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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애쓰고 수고하십시오 (살전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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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애쓰고 수고하십시오(살전2:9-13)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던 교회였습니다.


1장에서 사도는 ‘너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면서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이 포함된 2장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데살로니가에서 전도를 하고 성도들을 양육하였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냥 되는 것은 아닌 줄 압니다.


좋은 결과가 있으면 그만큼 애쓰고 수고한 손길이 있게 마련입니다.


 


내일 모래면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있겠습니다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에서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한지 16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흑인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들을 보면서 링컨 대통령 시절 노예해방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생각해봅니다.


흑인 해방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스토우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입니다.


스토우 부인은 흑인 소녀로부터 톰 아저씨가 받은 핍박과 사랑과 순교적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쓰게 되는데요,


이 책이 출간되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스토우 부인, 당신을 절대 가만 두지 않을 테다.”


일부는 흑인을 살해한 뒤, 귀를 잘라 소포로 우송하면서까지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스토우 부인은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책을 보고 감명을 받은 링컨 대통령은 더 이상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지금부터 미국의 모든 노예들에게 해방을 선언합니다.”고 말합니다.


한권의 책이 세계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모든 노동력을 흑인 노예들에게 의지하던 남부의 완강한 반대는 5년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인 남북전쟁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여러분, 흑인노예해방이라고 하는 엄청난 공헌 뒤에는 이처럼 수고하고 헌신한 스토우 부인과 링컨 대통령과 같은 사람들의 헌신과 애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아름다운 신앙도 그냥 우연히 되어 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수고와 애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애쓰고 수고했을까요?


2절 말씀을 보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합니다.


편하고 쉬운 가운데 전한 것이 아니라 고난과 핍박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수고가 있었습니다.


3절에서는,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고,


5절에서는,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이익이나 유익을 위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진실한 마음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7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유모처럼 너희를 섬겼다고 말하고 있고요,


8절에서는, 심지어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를 위하여 주기를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애씀과 수고가 있었기에 데살로니가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하고 소문이 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수고와 애씀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 애씀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겨준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더욱 애쓰고 힘써서 신앙을 지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앙적인 수고와 애씀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코로나 19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성도들이 우선적으로 예배를 포기하였습니다.


위험하면 예배도 비대면 예배로 드릴 수 있고 온라인 예배로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선이 된다든지, 다른 것은 다 하면서 유독 예배만 비대면 예배를 고집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하면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0장)


또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수고와 애씀은 곧 우리 성도들의 수고와 애씀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고와 애씀은 어떤 면에서 이루어져야 할까요?


 


먼저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애쓰고 수고해야 합니다.


 


9절 말씀에,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썼습니다.


그 수고가운데 하나가 밤낮으로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자비량 선교라고 하는데요, 선교는 분명히 주님의 일이기에 후원을 받아서 할 수 있고 교회는 마땅히 선교사들을 위하여 적극적인 후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직업인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전도는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쓰는 일이 없이 쉽게 그냥 전도가 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전도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강하고, 놀고 즐기는 분위기속에서 전도에 대해서는 아예 귀를 닫아버리고, 젊은이들은 신앙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이럴 때 전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어기는 일이기에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들기에 전도에 대한 수고와 애씀이 더욱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방에서 전도하기 전 빌립보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얼마나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까?


실컷 매를 얻어맞았고 착고에 채워 깊은 토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전도에 대한 무슨 미련이 남았으며 생각이 그렇게 났겠습니까?


보통 같으면 전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도 바울은 수고하고 애쓰며 전도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는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 가장 중요한 명령입니다.


전도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할 때 악한 마귀의 방해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애쓰고 수고하여 전도를 하여야 합니다.


인가귀도를 위하여 늘 깨어 기도해야 하고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거룩한 삶을 사는 일에 애쓰고 수고해야 합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앞에서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기위하여 우리도 정말 수고하고 애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 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금요일 대법원에서 징역 17년형을 최종 선고받았습니다.


선고가 결정되자 이 전 대통령은 법치가 무너지고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고 기뻐했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내일 다시 구치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치인은 다 똑같다는 말을 하고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치인도 기독교인은 달라야 합니다.


정치인이기에 다 똑같아서는 안 되고 기독교 정치인은 구별되고 거룩해야 합니다.


사업가이기에 다 똑같아서는 안 되고 기독교 사업가는 구별되고 정직해야 합니다.


권력자이기에 다 똑같아서는 안 되고 기독교 권력자는 구별되고 옳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구별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비 기독교인들과 똑 같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수고와 애씀을 통하여 이 일을 기필코 이루어야 합니다.


 


1984년 세상을 떠난 프랜시스 쉐퍼는 복음주의 운동가였습니다.


그분의 저서는 많은 이에게 읽혔고, 그의 삶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말년에 암에 걸려 병마와 혹독하게 싸우면서도 생애 마지막을 자신이 사랑했던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캠퍼스를 다녔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남기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신자도 구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구할 바가 못 됩니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을 구하지만 거룩은 구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목표로 구하시고 그것을 위해 애쓰고 힘쓰십시오.”


오늘 우리도 축복을 구하고 행복을 구하지만 거룩은 구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도 꿈과 비전은 구하지만 거룩은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위해서는 어떻게든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구별된 삶을 사는 일에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일에 애쓰고 수고해야 합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 가지 면에서 합당하게 살아야하는데 먼저는, 자신에게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둘째는, 이웃에게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야하는데 여러분,


그 삶이 먼저는,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허락하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고 애쓰셨습니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 엄청난 고초와 부끄러움을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런 수고와 애씀이 있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수고하고 애쓰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예배에 수고하고 애쓰는 모습이 많이 부족합니다.


시간이 나면 예배에 참석하고 시간이 없으면 참석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예전에 주일학교에서 흔히 이야기했던 내용입니다만, 믿지 않는 부모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아이가 주일날 교회가지 말고 밭에 있는 콩을 다 뽑으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교회에 갑니다.


‘이 녀석 돌아오기만 해봐라’ 벼르면서 아버지가 밭에 갑니다.


그런데 밭에 있는 콩은 이미 다 뽑혀있었습니다.


아이가 주일에 교회 가서 예배드리기 위하여 밤새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는 아픔을 참으면서 콩을 뽑은 것입니다.


거룩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이런 애씀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와 함께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해야 할 일은 감사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모범이 되는 교회로 성장하였던 것은 물론 사도 바울을 통한 수고와 애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일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우리는 더욱 애쓰고 수고해야 합니다.


 


앞에서 제가 스토우 부인과 링컨 대통령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남북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어느 날 링컨 대통령이 스토우 부인을 찾아왔습니다.


봄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가냘픈 몸매를 한 여인을 보자 링컨 대통령은 깜짝 놀라며


“당신이 이 전쟁에 불을 당긴 스토우 부인 맞습니까? 스토우 부인!


이렇게 나약해 보이는 몸으로 어찌 그리 강하고 담대한 글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


이때 스토우 부인이 대답합니다.


“링컨 대통령님, 이 소설은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의 작품이란 말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단지 하나님이 쓰신 도구였습니다.”


그때 링컨이 대답합니다.


“스토우 부인, 저도 한 번도 제가 노예 해방을 시켰다고 여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늘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애쓰고 수고하여 범사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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