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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기 전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무엇 하셨는가? (벧전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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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기 전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무엇 하셨는가? (벧전 3:18-19)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약 37시간에서 38여 시간은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렇다고 인간의 상상으로 추측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연옥을 탄생시켰다.


 


​1. 가톨릭에서는 연옥을 만들어 냈다.


 


가톨릭에서는 지옥에 내려가서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한다. 이 이론이 비약하여 연옥을 만들어 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역을 말한다.


연옥(煉獄)은 영혼을 연단하는 감옥이란 말이다. 라틴어로 "Purgatorium"이며, “깨끗하게 하다”, “정화하다”는 뜻이다. 즉 연옥이란 “정화의 장소”를 말한다.


가톨릭교회가 공적으로 연옥을 교리로 확정하기 이전 초대교회 교부들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부들의 진술들은 연옥을 말하기보다는 죽음 후에 인간의 영혼이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연옥은 초대교회 박해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천상탄일(天上誕日 Diesnatalis)라는 전통을 가진 축일(祝日) 천상 탄일에 기원을 가진다. 천상 탄일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인데 그 죽은 영혼은 모든 죽은 영혼이 아니라 일부 즉은 영혼들이다.


 


원래의 기독교 내세관을 천국과 지옥 두 개념이었다.


이 이원적 영적 세계관에서 죄를 범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본성을 가진 인간임을 인식할 때 세상을 떠나면서 죄 없이 온전한 상태에서 떠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옥에 이르기 전에 어떤 곳을 생각한 나머지 죽은 자들의 평안을 바라는 기원으로 죽은 자의 묘비에 안식(安息-Retrigeenium)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이 안식의 개념이 2세기 후반에 카르타고 출신인 호교 교부 터틀리아누스(Teatulianus)가 그의 작품인 [페르페추아와 펠리치타스의 수난기]를 통해서 처음 안식이란 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말시온의 논박을 통해 누가복음 16:22-23에 부자와 나사로가 머무는 음부와 낙원을 죽은 자들이 심판의 부활에 이르기 전에 심판을 기다리는 장소로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마태복음 5:26을 해석하면서 영혼이 부활하기 위하여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한 푼도 남김없이 치러야 할 교도소에 대하여 말한다.


 


이 안식의 개념을 정화(Purgatorium 160-240)로 발전시킨 사람이 3세기 신학자인 오리겐(Origenes 184-254)이다. 그는 말하기를 “ 죽은 영혼이 불로 정화된 후에 천국에 받아 드려진다” 고 주장했다.


 


오리게네스(Origenes)는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여호와 신이 죄 된 인간을 위하여 설치한 "채무 구류소"(Schuldgefangnis)와 "지혜로운 불"에 대하여 말했다. 이 불을 통하여 죄로부터 깨끗해지는 정화의 과정이 일어난다. 이 과정은 인간의 죄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죄에서 인간을 깨끗이 씻고 부활의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여호와 신의 자비로운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정화는 정화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정화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540-604)에 의하여 공식 주장되었다. 그레고리는 인간 안에 있는 여호와 신의 형상이 회복되기 위하여 정화의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하다고 헸다.


이 과정을 그레고리는 정화하는 불로써 묘사한다. 이 정화의 과정이 죽음 이전까지 실현되지 않을 때, 그것은 부활 후에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이 끝난 후, 인간은 여호와 신의 삶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 상대적 정화가 장소적 장화로 탈바꿈한 것은 12세기에 이르러 서였다. 연옥 교리가 A. D. 593년에 그레고리 1세에 의해 소개되고 A. D. 1170년에 교황 파스칼 2세 때에 프랑스 리용 교회 총회에서 이정화의 장소가 연옥으로 선포되고 AD 1439년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 때에 피렌체 공의회에서 재확인 되었다. 그 후 많은 신학 논쟁을 거듭해 오면서 지금까지 베일에 가리 운채 불에 타는 정화되는 곳 빈 지옥인 연옥이 존재하게 되었다.


 


연옥교리가 진리라면 초대교회에서 믿었을 것이고 그리고 1100년에 이르러서야 교리화가 된다는 것을 불합리한 것이다. 연옥은 어떤 의도에 의하여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반 지옥인 연옥에서 현재 정화되고 있는 영혼이 정회되는 기한은 심판 받을 때 까지라고 하므로 죽지 않은 영혼이고 보면 그 기한이 무한정 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기간 동안에 천국으로 이르게 하는 방편이 있는데 이 세상에 인간의 대리 미사와 대리봉사와 대리 헌금 등이라 한다.


 


2. 연옥은 성경에 있는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연옥을 교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한 것이다.


 


1)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인용했다.


[마 5:24-26]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감옥은 지상 감옥을 말한 것이지 연옥을 만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자가 세상에 사는 동안 형제와 원한관계를 가지고 살면 형제에게 고발을 당하여 관원에게 넘겨주게 되고 감옥에 넘겨지게 되면 가옥 생활을 면하지 못한다는 말이며 또한 이 죄를 해결하지 않고 죽게 되면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말하는 감옥은 지상 감옥을 말하는 것이며 영적으로는 죄를 지니고 죽으면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지 연옥으로 간다는 말이 아니다.


 


2)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불로 나타내고”를 인용했다.



[고전 3:10-15]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위의 말씀은 성도의 신앙생활 자체를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예수님을 건축자의 머릿돌이라 했고 신앙생활을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막 12:10-11]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마 7:24-25]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위의 고린도 전서 3장 13절에 “그날에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이 말씀은 불의 정화라고 한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하고 어떠한 시련에도 변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당시에 교회의 백해가 불같이 혹독함 같이 뜨거운 불과 같이 가혹한 때이기에 그 불같은 시련이 신앙의 진정성을 가리는 것임을 비유함으로 어떠한 시련에서도 불변의 신앙을 말한 것이다.


 


신앙인이 가진 믿음이 고난 때문에 변질 되면 참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공적을 나타내는 불은 가혹한 시험을 말한 것이지 연옥의 반 지옥을 말한 것이 아니다. 신앙을 건축 가옥으로 비유하고 그 가옥이 불에 타지 않는 집처럼 시련에 변하지 않는 신앙을 말한 것이다.


 


3)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를 인용했다.


(시 16:8-11)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 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했다.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는 말을 이용하였는데 음부를 지옥으로 해석하고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란 이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은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 가셨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지옥에 내려가신 것은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내버려두지 아니 하시고 복음을 전하여 살리시기 위함이라고 억지로 해석한다.


 


그러나 위 말씀은 다윗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항상 모시고 살기에 자신의 생명을 죽은 상태에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살릴 것을 믿은 신앙 고백이다. 이 말씀은 다윗의 신앙 고백이며 다윗을 통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언이다


또한 위의 말씀의 음부라는 말은 스올(לוֹאשׁ)이란 말인데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을 말한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인간처럼 죽은 상태로 무덤에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4) “땅 아래 곳으로 내려갔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를 인용했다.


(엡 4:9-10) 올라 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려 가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심이라. 했다.


위의 말씀에 “땅 아래”란 말을 지옥으로 해석했다. 땅 아래라는 말은 지옥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도 문맥의 전 후를 보면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는 말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강조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을 표현한 말씀이다.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땅에 오신 예수님을 대조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땅 아래”란 말을 지옥으로 말한다면 하늘은 천국으로 이해하여야 하고 “하늘 위”란 말은 천국 위에 또 천국이 있다고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5) “부자가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를 인용했다.


[녹 16:22-24]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위의 말씀은 나사로는 낙원에 부자는 음부에 갔다는 말로 인간이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이 아닌 중간 장소가 있다고 이해하였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이 머물고 있는 낙원에 부자가 머물고 있는 음부가 천국과 지옥이 아닌 각각 중간 장소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천국과 낙원을 말씀하실 때 대중을 대상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하늘에 속한 나라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βασιλειατον ουρανων) 하나님께 속한 나라 바실레이아 투 테우(βασιλειατο θεου)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구원을 말씀하실 때에는 낙원 파라데이소스(παρδεισως)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와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강도에게와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 이긴 자에게 생명과를 말씀하실 때에 세 번 하셨다.


 


위의 말한 낙원과 음부는 중간 장소가 아니라 같은 장소를 말한다. 즉 대한민국도 한국이고 서울도 한국이다. 그래서 낙원은 하나님 나라 영역 안에 믿는 성도가 머물고 있는 상대적 장소를 말한 것이고 음부는 지옥의 영역 안에 믿지 않는 자들이 머물고 있는 상대적 장소를 말한 것이다.


 


만약 연옥이 있었다면 주님은 확실하게 연옥에 이었다고 하실 것이고 제자들도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나 베드로 사도나 예수님이 연옥이라고 말씀하신일이 없다.


그러므로 연옥은 성경 진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연옥을 만들기 위해 성경을 억지로 맞추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연옥에 대하여 말한 곳이 없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았고 사도들도 말하지 않았다


 


연옥은 인간의 이성 속에서 고안된 것이기에 초대 교회에 없었던 연옥 교리가 1200년의 역사가 흐른 후에 교리화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승천 하시기전에 제자들에게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그러나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 무엇을 한다거나 하라고 하지 않았다.


 


3. 그리스도가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한 것은 대속을 믿지 않았던 그들에게 대속의 승리를 증명해 보여 알린 것이다.


 


(벧전 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가톨릭에서는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 하시니라” 이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 하여 승천하기 전에 지옥에 내려가서 노아 시대에 심판 받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죽은 후에도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이 말을 근거로 하여 연옥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연옥설을 말하지 않는다.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 했다는 말을 해석한다면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고 하기도 하고 하나는 노아 시대에 전도를 거부했던 영들에게 예수가 약속된 그리스이심을 알려지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벧전 3장 전체의 내용은 로마로 하여금 가혹한 박해를 받던 때에 그 박해로 인하여 신앙이 요동됨에 따라 구원의 복음을 소홀이 하거나 도한 복음에서 떠날 가능성이 큼으로 노아 시대 사람들을 본으로 삼아 육신의 고난으로 영혼이 망하는 자들이 되지 말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의 긴 세월을 방주가 안성 되기까지 하나님이 심판을 참으신 것은 8명밖에 안 되는 지극히 적은 수이지만 이들을 살리기 위해 참으셨음을 말씀하면서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구원을 이루시기 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육신 적인 고난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라고 권면한 말씀이다.


 


[벧전 3:16-17]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노아 시대 사람들은 당시 홍수로 모두 별하였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후대에 약속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선포되어 증명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영으로 옥에 내려가 옥의 영들에게 선포 되었다고 했으니 복음이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구속을 이룬 사실 즉 십자가에 죽으신 사실과 부활하신 사실이 선포된 것이다. 그러기에 선포라는 원문이 복음 전파의 선포 유앙겔리조(ευαϒϒειζω )가 아니라 사실을 알리는 케루조(κερυσσω)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라기보다는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다시 살았다는 메시아적 승리의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 때에 노아가 고난을 당하며 준비하여 8식구가 살아 난 것처럼 십자가에 고난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육신적으로 고난당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은 결국 승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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