐? 점쟁이가 세상일을 몇 %나 알아맞힐지 모르겠지만 만일 100% 알아맞힌다면 그 사람은 신이다. 만일 점쟁이가 100% 다 알아맞힌다면 그러고 앉아 있겠느냐?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날아다녀야 할 게 아니냐? 자기의 앞길도 모르면서 무슨 남의 앞길을 알아준다고 하느냐?
그러면 거짓이 뭐냐? 일반적으로 날마다 거짓말만 한다는 거냐? 거짓말은 뭐고, 참말은 뭐냐? 사람이 참 사람으로 되어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말하는 것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영으로 보는 영원에 해당이 되지 않는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전부가 거짓말쟁이냐, 참말쟁이냐? 그들의 말을 하나님께서 참말이라고 알아주느냐, 다 거짓말이라고 하느냐? 거짓말이다. 왜 그러냐?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그 사람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전부가 하나님 앞에 해당이 안 된다. 전부가 사망이요, 죄요, 전부가 마귀 아래, 죄 아래 놓여있는 거다.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어떤 말을 해도 전부는 거짓말이 되는 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전부가 참말이냐, 거짓말이냐? 참말이다. 왜 참말이라고 하는 거냐? 예수님께서는 사람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라고 했다. 즉 너 죽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복을 받으려고 믿고 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구하는 것만 봐도 예수님의 뜻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수 믿는 것을 왜 자기감정에 치우쳐서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차원으로 믿느냐? 왜 일반차원으로 성경을 보느냐? 이러면 하나님의 뜻을 못 찾는다. 성경을 못 깨닫는다. 이건 지식전환이 안 된 거다.
뭐가 참이고, 뭐가 거짓이냐? 참이란 영원히 불타지 않고, 영원히 썩지 않고, 영원히 변질 변동되지 않는 것이다. 뭐가 이런 거냐? 참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것이요, 신령세계다. 성경은 전부 이걸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참말이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고 말을 할 때는 하나님의 소원과 목적의 뜻, 주님의 소원과 목적의 뜻, 성령님의 소원과 목적의 뜻을 말해야 한다. 이거는 삼위일체가 똑같다. 소원 목적이 똑같고 다만 활동의 방편만 다르다.
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썩을 것을 주면서 ‘이게 참 복이다’ 그러시겠는지, 하나님 당신이 보시고 당신 마음에서 제일 좋은 것, 영원히 가는 것, 영원히 영광스러워지는 것, 영원히 높은 것, 영원히 변질되지 않고 변동되지 않고 요동되지 않고 바람 불어도 날아가지 않는 영원한 참 복을 주려고 하시겠는지? 어느 것이 자기의 참 복이냐?
성경구절을 말한다고 해서 진리냐? 아니다. 자기의 소원 목적을 세워놓고 그것에 맞춰서 성경구절을 이리저리 붙일 수 있다. 성경구절을 똑 똑 떼어서 말을 할진대 여기저기에 있는 구절을 잘라 와서 하나의 구절로 맞춰서 ‘예수를 보면 죽여라’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다. ‘예수를 믿으면 빌어먹는다’ 하고 붙일 수도 있는 거다. 이렇게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겠느냐?
참은 영원한 것, 변질되지 않고, 변동되지 않고, 요동되지 않고, 불타지 않고, 썩지 않고, 바람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영원히 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영원히 가는 이것을 자기 자체화 시키고 사상화 시키고 자기를 진리의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참의 사람이다. 예수를 믿어가면서 자기 속에 옳은 이치가 들어있으면 이치의 말이 나오고, 이치적인 생각이 나오고,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이 죽음 저 너머에 결산을 내리게 된다. 이건 변질되지 않는 참이고 옳은 신앙이다.
그러면 거짓이 뭐냐? 참과는 반대로 변하는 것, 요동되는 것, 변질되는 것, 진동되는 것, 불타지는 것, 썩는 것, 바람 불면 날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것이 천국에 있느냐, 세상에 있느냐? 세상에 있다. 그러면 세상이 불에 다 타나느냐, 안 타느냐? 세상은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명예영광에 덜덜 둘려도 불에 타느냐, 안 타느냐? 다 탄다.
그렇다면 교회 인도자가 성경구절을 들고 세상 복을 중심으로 얘기한다든지, 종교적인 운동, 종교적인 사업을 내놓고 그 사업을 목적적으로 한다고 하면 이게 거짓이냐, 참이냐? 거짓운동이다. 이런 것은 성경을 몰라도 되고, 돈만 있으면 되고, 재간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성경을 깨닫는 것은 돈이 많으면 알아지는 거냐?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알아지느냐? 성경은 안 읽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 성경이 알아지느냐? 이건 귀신노름이다.
성경을 왜 준 거냐? 읽고 깨닫고 성경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라는 거다. 그런데 왜 성경을 안 읽느냐? 성경을 안 읽고 어떻게 깨닫느냐? 썩는 거, 망가지는 교육을 받으면 그것을 듣는 대로 그게 자기의 사상이 돼버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신 거다. 그런 종들에게, 그런 사상에 한 번 물리면 그 독이 들어가는 거다. 그 사상이 들어간다. 세상사상이 들어간다. 자기가 예수님을 수십 년을 믿었다면 비교를 해 봐라. 예수님의 소원 목적과 내 소원 목적을 비교를 해 봐라.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많이 닮을 수 있는 거다. 부자만 예수를 닮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자가 되면 예수를 잘 믿는 거냐? 잘 믿었기 때문에 부자가 된 거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중에 부자가 많은데 이런 사람은 예수를 잘 믿어서 복을 받은 거냐? 사람이 도덕성과 인격성을 가지고 가치판단 평가성을 내릴 줄 안다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치를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다. 이런 자를 마귀가 얼마든지 부려먹을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사기꾼들을 만나면 이 사기꾼이 자기 마음을 빼앗아간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면 어른들은 사기꾼이 자기에게 와서 ‘뭘 어떻게 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한 사람도 안 속아 넘어가느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대학교 문턱도 안 가 본 사람이냐? 세상에서 말(言)을 가지고, 가르침을 가지고 사람을 홀리는 게 있다면 기독교 안에도 거짓 종들로 통해서 예수 믿는 자기의 마음과 정신을 얼마든지 뺏어가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다윗의 무엇을 자기의 흑암으로 여겼느냐? 다윗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나의 흑암이다. 알쏭달쏭한 것이 나의 흑암이구나. 분명치 못한 것, 못 깨닫는 것이 나의 흑암이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자기의 등불로 삼았다. 그러면 우리교인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 못 깨닫는 것을 자기의 흑암으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의 말씀을 현재적으로 자기의 등불로 삼고 있느냐?
돈만 있으면 되는 거냐? 직장만 있으면 되는 거냐? 다윗은 당시에 왕이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가난해서 지금 이러는 거냐? 어찌 그리 사람이 어리석을까? 어린아이는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수준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 건지?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힘을 무엇으로 삼고 있느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세상이다. 세상을 자기 힘으로 삼는다는 것을 다른 뜻으로 말을 하면 돈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다는 거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돈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 거냐? 돈은 불에 집어넣으면 안 타지느냐? 돈이 신령한 거고 영원한 거냐? 돈도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붙잡고 이리 저리 돌리시는 건데, 국가에서 ‘올해는 몇 % 성장한다’고 말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홱 잡아 돌리니까 IMF가 왔느냐? 그래, 세상이 거기에 한 번 빠지니까 기독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그 바람에 안 빠지더냐? 그 늪에 한 번 빠지니까 가짜 이혼도 늘어난다. 빚을 안 갚으려고 이러는 건 도둑의 심보다. 하나님이 보시고 있는데.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내가 허황된 마음을 가졌습니다. 내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하고 회개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향해서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는 내가 깨닫지 못해서 신앙의 상태가 이 꼴로 있으니 깨닫고 고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사람이 깨닫지를 못하면 어디든지 휘둘려 버리게 된다. 사람이 깨닫지를 못하면 참 추하다. 그러나 깨닫는 사람은 도덕성이, 생각의 사고방식이, 이해타산 평가성이 고차원이라서 그 인격과 사상이 높은 거다. 사람이 이렇게 되려니 자기를 얼마나 살피고 얼마나 자기를 진리 자체화 인격화 사상화 시켜 나가야 하겠느냐? 이건 없이 하루 세 끼 배부르게 밥만 먹으면 되는 거냐?
하나님께서 세상을 왜 만들었느냐? 세 끼 밥은 왜 먹도록 해 놓았느냐? 다윗의 주식이 뭐냐? 무엇을 자기의 주된 양식을 먹고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자기는 하루 밥 세 끼 잘 먹고 육신이 배고픈 줄을 모르니까 만사태평인 것으로 알고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못 먹어서 영적인 면에서 배고픔을 느껴 봤느냐? 자기가 똑똑한 거냐? 완전자냐? 온전자냐? 그래서 서건 환경의 바람이 불어 닥쳐도 원망을 안 하느냐? 안 넘어지느냐?
말씀의 깨달음이 자기에게 이치적으로 다가오면 이 사람은 ‘저건 무슨 짐승의 모양이구나’ 하고 그 운동 속에서 사상적으로 사람의 모양을 알게 된다. 쉬운 예를 든다면 여자가 손톱을 길러서 남편과 싸울 적마다 남편의 얼굴을 그 손톱으로 할퀸다면 이건 눈으로 보기에는 사람이지만 하는 짓을 보니 뭣과 같으냐? 고양이와 같다. 그 정신의 모양이 고양이라. 성경은 이런 걸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람이 미련하면 뭐 같다고 하느냐? 곰 같다고 한다. 곰이 미련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들 말을 한다.
사상의 색깔이 붉은 건지, 검은 건지, 점백이인지? 말씀을 받아먹지만 저게 영양가가 있는 건지, 독극물을 먹이고 있는 건지? 저게 색깔로 치면 무슨 색깔이냐? 이런 걸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성격도 성질도 성분도, 운동의 방향과 목적도 전부 분별이 돼야 한다.
예수님 앞에서는 이런 것이 다 분별이 되느냐, 안 되느냐? 분별이 된다. 그러니 예수님 속에 들어있는 그것이 부럽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는 말의 의미는 ‘나를 닮아라’ 하는 뜻이 들어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게 있는 그런 것을 안 닮고 그냥 따라만 다니느냐?
화투치는 사람을 늘 따라다니면 뭘 배우기 쉬우냐? 화투치는 걸 배우게 된다. 영어선생을 따라다니면 영어를 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를 따른다면 예수를 닮아야 한다. 속을 닮아야 한다. 속을 닮아야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서 역사를 한다. 속은 안 닮았는데 자기가 성령님을 부르면 성령이 오느냐? 아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다. 내가 성령을 부르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붙잡고 쓰는 거다. 신앙이 좋은 사도바울에게도 성령님께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자기 신앙이 얼마나 좋기에 자기가 부르면 성령이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령을 하느냐?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진 것은 귀신장난이다. 성령이 어떤 일을 하느냐? 악령은 어떤 일을 하느냐?
계:에 보면 거짓 종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한다. 이적 기사를 일으킨다. 이적 기사는 자연법칙을 축소시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의 손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나타나는 것을 이적 기사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이적 기사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그것만 쏙 빼 와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악령이요 귀신장난이다.
시골장터에서 약장수가 차력을 하면서 철근을 손으로 자르고, 머리로 철로의 쇠를 자르고 하는데 이건 이적 기사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런 일을 인간 자기는 못한다. 했다가는 자기 머리가 깨져버린다. 어쨌든 이적 기사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다. 사람을 놀라게 하면 신비롭다고 하면서 어떤 신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게 있는데, 세상만물이 누구의 명령을 듣느냐? 세상만물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들어서 복으로도 쓰고, 재앙으로도 쓴다.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을 보여주심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연만물을 들어서 쓰신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이스라엘에게는 복으로 쓰시고, 애굽에게는 재앙으로 쓰신 거다.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쓰기도 하신다.
그러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다고 했으니 그게 번갯불인데, 그런 번갯불이 거짓 종들의 말을 듣겠느냐?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다는데 뭐냐? 부흥강사가 부흥회를 하면서 ‘불 받아라’ 하면 실질적으로 교회 지붕의 십자가 탑에 번갯불이 ‘화다닥’ 치느냐? ‘불 받아라’ 하면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불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불이냐? 번갯불이냐? 인간의 감정과 이성에 혼돈을 시켜서 흥분을 일으키는 그런 불이다. 이게 어째서 성령의 불이냐? 성령이 죄를 태우면 죄가 탈 때 냄새가 나느냐? 죄가 타는 냄새가 어떤 냄새냐? 죄가 탄다는 건 또 뭐냐? ‘뿌지직’ 하고 타는 거냐?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육신적 오각의 오감성으로 느끼고 알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할까? 안수를 전문적으로 하는 목사도 있다던데 이 사람은 성령을 받았고, 성경을 이치적으로 잘 가르치는 목사는 악령을 받은 거냐? 이것도 성령이냐? 구태여 따진다면 어느 성령의 역사가 오래 가느냐? 영원히 가느냐? 가치판단 평가성이 그렇게 없느냐? 왜 그렇게 어리석으냐?
기독교는 어떤 일을 해도, 어떤 운동을 해도,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의 뿌리를 찾아서 근원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의 목적을 알아서 그 배후에 성령인지, 악령인지 바로 판단 구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거짓 종들의 배후에는 누가 도사리고 있느냐? 악령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모른다. 거짓 종이라고 해서 이마에 ‘거짓’이라고 써놓은 게 아니라 영광스러운 천사 같다고 했으니 겉 표면적으로, 제도적으로, 직위적으로 보면 얼마나 호화찬란한지?
계:에 보면 짐승의 머리가 몇 개라? 뿔이 몇 개라? 뿔이나 머리를 말하는 이게 사람의 성격 성질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 정말 그대로 짐승을 말하는 거고, 도둑놈을 말하는 거냐? 교회 안에 제도적, 조직적, 세상 명예영광, 세권, 교권 이런 걸 말하는 거다. 세상에서 목사가 되어서 교권을 쥐고 명예영광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그대로 하늘나라에 가지고 들어가는 거냐? 아니다. 그것도 세상에 속한 거다. 천국에 속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온전으로 닮은 것밖에 없다. 이게 진짜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아브라함만 가지는 거냐, 아브라함을 들고 우리에게 그 사건을 성경에 기록해서 말해주는 것은 ‘너도 아브라함을 닮아라’ 그 말이냐? ‘너는 평신도니까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지지 못하는 거고 목사만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그 말이냐? 아브라함을 들고 우리들에게 왜 자랑을 하는 거냐? 어린아이가 ‘내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지고 싶다’ 하면 그건 죄고, 목사님이 ‘나도 아브라함처럼 돼야지’ 하면 하나님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라고 하시느냐?
그럼에도 왜 그렇게 영적인 면에 욕심이 없느냐? 무엇에 욕심을 가지고 있느냐? 세상요소에 욕심을 가졌다면 이건 허영심이고, 영웅심이고, 허욕심이다. 이렇게 되면 얼마 안 가면 ‘네가 신앙이 좋다고 했지?’ 하면서 사건이 와서 그 사람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사건을 몰아붙일 때 자기는 만사람 앞에 드러나게 되는 거다. 안 믿는 사람 앞에도 드러나고, 믿는 사람 앞에도 드러나게 된다.
욥에게 하나님의 허락된 사건이 와서 욥의 신앙을 드러냈다. 그러면 오늘날 자기는 욥과 같은 신앙을 가졌느냐? 주머니에 돈 떨어지면 징징 짜고 울지 않느냐? 욥도 그랬느냐? 욥은 아내도 달아나고, 자식들도 다 죽고, 종들도 다 죽고, 집안이 망했어도 하나님을 붙잡고 놓지 않는 면에 충성을 하고 있었다. 이런 욥이 나중에 가서 두 배의 축복을 받았느냐? 나에게는 열 배의 축복을 준다고 하면 욥과 같은 시험을 받을 수 있겠느냐?
29절: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영의 눈이 밝아지면 신앙 면의 적을 바로 알게 된다. 신앙 면의 적을 알아보는 것은 영의 눈이 아니면 안 된다. 육의 눈으로는 못 본다. 진리 이치적으로 완전 무장이 되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입어야만이 영적 면의 적들을 정복할 수 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주를 의뢰하려고 할 때는 주님을 모르면 의뢰가 안 되는 거다.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이 ‘내가 주를 믿나이다’ 한다면 왜 믿는 거냐? ‘네 사정이 어려우니까 그 사정을 들어달라고 네가 나를 의뢰하는구나’ 하는 도둑 같은 심보가 있는 거다. 그러면 다윗도 그런가? 이러고서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들어가서 달릴 수 있는 거냐? 이러면서 적군에 달려 들어갔다가는 잡아먹히는 거다.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담을 뛰어넘는다고 했는데, 담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요 정신을 말한다. 그들이 사상과 정신이 그들의 방패막이요 그들의 보호막이다. 그러면 그들의 보호막은 뭘로 되어 있느냐? 전부는 물질의 성질에서 나온 사상들이다. 이들은 전부가 세상에서 얻어진 거, 땅에서 경험해서 얻어진 것, 육에 속한 것으로 보호를 입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성의 요소와 사상으로 담을 높이 쌓더라도 이런 것들은 엄밀하게 따지면 담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이런 것들로 아무리 높이 담을 쌓아도 하나님께서는 그걸 담으로 보지 않는다. 영의 눈이 있는 자들에게도 그건 담이 아니다. 그럼 뭐냐? 자기의 타락적 주관적 저주받을 똥고집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건 높이가 없는 거다. 이방 불신사상은 높이가 없는 거다.
진리사상에는 높이가 있다. 성도 다윗의 진리사상의 무장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고, 그 정신 사상은 뚫지 못할 담이고 벽이다. 그래서 다윗이 때때로 보면 ‘내가 시온에 거하나이다. 난공불락의 요새에 거하나이다. 높은 곳에 거하나이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신앙사상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높은 것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거다. 이건 일반적인 사상과 정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이런 신앙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가진 것을 기뻐보시고 하나님 당신의 기쁘신 일을 이 다윗을 통해서 나타낸다고 하셨다. 그러면 다윗의 그 삶의 목적이 일반 도덕성적이냐? 다윗의 신앙사상이 일반 도덕적인 신앙사상이냐?
예수님이 가진 게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냐?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한 이치를 바로 깨달으면 모든 이치가 맞아 들어간다. 그러나 한 이치가 비뚤어지면 아무리 성경구절을 꿰어맞춰도, 아무리 무슨 희한한 능력을 나타낸다고 할지라도 이건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도 아니고 귀신들의 장난이다.
오늘날 자기가 예수님을 몇 년이나 믿었느냐? 엄마 뱃속에서부터 예수님을 믿었느냐? 그렇다면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자기가 완전자냐? 그렇다면 예수 믿을 필요도 없고, 성경을 볼 필요도 없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 말씀을 깨닫고 아는 면에 몇 개나 깨닫고 알고 있는지? 우리 모두는 불완전자다. 세상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욕심이 많으면서 성경을 깨닫고자 하는 욕심은 얼마나 있는 것인지?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적들의 사상을 능가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걸 문자 그대로 볼 거냐? 그러면 어떻게 해석이 되느냐? 다윗이 실지로 적들의 담을 뛰어 넘으며 다녔느냐?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란다면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이기려면 예수님의 머리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로 걷듯이 몇 걸음 물 위로 걸어갔다. 부럽지 않느냐?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을 가지려고 애쓰지 않고, 닮으려고 애쓰지 않고 불에 타지고, 썩어지고, 뭉그러지고, 빼앗기고, 도둑맞는 것에 시간을 쓰고, 그것 때문에 예수 바로 못 믿고 신앙도 못 올라간다면 그게 뭐냐?
예수를 왜 믿는 거냐? 목사가 교회를 인도한다면 성도들로 하여금 분별을 시켜줘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을 모르고 목회를 할 수 있는 거냐? 성경을 모르고 집사를 할 수 있느냐? 우리 모두가 이 면에 대해 부끄럽다. 이런 양심이라도 가진다면 겸손 쪽에 속하는 거다.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적 속에 들어가서 적들의 폐부를 찌르고 심령골수를 찌른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적대적인 소원 목적을 가진 자들이 많아서 하나님의 본질에 맞지 않는 이질적이며, 육적이며, 세상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 것을 구하는 자들이 많으니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전부 적으로 보시는 거다. 다윗은 이런 것을 다 쳐부수고 진리본질의 길로만 갔다는 것이다.
다윗은 인도자다. 이스라엘의 인도자이면서 하나님의 사업이 잘 되도록 신경을 쓰는 하나님의 종이다. 이런 다윗이 괜히 적들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놀러다니는 게 아니라 적들을 죽이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정신 사상이 아닌 것은 하나님 앞에 적이니 그 사상을 죽인다는 말이다. 이걸 역사적으로만 보면 맞겠느냐?
성경 구절적으로 보면 다윗의 말 중에는 다윗이 겪지 않았던 일도 자기가 겪은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 많이 있다. 본문에도 다윗이 담을 뛰어 넘어 다녔다고 했는데, 세상에는 안 보이는 담이 많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자기의 주격적 지식으로 삼아서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것도 담이다.
담을 왜 치느냐? 담은 보호다. 보호를 한다 그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방 종교적 지식적인 담으로 자기를 보호하고 있고, 또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사상을 가지고 담을 치고 있다. 그러면 민주주의 세계에 공산주의가 세차게 들어오면 민주주의의 담은 안 넘어지는 거냐? 민주주의 사상이 하나님 사상이냐? 또한 공산주의의 담을 아무리 쳐놔도 민주주의 사상이 세차게 파고 들어가면 그게 안 무너지느냐?
그러면 최고의 담이 뭐냐? 사회주의 사상도 넘어뜨릴 수 있고, 민주주의라고 하는 인본주의 사고방식도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은 진리사상밖에 없다. 우리 주님의 것밖에 없다. 주님의 최고의 것이 사람의 심령골수를 쪼개서 해부를 해내는 건데, 이 신앙사상을 누가 이길 수 있겠느냐? 천국의 사상 성질 성격은 죄를 정복하고, 마귀를 이기고, 모든 유혹을 다 이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이걸 가져야 한다. 이걸 가져야 신앙인이다.
기독교 안에는 교리적인 담도 있고 기독교 교파적인 담도 있다. ‘나는 감리교인이라서 장로교회에는 안 가고, 나는 순복음교인이라서 장로교회에는 안 가고, 나는 어디 출신이기 때문에 어디로는 안 간다’ 하는 여기에 무슨 사상이 있는 줄로 아느냐? 없다. 어느 교단 교파이던 가질 바에야 오직 주님의 것으로 주고받으면 그 이상 없는 것인데 자기들의 담을 치고 그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않아 있으면서 제자들끼리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가자’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보시니 그들의 신앙사상이 예수님의 신앙사상과 이질이라면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듣고 뭐라고 하시겠느냐? 가만 듣고서 “야 이놈들아, 내가 어떻게 너희들이 말하는 ‘우리’ 속에 들어 있느냐?” 하실 거다. 신앙사상이 그런 거다. 그래서 성경으로 통해서 보면 ‘우리’가 있고, ‘너희’가 있고, ‘저희’가 있고, ‘그들’이 있다. 신앙사상의 라인을 말하는 거다.
세상적으로 나가는 교인이 진리의 종이 목회하는 교회에 다니면서 이 목사를 보고 ‘우리 목사님’이라고 했다면 이 목사가 그걸 듣고 있다가 ‘내가 어째서 네 목사냐?’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물론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에 나오니까 그 교회의 교인이겠지만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질이 다르기 때문에 질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말을 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질이 같지 않은 이질이라면 ‘우리’가 아니다. 이런 사람은 같은 교회에 다니더라도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항상 예수님과 교인들과 대립을 하고 물고 뜯는다. 이런 수법을 누가 쓰느냐? 마귀가 쓰는 거다. 마귀는 사람을 물고 흔드는 것을 좋아한다. 가룟유다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바로 깨닫게 하려고 하신다.
신앙 면에서 육적인 사상의 담이 있고, 영적인 사상적인 면에서의 담이 있는 건데 이제 이것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 어느 것이 무너질 담이고, 어느 것이 영원히 가는 담이냐? 어느 것이 무너질 사상이고, 어느 것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사상이냐? 이제 판단할 수 있겠느냐? 신앙양심에서 이 판단을 바로 내렸다면 자기가 이 판단을 자기가 것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옳은 진리이치를 갖는 거고, 이게 신앙이고, 이게 한 이치를 깨달은 거다.
세상에는 이런 교훈은 없다. 세상 인본주의 교회에도 이런 교훈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교회에는 이런 것이 다 있다. 진리가 아니면 ‘세상에서 축복 축복’ 하게 된다. 이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얼마나 오래 가지고 있겠느냐? 이 축복은 도둑에게 안 빼앗기느냐?
자기가 잘못된 담 속에 갇혀있으면 빨리 탈출을 하라. 높이뛰기로 탈출을 하든지, 땅속으로 두더지처럼 탈출을 하든지 탈출을 하라. 어떤 육적인 신앙사상, 이적적인 신앙사상, 세상적인 신앙사상에 자기가 갇힌 줄로 안다면 이제는 탈출을 하라. 탈출할 힘이 없으면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라. 이것도 구원이다. 그리고 탈출을 하면 이것도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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