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여호와의 군대 대장 (수5:13-15)
본문
칼을 든 여호와의 군대 대장 / 여호수아 5:13-15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거듭나려고 모이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무엇으로 합니까? 그 사람이 고백한 고백대로 사는가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느냐? 맺지 않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그 사람이 맺는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은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강조합니다. 성도가 맺어야 할 삶의 열매도 사랑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4:8절에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의 정신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신입니다.
15일에 2020년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습니다. 정책은 사라지고, 막말만 오고간 선거이고, 진영 논리, 지역 논리로 끝난 선거가 되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극명한 진영 논리로 혼란스럽습니다. 코로나 사태 전에는 청와대 앞과 광화문 광장에는 태극기 부대와 촛불, 보수와 진보로 분열되어 서로의 주장을 외쳤습니다. 어떤 타협이나 설득은 사라지고, 무조건 우리 것이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은 어떤 것이든지 짓밟으려고 합니다.
‘진영 논리’는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특정 인물, 집단, 사물, 사건 등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에 그 대상이 어떤 진영에 속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논리입니다. 진보, 보수, 중도, 지역, 학벌, 성을 먼저 따져, 결론을 먼저 내리는 일입니다. 소위 '골통보수'나 '친북좌파'이란 단어가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병폐를 잘 보여줍니다.
이 진영 논리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의 해석이나 생각, 성향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무조건 폄하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데 서슴치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진영 논리에 빠져 네 편, 내 편 만을 고집만 한다면 대한민국과 한국 교회의 앞날은 어둡기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진 이런 진영 논리는 성경적인 관점입니까? 이렇게 질문해 보면 그렇지 않지요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거듭난 교회, 성령을 받은 성도가 세상을 바라볼 때의 가치관은 세상 가치관, 세상의 세계관으로 보면 안됩니다. 쉬운 예로, 선그라스의 비유입니다. 어떤 색깔을 썼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반미, 반중, 반이스라엘, 친미, 친중, 친북이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만들어 낸 단어이고, 상대방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과격적인 말입니다. 우리도 성경적인 관점 보다는 좌우, 보수라는 진영 논리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세속 정치에 관련해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한 것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21절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입니다. 정교 분리의 원칙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3:1-2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했습니다.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박근혜 정부를 세웠든지, 문재인 정부를 세웠든지, 그 정부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정부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순종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2:2절에서 세상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운 권력자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성도의 경건 생활과 평안한 생활을 막는 이상 행동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는 아니요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반면 문재인 정부도 금번 선거로 180석이라는 거대 여당이 되었지만, 박근혜 정부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계속해서 이슬람 침탈과 차별금지법, 인권보장 조례를 통화시키고, 퀴어 축제 등에 허가하는 등의 시도를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세우시는 자도 하나님이지만 폐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정치 세력이 좌파나 우파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믿어야 하고, 이런 진영논리는 성경 논리가 아니라 세상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이런 진영 논리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나오는 또 다른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문를 보면 하나님의 진영 논리는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고,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가나안 정복을 위해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을 통해서 들은 정보는 여리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녹았고 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쟁을 앞 둔 상황에서 이런 저런 염려와 고민을 하면서 여리고에 가까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칼을 들고 여호수아 앞을 가로 막으며 맞섰습니다. 여호수아는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적들을 위하느냐?” 여호수아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느냐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사람은 “아니다, 나는 너의 편도 아니고, 적의 편도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땅에 엎드려 경배하면서 말합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이에 여호수아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여호수아 맞서 있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 왜 여호수아를 향해 칼을 뽑아들고 있었을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면 당연히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여호수아의 편에서 서서 여리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진두지휘를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대 대장은 칼을 들고 여호수아를 향해 맞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성을 향해 칼을 들고, “여호수아야 나를 따르라, 이 전쟁은 여호와께서 승리하시기로 작정한 전쟁이다”라고 외치면서, 여호수아에게 큰 용기를 주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위로와 격려, 용기를 주는 장면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지금 당장이라고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를 내려 칠 기세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호수아에게는 위기였습니다. 여리고 전투를 해 보지도 못하고 군대 대장의 손에 죽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영적 안목이 생겼습니다. 재빠르게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여리고 정복을 위한 도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5절을 보면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아멘.
하나님은 누구의 편일까요? 여호수아라고 무조건 하나님 진영에 속한 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대 진영에 속한 자도 아닙니다. 성도나 교회가 하나님 편에 속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자기의 뜻으로 삼을 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가 됩니다.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한 말은 40년 전에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여호수아를 모세처럼 대해주는 것도 있겠지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종들이 여리고로 대변되는 이 세상을 정복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의 편이냐에 따라서 승리의 방향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편이냐’라는 이 말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느냐’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고, 거룩한 곳에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지금 내가 승리하기를 원하다면 거룩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을 돕고, 승리를 줍니다. 세상을 정복할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거룩해 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 발의 신을 벗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종으로서 주인의 말만 듣겠다는 헌신의 표요, 순종의 표입니다. 내 생각, 내 방법, 내 뜻을 다 내려놓아야 종이 될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벗은 신발을 다시 신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반역입니다.
또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거룩한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 교회, 대한민국이 거룩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이 거룩입니다. 거룩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 수 있습니다. 즉, 코람데오의 삶입니다. 코람데오란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세상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이 영향력을 미칩니다.
끝으로 고린도후서 10:4-5절을 보면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진영 논리로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거룩한 능력이 없이는 우리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교회의 정체성도 잃어버릴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내 편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은 바른 선택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말 그대로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한 백성답게 매일 내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