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서로서로 화해하며 살아요 (창33:1-20)
본문
이젠 서로서로 화해하며 살아요/창세기33;1-20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를 살면서 가장 많이 가는 곳 중 하나인 공중화장실을 갔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눈을 들어 보니 앞에 짤막한 글귀가 조그마한 메모지에 적혀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오늘 기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더도 덜도 아닌 그 한 마디에 피식 웃으면서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그 한 줄의 글귀가 계속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왠지 정말로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 날은 매우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다시 그 글귀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짜증 나지도 않았습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자신의 조그만 집이 자신이 쉴 수 있는 평화로운 장소처럼 포근한 느낌이었습니다.
약간 후덥지근한 날씨가 왠지 오늘따라 따뜻한 온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두운 길에 빛을 밝혀주는 낡은 가로등이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위에 떠 있는 달이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맞아주는 것 같은 풍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얼굴에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새겨졌습니다.
내일도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단 한 줄의 글귀였는데 좋은 일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당신에게 오늘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당신에게 오늘 기쁜 일이 생길 겁니다.”
“당신에게 오늘 행복한 일이 생길 겁니다.”
이미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멘.
P4.
야곱은 지난밤에 모든 가족들과 무리들과 가축들에게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는 자기 혼자서라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턱에서 서성거리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싸움을 걸어온다.
야곱은 에서형님이 400명의 장정들과 온다고 하더니 자객을 보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줄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자와 죽기 살기로 싸운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크게 다치면서 참패를 당하게 된다.
싸움에서 진 야곱은 자객이 자신을 죽일 줄로 알았는데,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 않고 빨리 떠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형님이 보낸 자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임을 깨닫는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애원하면서 축복을 받게 된다.
새벽녘이 밝아오면서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축복한 후에 떠나간다.
이제 날이 환하게 밝아오면서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서 지난 밤에 먼저 강을 건너간 가족들과 합류하게 된다.
이제 야곱은 에서형님을 어떻게 뵐 것인가?
야곱은 어떤 모습으로 에서를 만나서 그동안 쌓인 무거운 짐 덩어리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400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찾아오는 에서형님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D4.
① 맨 앞에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서 먼저 건너간 가족들과 합류하게 된다.
야곱은 빌하와 실바와 그 아들들을 맨 앞에 세우고, 그 다음에 레아와 자녀들을 세우고, 그 다음에 라헬과 요셉을 순서로 세운다.
그런 다음에 야곱은 모든 가족들과 무리들 맨 앞에 서서 당당하게 에서형님을 만나러 가게 된다.
야곱은 어제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죽기 살기로 싸우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맨 뒤에 남아 있었다.
야곱은 다른 가족들이 다 에서의 손에 맞아 죽더라도 자기 자신만은 살고 싶었다.
그러나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은 이후에는 가족들과 무리들 맨 앞에 서서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 어제와 은혜를 받은 오늘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져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후에는 가족들과 무리들 맨 앞에서 앞장서서 나가는 것이다.
설령 에서형님의 손에 맞아 죽더라도 자신이 먼저 맞아 죽겠다는 일념으로 맨 앞에 서서 당당하게 가족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가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 은혜받은 사람은 맨 앞에 앞장서서 나가는 사람이다.
어떤 위험이 몰아친다 해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맨 앞에서 나아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요 은혜받은 사람이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서 주눅 들어서 옴짝달싹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입은 다윗은 당당하게 돌맹이 5개와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서 골리앗과 맞서서 싸워서 이긴다.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어떤 일이든 맨 앞에 서서 당당하게 앞장서서 나아가는 사람이다.
설령 자신이 큰 위험을 입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자신의 생명에 큰 위기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맨 앞에 서서 당당하게 무리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불신의 사람, 의심의 사람은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다.
불신의 사람, 의심의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떤 상황이 전개된다 해도, 어떠한 위기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은 신앙인인가?
그렇다면 모든 염려와 근심 걱정과 두려움과 무서움을 성령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겨드리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주저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미루지 않고 믿음으로 믿음의 자리,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면 우리들이 믿음의 사람인가? 믿는 척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은 코로나 바이러스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다.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은 순교의 길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다.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은 핍박과 박해의 길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다.
도리어 이런 것들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 확신하고 더욱 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고난이 없는 구원, 고난이 없는 은혜, 고난이 없는 축복, 고난이 없는 면류관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고난의 시간이라면, 핍박의 시간이라면, 순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신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② 서로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
야곱이 맨 앞에 서서 가는데 에서형님이 400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달려온다.
야곱은 에서형님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어제만 같아도 몸서리쳐질텐데 이젠 당당하게 형님을 맞이한다.
야곱은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한다.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중동지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최고의 예의를 갖추고 인사하는 장면이다.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는 것은 자신이 갖출 수 있는 최대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버선발로 나가서 두 손을 붙잡고 엎드리면서 조아리고 인사하는 모습이다.
에서는 달려와서 야곱을 끌어안는다.
형제는 20년 만에 만나서 서로 끌어안고 목놓아 운다.
두 사람은 20년 만에 만나서 서로 얼싸안고 울면서 그동안 쌓였던 모든 원한들을 풀어놓는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얼싸안고 목놓아 우는 것만으로도 그 동안 쌓였던 모든 원한들이 눈녹듯이 풀어지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하면서 그동안 쌓인 한을 풀어버리게 된다.
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당장이라도 동생 야곱을 만나면 죽여버리겠다고 단단히 벼르던 사람이다.
그래서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400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야곱에게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에서의 마음이 어떻게 이렇게 풀어질 수 있었을까?
지난밤에 야곱과 죽기 살기로 싸운 하나님의 사자가 에서의 마음에 찾아가서 모든 원한을 풀어버리도록 역사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에 찾아가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감동을 주시고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넣어주셔서 에서의 완악한 마음이 눈녹듯이 사르르 무너지고 이젠 야곱과 화해의 포옹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화해할 수 있도록 지난 밤에 사자들을 보내서 야곱에게는 야곱의 엣 성품을 죽이기 위해서 싸움을 걸어오시고, 에서에게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작업을 해 주신다.
평생 서로 앙숙이었던 두 사람의 마음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의 마음을 서로 눈녹듯이 화해시켜 주신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서로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눈녹듯이 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우파, 좌파로 나누어져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는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도록 풀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서로 우파니 좌파니 하면서 갈라져서 사회문화를 비롯하여 정치권, 문화 예술계, 언론계, 노동계를 어루만져주셔서 한마음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기를 소망한다.
지난 70년 동안 남북한이 분단하여 아직까지도 전쟁의 위기 속에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북한의 김씨일가들을 무너뜨리고 자유 평화 통일을 이루어주시길 소망한다.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인해서 무너져 버린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소망한다.
③ 여전히 온전한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야곱을 안타까이 바라만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야곱은 에서형님께 드리기로 준비한 모든 예물들을 드린다.
에서는 극구 사양했지만, 야곱이 강권하면서 예물을 드린다.
그러자 에서는 야곱이 드리는 예물을 받아들인다.
야곱은 에서가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에서는 아버지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호위해 주겠노라고 하면서 호의를 베푼다.
그런데 야곱은 여전히 에서형님이 두렵고 무섭기만 하다.
여전히 가까이하기에는 먼 당신과 같기만 하다.
여전히 부담스럽고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야곱은 형님의 호의도 거절하고 숙곳으로 이동하여 정착하게 된다.
숙곳으로 이동하여 장막을 치고, 가축 떼들을 위하여 우릿간도 만든다.
창세기 31:13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야곱의 출생지는 가나안 땅에 아버지가 살고 있는 브엘세바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아버지의 집,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아버지의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숙곳이라는 곳에 정착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숙곳으로 돌아가서 숙곳에서 정착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야곱이 숙곳이 아니라 브엘세바로 돌아가야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인데, 브엘세바로 돌아가지 않고 엉뚱한 숙곳에 정착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속타 들어가실까?
야곱이 숙곳에 정착하여 사는 동안에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성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로 인하여 아들들이 살인죄를 저지르는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다.
야곱이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하였을 때, 벧엘로 돌아갔더라면 디나가 성폭행당하는 사건도, 아들들이 살인사건, 노략질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숙곳에 정착하려고 하면서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숙곳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아서 제사도 드린다.
야곱은 거기에서 “엘 엘로헤 이스라엘(El Elohe Israel)”이라고 하면서 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무리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고 희생제사를 드린다 해도 야곱의 일행들이 숙곳에 정착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여전히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계시는 것이다.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만 살 것 같은데, 여전히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정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고 저려온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정이 너무나 저리고 아프게 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인으로 사는 것처럼 예배도 잘 드리고, 교회 봉사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면서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늘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지 않을 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고 저려오신다.
성경에서는 신앙생활의 진수는 000하는 척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며 사는가 하는 것을 더 보고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살라고 거듭거듭 수없이 말씀하신다.
신명기 28:1에서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 1:3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 22:18-19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빼거나 더하지 말고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인간의 계산된 방법이나 생각이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말씀에서 감동 주시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L4 & B4.
오늘의 말씀은 에서와 야곱이 어쩌면 90평생 살면서 서로 풀리지 않았던 원한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풀어지고 화해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원한 맺힌 인간관계를 풀라고 하실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인 평생 원한이 있던지, 가까운 때에 생긴 원한이든 아직까지도 풀어내지 못한 인간관계가 있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풀어지지 않는 인간관계가 있는가?
그 사람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가슴에 커다란 피멍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만 생각하면 먹던 밥도 목에 걸리고 체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이 누가 되었든, 어떤 사람이 되었든, 어떤 관계가 되었든 그 사람과 생긴 원한을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과 보혈로 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원한이든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으로 풀어지지 않을 원한은 없다.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끊어진 관계를 풀어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누구와 화해시키고 싶어하실까?
우리 신앙인들은 누구에게 원한 맺힌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 대상이 누가 되었건 하나님은 모든 원한을 풀고 하늘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Incarnation)하셔서 내려오셔야만 되었는가를 깊게 묵상해봐야 한다.
왜 우리 예수님께서 인간세계에서 가장 극악한 사형제도인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한 방울의 피도, 물도 남기지 않으시고 다 쏟아내셨는가를 깊이 묵상해 봐야 한다.
왜 우리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죄악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는가를 깊이 묵상해봐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철철 흘리시는 예수님과 우리들 자신과는 무슨 관계인가를 깊이 묵상해봐야 한다.
도대체 예수님과 나는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과 나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를 깊이 묵상해봐야 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생명과 구원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해봐야 한다.
입으로만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맘으로, 온 영으로 예수님께서 못 박힌 손바닥을 꽉 잡고, 예수님의 피부를 만지며, 예수님께서 감동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며, 예수님께서 꼭 안아주고 계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고백한다.
고린도후서 5:17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로 화해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화해하지 못할 대상은 아무도 없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신앙인들은 더 이상 미움의 대상도, 원망의 대상도, 두려움의 대상도, 무서움의 대상도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모든 이들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수용하고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화해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정결한 백성으로, 온전한 백성으로 세워지는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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