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높디높은 장벽일지라도 (창32:13-32)
본문
아무리 높디높은 장벽일지라도 /창세기32;13-32
TS :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넘지 못할 것같은 장벽들도 넘어가는 것이다.
훌륭한 임금님
어느 날 임금님이 감옥을 방문하여 죄수에게 물었습니다.
“왜 잡혀 왔느냐?”
죄수는 “저는 죄가 없는데 잘못된 재판으로 들어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 죄수에게도 물었습니다.
“왜 잡혀 왔느냐?”
“저는 죄가 없는데 잘못된 재판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99명에게 물었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00번째 죄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잡혀 왔느냐?”
“저는 약탈과 살인을 많이 해서 잡혀 왔습니다.”
대답을 듣고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나이를 석방해라. 다른 죄수들이 물들지 모르겠구나.”
아주 간혹 특이하게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의 누명을 써서 감옥살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마땅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 죄의 대가로 감옥살이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고백할 때 용서받을 길이 열리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까?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때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P4
밧단 아람에서 20년 동안 나그네처럼 객지 생활하던 야곱이 아버지 집,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20년 동안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그 장벽 때문에 잠을 이를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두려움과 불안과 무서움으로 밀려오기 시작한다.
야곱이 넘어가야 할 커다란 장벽은 바로 에서라는 형님이다.
야곱은 20년 전에 급하게 아버지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형님의 노여움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동생을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형님의 분노가 야곱의 눈앞에 아른거려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만든다.
아버지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반드시 형님이라는 장벽을 넘어가야만 하는 현실이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야곱은 어떻게 에서 형님을 대면해야 할까?
형님이 진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젠 처자식들도 거느리고 있고, 많은 종들과 가축들도 거느리고 있는데, 형님이 나와 내 식솔들을 해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차라리 내 혼자였으면 나 혼자만 형님의 손에 맞아 죽든지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 끝나겠지만, 이젠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지 않은가?
이젠 오직 나 하나만을 바라보며 친정을 떠나고, 외가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는 식솔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긋지긋 아프고 저려온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어떻게 형님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형님을 피해갈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D4.
①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터벅터벅 한 걸음 한 걸음 가나안 땅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야곱 앞에 커다란 무언가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야곱 앞에 하나님의 천군 천사들을 보내주신다.
얼마나 많은 천군 천사들이 야곱 앞에 나타나서 보여주시는지, 야곱은 그들을 향하여 “이는 하나님의 군대(This is the camp of God!)”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난 땅을 “마하나임(Mahanaim)”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밧단 아람에서 20년 동안 나그네 삶을 살고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이젠 아버지 집으로, 고향으로,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고, 이제는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보호막이 되어 주시기 위하여 친히 하나님의 천군 천사들을 보내주시면서 야곱일행들의 호위무사가 되어 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미 야곱의 마음에 너무나 무거운 짐 덩어리를 안고 있음을 알고 계신다.
에서라는 큰 짐 덩어리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무거운 짐 덩어리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에서라는 장벽을 넘어가라고 힘과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면서 천군 천사들이 “반드시 너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네가 무서워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높은 장벽을 능히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라고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자녀들의 안전을 위하여 미리미리 찾아오셔서 막아주시고 담대함을 주시면서 지켜주시려고 건져주신다.
단지 우리가 믿음의 눈이 어두침침하여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로 우리들을 붙들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천군 천사들을 보지 못할 뿐이다.
설령 우리의 믿음의 눈이 어두침침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히 하나님은 천군 천사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지켜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건져주시고 막아주시기 위하여 역사해 주신다.
② 인간적인 방법도 써보게 놔두시는 하나님.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전을 지켜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친히 천군 천사를 보내주시면서 야곱의 눈을 환하게 밝혀서 수많은 천군 천사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아무런 근심 걱정할 필요도 없이 당당하게 형 에서에게로 나아가면 될 것 같은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
야곱은 고향으로 사람을 먼저 보낸다.
고향에는 아버지가 아직은 살아계시는지,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에서 형님네도 잘 지내고 있는지...
그런데 에서형님에게 보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4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야곱에게로 오고 있다는 하늘이 꽝 꽝 하고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을 전해준다.
형님 혼자 와도 감당하기가 너무나 힘들고 버거운데, 400명의 군사들을 대동하여 오고 있다는 소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이다.
‘형님이 4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올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으면 차라리 사람을 먼저 보내서 알려주지나 말걸.’ 하면서 후회하기도 한다.
형님의 소식을 전해 들은 야곱은 너무나 크게 낙심이 되어 주저앉고 싶어진다.
크게 낙심이 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야곱은 자신의 동행자들을 두 떼로 나눈다.
형님이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한 떼를 치면 다른 떼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두 떼로 나누는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다.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하면서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한다.
야곱은 기도는 기도고, 자신도 형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야곱은 형님에게 보낼 예물로 암염소 200, 숫염소 20, 암양 200, 숫양 20, 젓 나는 어미 낙타 30과 새끼, 암소 40, 황소 10, 암나귀 20와 나귀 새끼 10을 세 때로 나누어서 종들과 부인들과 아들들을 보내기로 한다.
야곱은 특별히 종들에게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라고 말하라고 한다.
야곱은 이처럼 형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소위 뇌물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뇌물을 받으면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야곱의 생각에는 형님이 자기가 보낸 예물들을 몇 차례 받게 되면 형님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풀어지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뇌물 공여 작전을 세우는 것이다.
이 방법은 믿음의 사람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마하나임의 천군 천사를 보여주시면서 확신을 심어주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다 하는 심정으로 당당하게 에서형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보여주어야 할 믿음의 자세요 태도이다.
그런데도 믿음이 약한 야곱은 아무리 하나님의 천군 천사들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하셨어도 에서형님이 4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형님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나. 형님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라면 내 가진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린다 해도 지금은 형님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예물, 아니 뇌물을 공여하는 방법이 가장 좋겠다고 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도 막지 않으시고 그대로 놔두신다.
인간적인 방법도 써 봐야 인간적인 방법이 부질없는 일이었구나 라고 처절하게 느끼고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미 야곱이 사용하려고 하는 인간적인 방법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신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야곱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놔두신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두고두고 아쉬워하면서 “그 때 그 일을 해봤으면 어땠을까?” 후회하곤 하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무언가에 아련한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때 그렇게 했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더 해로웠을텐데도 못내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후회하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야곱이 사용하고 싶어하는 일을 통해서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시면서도 하나님은 야곱이 그 일을 해보도록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신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제발 안 했으면 좋겠는데, 굳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해보겠다고 하면 그대로 그 일을 해보도록 놔두시고 지켜보시기만 하신다.
그러면서 “아...정말 안 되는구나.”라고 자기 스스로 깨닫고 포기하도록 지켜만 보신다.
인간이 사용하는 방법은 뻔하게 보이는 방법일 뿐이다.
전혀 새로운 방법도 아니고 구태의연한 방법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해 보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처절하게 자신이 무능함, 어리석음, 부족함을 절감하는 것이다.
③ 싸움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야곱은 세 무리로 나눈 예물들을 종들의 손에 맡겨서 형님에게로 보낸 다음에 가족들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형님이 내가 보낸 예물을 받고 마음이 누그러질까? 그래도 형님의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점점 밤은 깊어만 가고, 시간은 흘러가는데 야곱으로서는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야곱은 아내들과 자식들까지도 모두 강을 건너가도록 한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까지도 사지(死地)로 보내놓고 자기 혼자만이라도 살아남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얍복강 나루턱을 서성거리고 있다.
이럴 때에 어떤 건장한 사람이 나타나서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에 야곱은 순간적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형님이 4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온다고 하더니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야곱은 자객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 목숨이 살아남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사력을 다하여 자객과 싸운다.
자신이 자객과 싸워 이기면 자신은 사는 것이고, 자객을 이기지 못하면 자신은 죽는 것이다.
야곱은 그야말로 있는 힘을 다하여, 죽기 살기로 자객을 죽이려고 싸운다.
이 때 야곱은 건장한 청년의 때가 아니다.
야곱은 90대 후반의 노인으로 가는 길목이다. 그러니 기력이 예전 같지가 않다.
그런데도 야곱은 사력을 다하고 죽을힘을 다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자객을 죽이려고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를 야곱의 못난 인격, 성격, 성품을 죽이려고 싸움을 걸어오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간적인 기질을 죽이기 위해서 싸움을 걸어오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불신앙을 죽이기 위해서 싸움을 걸어오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옛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기 위항 싸움을 걸어오신다.
하나님은 개들에게 던져주어도 먹지 않을 우리 신앙인들의 못난 개같은 성격, 개성과 지랄같은 성격, 지성을 죽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싸움을 걸어오신다.
야곱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이 뭐 그리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자신은 대단한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뻐기고 우쭐대면서 어깨에 힘을 팍팍 주면서 주름잡으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인들의 못난 인격, 성격, 성품을 온유한 하나님의 성품과 성격과 인품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온전하고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가시려고 일부러 싸움을 걸어오신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의 옛 성품을 완전히 꺾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세워주시려고 싸움을 걸어오신다.
④ 이겼는데도 졌다고 해주시는 하나님
두 사람도 사력을 다하여 싸웠기 때문에 좀처럼 승부가 갈리지 않는다.
두 사람 다 서로 죽이려고 힘껏 싸운다.
두 사람 다 서로 죽지 않으려고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서 싸운다.
자객은 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옴을 직감하면서 마지막 카운터를 날린다.
자객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환도뼈를 힘껏 내려치신다.
그러자 야곱은 단번에 꺼꾸러지고 만다. 야곱이 참패를 당하고 만다.
야곱이 참패를 당했으면 자객은 자기를 죽여야 하는데, 자객은 야곱을 죽이려고 하지 않고 서둘러서 떠나려고 한다.
그때서야 야곱의 눈이 확 열리게 된다.
야곱이 참패를 당하고서야 비로소 영안이 환하게 열리면서 자기와 싸운 그가 에서형님이 보낸 자객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천군 천사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사자는 급히 떠나려고 한다.
야곱은 이제 떠나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자를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이에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축복하시기 전에는 절대로 보내드릴 수 없다고 애원한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근본에 대하여 질문한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고 하면서 야곱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분명히 야곱의 허벅지 관절, 환도뼈가 어긋나면서 야곱이 참패를 당했는데도, 오히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이겼다.”라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야곱은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라고 하면서 매달린다.
하나님의 사자는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라고 하면서 축복해 주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싸웠던 곳을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고 하면서 “브니엘(Peniel)”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다치게 하고 한방에 넘어뜨리면서 이겼기 때문에 ”내가 이겼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싸움에서 처절하게 패배를 당한 야곱에게 ”야곱아, 네가 이겼구나.“라고 하면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신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이삭이 붙여준 이름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붙여준 이름이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개명시켜 주시면서 ”이제는 내가 너의 주인이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끝까지 않고 이제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도록 하신다.
아브라함의 주인이신 하나님, 이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진정으로 야곱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이 되어주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는 더이상 에서라는 장벽이 두려운 장벽이 아니다.
에서라는 장벽이 도저히 못 넘을 정도로 크고도 높은 장벽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밑에 있는 아주 작으마한 동산, 아주 초라한 언덕에 불과하다고 선포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당당하게 에서형님과 대면하여 돌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진정으로 누가 우리의 팬이 되어 주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한상원의 하나님이시다.
한상원의 주인은 죄악된 세상, 마귀 사탄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세상이 아니라, 이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로운 주인이 되었노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이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린다 해도, 아무리 태풍과 장마비로 폭우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고 온 재산이 덧없이 떠내려가고 무너진다 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권능으로 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다고 선포해 주신다.
그러기에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요, 불안의 대상이 아니요, 공포의 대상이 아니요, 무서움의 대상이 아니요, 주저앉도록 하는 포기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도리어 그들을 우리의 밥이라고 선포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의 밥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상급으로 차곡차곡 쌓여가도록 은혜와 축복으로 역사해 주실 것이라고 선포해 주신다.
L4 & B4.
사람들마다 각각 종류와 상황들은 다르지만, 한두 가지 정도 두려움의 대상, 불안의 대상, 무서움의 대상, 온갖 근심 걱정하게 만드는 대상들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두려움과 무서움과 불안의 요인이 되는 것들로 꽉 차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상대방이 너무나 높은 장벽이라서 그 상대방을 넘어가기가 어렵고 버거운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잘나면 잘 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 상대방을 넘어가야만 자신이 정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데, 그 상대가 너무 높고 커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자괴감에 빠지고 주눅 들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다.
높디높은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격하게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흔히 다윗과 골리앗 같다고 말한다.
어린 다윗뿐만 아니라 사울 왕을 비롯하여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리앗은 넘어갈 수 없는 커다란 장벽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리앗 앞에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아버렸지만, 다윗은 비록 어렸지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 가지고 당당하게 골리앗과 맞서 싸워서 이긴다.
커다란 골리앗은 보기에 덩치가 너무 크고 힘이 셀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허점이 많은 상대였다.
키가 크기 때문에 돌맹이를 던져도 맞을 데가 많았고, 덩치가 컸기 때문에 느림보였다.
그러나 다윗은 작고 어렸기 때문에 빠르게 돌맹이를 던지고 도망칠 수 있는 센스가 있다.
그런가 하면 골리앗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다곤 신을 신봉하는 어리석은 자였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능력주시고 돌맹이를 정확하게 커다란 골리앗의 이마에 맞출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분이어서 누가 봐도 다윗이 지고 골리앗이 이길 것 같은 싸움이었지만, 다윗이 당당하게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한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저앉도록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면서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길게 쉬고 있는가?
돈, 권력, 권세, 명예, 수치심, 학벌, 군대계급, 직장 상사와 같은 것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맥없이 주저앉도록 하는 것일까?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각종 질병들, 잘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맥없이 주저앉도록 대적자가 되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대적들이 우리들을 넘어뜨리고 주저앉도록 어마어마한 세력으로 등장해 온다 해도 우리의 영원한 팬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은혜와 축복으로 역사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에서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당당하게 세상과 맞짱 떠서 싸워 이기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
믿음의 사람 앞에는 넘어가지 못할 장벽은 없다.
믿음의 사람 앞에는 믿음의 사람을 꼼짝 달삭하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버리는 장벽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믿음의 사람 앞에서는 어떠한 장벽들도, 아무리 높고 크고 위대하고 철옹성같은 장벽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하나님 앞에서 조족지혈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넘어가지 못할 장벽이란 있을 수 없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어떤 장벽이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의 그 어떠한 것들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 꿈과 비전의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펜이 주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면 된다. 아멘.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