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축복자로 살아봐요 (창47:12)
본문
세상의 축복자로 살아봐요/ 창세기47;1-12
비행기 1등석에 앉아서 고집부리는 할머니
비행기에는 특별석 곧 1등석과 일반석이 있습니다.
1등석은 자리도 넓고 의자도 좋고 서비스도 좋습니다.
반면에 일반석은 자리도 비좁고 불편하고 서비스도 1등석에 비하여 좋지 않습니다.
한 할머니가 평생 처음으로 서울에서 광주로 가는 비행기를 탑니다.
할머니가 앉은 일반석은 자리도 비좁고 불편합니다.
그런데 비행기 앞쪽을 보니 의자도 좋고 자리도 넓고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워메.... 자리도 넓고 좋은 거.... 겁나게 좋구만이라잉”
할머니가 1등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스튜어디스가
“할머니, 여기는 1등석입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몇 번 말했는데도 할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른 스튜어디스가 와서 한마디를 합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번개같이 뒷자리로 돌아가더랍니다.
무슨 말을 했을까요?
스튜어디스가 한 그 한마디는
“할머니. 여기 앞자리는 부산으로 가고요, 저기 뒷자리가 광주로 가는 자리예요.”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가 비어있다고 아무 데나 앉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한다고 다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욕망과 죄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요 참사랑이요 진실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이어야 합니다.
P4
요셉과 바로의 초대를 받은 야곱과 아들들은 모든 식솔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요셉은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형제들, 조카들을 만나기 위해서 자기 가족들을 이끌고 고센 땅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게 된다.
형제들과 형수님들과 제수씨와 조카들을 만나게 된다.
아울러 수많은 종들까지도 만나게 된다.
요셉은 아버지와 5명의 형님들을 모시고 바로의 궁궐에 들어간다.
으리으리한 바로의 궁궐을 보면서 궁궐로 들어가서 애굽 제국의 지존, 애굽인들이 신으로 받들고 있는 바로 왕을 직접 만나면서 알현하게 된다.
바로 왕 앞으로 나아간 요셉은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라고 하면서 아버지와 형님들을 바로 왕에게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의 형님들에게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
형님들은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형님들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라고 말씀드리면서 고센 땅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말씀드린다.
바로는 요셉에게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라고 하면서 요셉의 형제들에게 고센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협력해 주도록 하라고 한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바로 왕에게 소개해 드린다.
바로는 야곱에게 “네 나이가 얼마가 되느냐?‘라고 묻는다.
바로의 물음에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바로를 어떻게 대우하도록 하실까?
하나님은 바로를 만난 야곱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고 계실까?
D4.
① 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
10-12절에서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야곱은 애굽의 절대지존인 바로에게 축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는 당시 중동지역의 대애굽제국의 황제로서 절대적인 권력과 권세를 지닌 사람이다.
어쩌면 태양신을 섬기는 애굽인들은 바로를 태양신으로 알고 섬기는 신적인 존재이다.
그런 바로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애굽의 고센 땅으로 기근으로 발생한 굶주림을 피하여 건너온 야곱이 축복하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서 바로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축복하는 것은 가난을 피해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하여 찾아온 야곱,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야곱이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힘있는 바로가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에게 축복해야 마땅한 도리인 것 같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축복하는 것은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축복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축복하는 것은 무언가를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에게 축복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축복하는 것은 나이 많은 어르신이 어린 자에게 축복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축복하는 것은 권세와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이 없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면서 축복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축복하는 것은 지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축복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축복하는 것은 학식을 가진 자가 배우지 못한 자에게 축복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축복하는 것은 정상인이 비정상인에게 축복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가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 축복해 주어야 지극히 정상적인 축복인 것처럼 보인다.
바로는 이미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에게 축복해 주었다.
야곱의 일행들이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이주하여 고센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허락해 주는 것 자체가 바로가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다.
이제는 야곱이 바로를 축복해 주어야 할 차례인 것이다.
그래서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였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축복은 세상적으로 비록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없고, 가장 연약하고 늘 부족하고 보잘 것 없고,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축복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도 바로를 축복하고, 그랄 땅의 아비멜렉 왕을 축복한다. 이삭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을 축복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모든 자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낮은 처지, 위치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 권세를 믿음으로 의지하고 당당하게 축복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정치인, 권력자, 권세자, 부자, 학식자, 사업자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에게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야곱은 바로에게 무엇이라고 축복했을까?
야곱이 구체적으로 바로에게 무엇이라고 축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야곱이 무엇이라고 축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축복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튼 성경에 야곱이 바로에게 무엇이라고 축복했는지, 축복한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축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야곱은 바로에게 건강과 지혜로운 정치인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며 기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야곱이 바로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축복하며 기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근 중에 있는 현실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축복하며 기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야곱은 바로가 몇 살이냐고 물었을 때, 130세라고 자신의 나이를 말하면서 130년을 살아오면서 험악한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한다.
야곱은 험악한 삶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언제나 함께해 주셨던 여호와 하나님, 갖가지 어려운 처지에서 건져주시고 지켜주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가 만나주셨던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축복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축복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인들이 가진 최고의 특권이요 권한이요 의무이기도 하다.
신앙인들은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는 신앙인의 고유한 특권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② 아직도 남아 있는 기근을 잘 극복하게 하시는 하나님.
기근은 7년 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7년 동안 거대한 풍년에 이어서 7년 동안 상상하기조차 싫어할 정도로 흉년이 계속되어진다.
7년 중에 지금까지 2년이 지나간 상태이다.
앞으로도 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흉년으로 큰 고통을 당해야 하는 현실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든 버티면서 살아왔지만, 앞으로 5년 동안 버티면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다.
앞으로 남아 있는 5년 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굶어 죽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1994년부터 시작되어 2000년에 이르기까지 북한에 불어 닥친 고난의 행군으로 인하여 300만 명이 굶어 죽으면서 아사당했다고 전해진다.
탈북인들이 증언에 의하면 옆에서 함께 자던 사람이 깨어나고 보면 죽어있더라는 증언이 수없이 많다.
굶어서 죽은 시체들이 넘쳐났다고 증언한다.
이처럼 애굽을 중심으로 중동지역에 불어 닥친 기근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어갔을지,...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굶어 죽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와중에서 애굽의 곡식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하다는 소문이 계속 퍼져나가면서 애굽 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중동지역에서 애굽의 곡식 창고로 곡식을 사기 위하여 몰려드는 것이다.
애굽 백성들도 흉년을 피해갈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가진 돈으로 곡식을 구매하기 시작하여 돈이 다 떨어지면 가축으로, 가축이 다 떨어지면 몸과 토지로 곡식을 사려고 한다.
백성들은 굶어 죽는 것보다는 종이 되더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 지금은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스스로 종이 되기로 작정하면서 곡식을 달라고 한다.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토지를 팔아서라도 굶어 죽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렇게 되면서 애굽의 전 국토가 바로 왕의 국토로 바뀌게 된다.
모든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된다.
단지 왕이 주는 봉급으로 사는 제사장들의 토지 외에 모든 백성들의 토지가 국가의 소유로 바뀌게 된다.
애굽 전 국토가 국유화하게 된다.
요셉은 백성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면서 국가에 헌납한 토지에 농사하여 1/5의 국가에 국세로 상납하고 4/5로 백성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토지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요셉이 실시한 토지정책으로 애굽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전제주의 왕정정치을 위한 기반을 형성시켜 나가게 된다.
요셉이 총리로서 충실하게 토지정책을 실시함으로서 바로에게 강력한 권력과 권세로 애굽을 통치할 수 있는 군주로 세워나가게 된다.
사실은 전 국가의 토지가 왕의 소유지로 바뀌어서 국유화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전 국토가 국가의 소유가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국민에게 사유지가 인정되어야 국민의 힘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세워지는 것이다.
전 국토가 국유지가 되면 자연스럽게 전제주의, 독재국가가 만들어지는 요인이 된다.
공산주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가 추진하는 것이 전 국토의 국유화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이 전 국토가 국가 소유로 국가가 소유권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경작할 수 있도록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토지뿐만 아니라 모든 재산은 사유화될 때, 사유화한 재산을 지켜나가고 더 많은 재산을 사유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경쟁력이 생겨서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고, 성장시켜 나갈 수 있다.
지금 애굽제국에 발생한 전 국토의 국유화는 7년 대흉년으로 발생한 특수한 상황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불행한 일이다.
성경적인 재산관리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맡겨주셔서 철저한 사유화로 자유시장 경제에 의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자유시장 경제에 의해서 시장이 활성화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서 서로서로 경쟁하면서 서로서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L4 & B4.
오늘은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 130년 동안 한결같이 자신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를 축복하는 말씀이다.
어쩌면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축복함으로서 모든 식솔들이 애굽 땅 고센 지역으로 집단이주하여 거주하는 빚을 갚는 것이다.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함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다 감당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란 땅에 머물고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복의 근원, 주체, 주인공으로 삼아주신다.
믿음의 족장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복의 근원이요 주체요 주인공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가족들, 후손들뿐만 아니라 주변 불신자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한 사람들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삭의 후손으로, 야곱의 후손으로서 복의 주체요 근원이요 주인공이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과 권세로 가족들, 후손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축복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신앙인의 특권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늘 부족하고 보잘 것 없고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신앙인들을 물론이거니와 불신자들까지도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민수기6;24-26에 보면 대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신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일반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지만, 대제사장의 이름으로, 제사장 개인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 아니다.
민수기 6:27에서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제사장 개인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다.
제사장 개인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축복에 책임을 지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하겠노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전도를 보내시면서 마태복음10:12-13절에서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곧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때, 그 집이 축복을 받을 만하면 그 축복이 그 집에 임하겠지만, 만약에 그 집이 축복을 받을 만하지 못하다면 그 축복은 축복한 사람에게로 되돌아온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누구에게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삶을 습관적으로 살아야 한다.
축복하는 삶을 살게 되면 누군가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고, 만약에 그 축복이 그 집에 합당하지 않다면 우리들에게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우리들은 의지적으로라도, 습관적으로라도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입술에 믿음을 더하여 선포할 때, 그 선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신앙인들이 기도하더라도 우리 신앙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직접 본인이 기도하지만, 신앙인이 하는 기도라고 해서 신앙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서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주시는 예수님, 우리의 주인, 주님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진솔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애정과 헌신을 가지고 기도하더라도 본인의 이름으로, 기도자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만 그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로 상달되어 응답받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할 수 있는 축복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인이 축복하지만, 신앙인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구에게든지 진심을 다하여 축복해 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연약하고 덜 익은 신앙인으로 성숙하지 못한 인격과 신앙의 수준으로 인하여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지 않은 몇몇 대상들이 있을 수 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축복보다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청구하고 싶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 징계하셨듯이, 하나님을 떠나고 대적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징계하여 멸망시키고 포로로 질질 끌려가도록 징계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모든 영혼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회개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보혈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좋은 일이지만,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많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에 10재앙을 내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악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돌이키지 않아서 홍해에서 심판하는 바로와 애굽의 모든 대소신료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음이다.
바벨탑을 높이 높이 쌓아 올리고 있는 니므롯을 비롯한 거만한 인간들을 징계하시고 흩어버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언젠가 심판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과거의 바벨탑은 오늘날 여러 갈래로 나타나고 있지만, 포괄적 차별금지법이야말로 인간이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는 바벨탑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인간의 무지함과 거만함과 교만함을 파괴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인들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고 건져주시고, 막아주시고, 지켜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축복하는 입술로 변화되어져야 한다.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서 축복하는 마음과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사랑과 은혜를 가슴에 가득 품고 주변에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입술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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