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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가 되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봐요 (창44: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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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가 되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봐요/창세기44;14-34(201101)


남편들이 아내에게 매 맞는 이유


 


20-30대 신혼기는 꿀맛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40대가 되면서부터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어느 병원에 아내에게 매를 맞아서 치료받으러 온 남편들이 모여서 신세타령을 합니다.


어쩌다가 아내에게 매를 맞았는지 각각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 남편들이 털어놓는 이유입니다.


40대 남편 ; 나는 어젯밤에 술 먹고 들어왔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에게 해장국 끓여달라고 했다가 이렇게 됐지 뭡니까?


50대 남편 ; 나는 친구들과 계모임으로 외출 중인 아내에게 어디 있냐고, 언제 들어 오냐고 전화했다가 이렇게 됐다오.


60대 남편 ; 나는 외출 준비 중인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가 이렇게 되었다오.


70대 남편 ;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해장국 끓여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친구들과 계모임으로 외출중인 아내에게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언제 들어 오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외출 준비 중인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됐다오.


50대 남편 ; 그러면 왜 그렇게 되셨는데요?


70대 남편 ; 눈 앞에서 얼씬거린다고 이렇게 되었지 뭐요!


80대 남편 ;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해장국 끓여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친구들과 계 모임으로 외출 중인 아내에게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언제 들어 오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외출 준비 중인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아내 앞에서 얼씬거리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됐다오!


40대 남편 ; 아니 그러면 왜 이렇게 되셨어요?


80대 남편 : 아침에 일어나서 죽지 않고 눈을 떴다고 이렇게 되었다네!


요즈음은 아내의 힘이 얼마나 센지 남편들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된 여성파워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갈 때 얼마 전에만 해도 아내들이 남편을 버리고 갈까 봐서 이사하는 차량 운전석 옆 좌석 조수석에 미리 앉아 있어야만 데리고 간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냉장고를 붙들고 있어야만 데리고 간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강아지를 꼭 안고 있어야만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사 갈 때, 조수석에는 포장 이사하는 일꾼이 타고 가야 하고, 냉장고는 버리고 가서 새 냉장고를 사면 되고, 강아지는 버리지 않고 꼭 데리고 가기 때문이랍니다.


웃으라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요즘 부부 사이를 풍자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부부들은 행복한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하였는데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면서 서로 버리고 가지 않을까 생각하거나 매를 맞으면서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삶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행한 결혼생활이 아니라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P4


 


요셉은 청지기에게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라고 시킨다. 청지기는 요셉이 시키는 대로 한다.


왜 요셉은 베냐민의 자루에 자신의 은잔을 넣으라고 했을까?


아마도 요셉은 형님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면 친동생 베냐민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베냐민과 함께 살고 싶어서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을 때, 형님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험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요셉은 날이 밝아서 형제들에게 맛나게 아침 식사를 든든하게 먹인 후에 가나안 땅으로 떠나보낸다.


형제들이 출발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요셉은 청지기에게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라고 시킨다.


청지기는 형제들을 따라가서 요셉이 시키는 대로 한다.


형제들은 청지기에게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한다.


청지기는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라고 하면서 형제들의 곡식 자루를 풀고 르우벤의 자루부터 차례로 하나씩 하나씩 검사하기 시작한다.


그랬더니 베냐민의 자루에서 청지기가 찾는 은잔이 발견된다.


이제 꼼짝없이 베냐민은 은잔을 도둑질한 죄인이 되어 끌려가서 종살이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형제들은 요셉 앞으로 되돌아온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라고 호통을 친다.


유다가 요셉에게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의 대가로 종이 되겠노라고 하면서 초강수를 띄운다.


모두가 종이 되겠노라고 하는 형제들에게 요셉은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라고 말하면서 베냐민만 종으로 남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형제들은 이미 예상했던 대로 베냐민을 잃게 되는 상황이 된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유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서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고, 막내 동생 베냐민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하게 하신다.


유다는 요셉에게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라고 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자초지종을 세세하게 다 요셉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유다는 33-34절에서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라고 하면서 베냐민의 생명과 아버지의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연로하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기 때문에 베냐민 대신에 자신이 종이 되겠노라고 애원한다.


만약에 유다가 베냐민 대신에 종이 되어 애굽에 남아 있고, 베냐민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갔다면 아버지 야곱은 어떻게 될까?


베냐민이 무사히 돌아온 것으로 만족스러워하고 감사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아버지에게는 베냐민을 잃은 것이나 유다를 잃은 것이나 다 똑같다.


흔히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다 똑같은 아들이기 때문에 어느 아들에게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령 베냐민이 아니라 유다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버지로서 견디기가 쉽지 않다.


 


이제 형제들은 베냐민이 도둑으로 몰려서 종살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 일을 어떻게 극복해야만 하는 것일까?


만약에 베냐민을 종으로 남겨놓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다면 아버지 야곱이 틀림없이 낙담하여 유명을 달리할지도 모르는데...


남편과 아버지를 잃게 될 베냐민의 처자식들은 어떻게 하고....


유다는 자신이 책임지고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오겠노라고 호언장담했었는데 형제들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D4.


 


① 유다에게 희생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베냐민이 종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유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다른 변명 같은 것을 일절 하지 말고 순수하게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노라고 결단하도록 감동을 주신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곡식 사러 출발하기 전에도 아버지에게 반드시 베냐민을 데로고 돌아오겠노라고 결단하게 하시고, 이젠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먼저 종이 되어 희생하겠다고 결단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베냐민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들의 죄도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고 결단하게 하신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유다는 아무런 죄를 범한 사람이 아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종이 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동생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결단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유다는 자신이 직접 죄를 범한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요셉의 말처럼 자신이 담당할 곡식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면 된다.


유다도 책임져야 할 식솔들이 가나안 땅에 남아 있지 않던가?


비록 자신이 실수로 인해서 낳은 아들이지만, 며느리 다말도 있고, 세 아들이 가나안 땅에 남아 있다.


유다가 애굽에서 종살이하게 되면 남아 있는 식솔들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식솔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유다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베레스와 세라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절대적으로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무런 죄도 없는 유다로 하여금 베냐민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자가 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들도 아무런 죄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죄라든지, 누군가의 실수라든지, 누군가의 오류와 잘못 때문에 발생한 갖가지 문제들을 대신 짊어지고 해결자 또는 희생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들은 없을까?


어쩌면 누군가의 죄 때문에 우리가 그 죄를 범한 범인이라고 누명을 쓰게 되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없는가?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항상 올바른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애매하게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할 때도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많고, 누명을 쓰게 되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본인이 원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할 때가 아주 많다.


본인의 의지가 되었건, 본인의 의지가 아니건 간에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면 기꺼이 먼저 희생하는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② 그림자가 되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


 


종이 되어야 할 마땅한 죄를 범하지도 않은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노라고 희생하는 모습은 마치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모습과 같다.


이런 모습을 그림자 또는 모형이라고 한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어야 생긴다.


실체에 빛을 비추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림자가 생긴다.


실체와 빛이 없으면 그림자는 생기지 않는다.


그림자를 보면서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림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림자가 아무리 크고 화려하고 웅장해 보여도 실체가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지게 된다.


반드시 실체가 있어야만 그림자는 생기는 것이다.


그림자는 진짜 실체가 있음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명이 있다.


그림자가 실체를 보여주지 않고 그림자 자체가 진짜 실체인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실체가 있어야만 생기게 되는 그림자를 다른 말로는 모형이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모형은 진짜를 본떠서 만든 가짜이다.


모조품을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진주 모조품이 있더라도 진짜 진주에 비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모조품의 천국이라 해도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진짜에 비교할 수 있을까?


수십만의 진주 모조품을 가지겠는가? 아주 작은 진짜 진주 하나를 가지겠는가? 라고 물었을 때, 진주 모조품을 가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천치요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리 작아도 진짜 진주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류의 메시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께서 인류가 범한 모든 죄악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모든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온전한 백성으로, 정결한 백성으로 세우시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건들이나 믿음의 위인들은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그림자요 모형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가르쳐주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가르쳐 주는 성경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약성경은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만약에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어떤 존재일까?


아무리 우리 신앙인들이 구약성경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화려하고 웅장하게 가르치고 전한다 해도 우리들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그림자요 모형이요 껍데기에 불과하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림자요 모형이요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여전히 죄인이요 심판받아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야만 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그림자를 통해서, 모형을 통해서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믿을 수 있어야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


껍데기를 통해서 알곡을 볼 수 있어야 그 알곡을 통해서 영의 양식을 먹을 수 있고 영생의 삶을,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유다가 막내 동생을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살려고 결단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도 하고, 그림자가 되기도 하면서 유다의 후손을 통해서 인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으로 찾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유다의 후손으로 형성되는 가계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에 위대한 성군이라는 다윗왕이 태어나고, 다윗왕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구원의 길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유다의 삶, 자기희생적인 삶을 결단하는 유다의 삶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하늘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L4 & B4.


 


유다가 동생을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희생적인 삶을 살려고 결단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할까?


우리 신앙인들은 누구를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유다가 희생적인 삶을 결단함으로 베냐민을 살리고, 다른 형제들을 살리고, 모든 야곱의 식솔들을 살리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고, 온 인류를 살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활짝 열어놓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의 희생적인 삶을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고, 회복하고 더 나아가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확장하는 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이겠는가.


우리 신앙인들의 희생적인 삶을 통해서 가까이로는 우리 가족들을 살릴 수 있고, 우리 동료들, 친구들, 성도들, 이웃들을 살리고, 지인들을 살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 한민족을 살리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거창하게 자유대한민국과 한민족을 살린다고 하면 너무나 터무니없고, 어불성설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의 작은 희생, 헌신을 통해서 지금 국회에서 제정하려고 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비롯하여 온갖 악법들을 막아낼 수 있다면 자유 대한민국과 한민족과 한국교회를 넘어서 온 인류를 살리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차별하지도, 차별받지도 않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는 너무나 좋은(?) 이미지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역차별을 받아야 하는 세상,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음모가 깊게 깔려져 있는 악법을 막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차별금지법은 성경과 삼위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신앙인들을 중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악법이다.


차별금지법은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다스리고 역사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악법이다.


차별금지법은 기독교와 교회를 범죄자로 만들어서 교회를 없애려고 하는 법이다.


그러기에 반드시 막아야만 주님의 몸된 교회도 살리고, 우리 신앙인들도 살리고, 한민족도 살리는 것이다.


 


올 2020년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지구촌 곳곳에 큰 재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온 지구촌에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징계하시고, 지역에 따라서 너무나 많은 폭우로 인해서 홍수, 수해로 징계하시는가 하면, 이상기후로 인해서 남극과 북극에 있는 천연빙하들이 녹아내리는가 하면, 어떤 지역은 산불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믿음의 눈으로 지구촌과 우주계를 바라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심판하셨듯이,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로 심판하셨듯이, 로마 시대에 지진으로 심판하셨듯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의 회초리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희생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① 하늘의 하나님을 대적했던 모든 교만, 거만의 죄악을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수없는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다.


온갖 사상, 종교, 학문, 예술, 미디어 영상, 문화, 철학, 법이라는 미명 아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있다.


니므롯과 세미라미스를 중심으로 죄인들을 통제하면서 높이 높이, 더 높게 더 높게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것처럼 네피림과 같이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쌓아 올린 바벨탑을 한번 무너뜨려 보시오.”라고 조롱하고 있다.


이런 죄악에서 회개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해져야 하고, 낮아져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②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우리 자유대한민국은 커다란 바람 앞에 위태롭게 가물가물 거리고 있는 촛불과 같은 처지이다.


언제 어떻게 와르르 무너질지 모른다.


동서남북, 온 천지가 상처투성이다.


대한민국 전체가 울상이다.


한곳에서 무너지기 시작하면 봇물 터지듯이 우르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폭삭 주저앉게 될 것같아 보인다.


나라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진다.


북한이 그랬고, 구 소련 연맹이 그랬고, 중국이 그랬고, 유럽이 그랬다.


마르크스 사상에 사로잡힌 좌파들에 의해서 나라와 민족이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고 말았다.


마르크스 사상을 움직이고 있는 사탄, 어둠의 세력들에 의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들은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던 역사가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기에 읍참마속(泣斬馬謖)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말은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말로서 아무리 친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도 규칙을 어겼을 때는 공정하게 법에 따라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민족을 살린다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측근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하는 공정성과 과단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통곡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③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 온전하게 미쳐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 자체를 한탄하셨다고 창세기6;6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타락한 인간세계는 어쩔 수 없는 죄악투성이이다.


그러기 때문에 유일한 희망은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 온전히 미쳐서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살아야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길은 찾을 길이 없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내어드리고 온전하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겠노라고 결단하고 결단하고 결단하고 계속 결단하면서 살아야만 된다.


 


이처럼 우리들의 작은 헌신, 희생적인 삶이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는가? 라고 자조할 수 있겠지만, 유다 한 사람의 작은 희생적인 삶이 커다란 파도를 일으켜서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들의 작은 희생, 헌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에 붙들리게 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아주 작은 빗물들이 모여서 고랑물을 만들고, 고랑물이 모여서 개울물을 만들고, 개울물들이 모여서 계곡물을 만들고, 계곡물들이 모여서 시냇물을 만들고, 시냇물들이 모여서 작은 강물을 만들고, 작은 강물들이 모여서 큰 강물을 만들고, 큰 강물들이 흐르고 흘러서 커다란 바닷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욥기 8:7에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시작은 아주 작은 빗물에서부터 시작하여 커다란 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희생, 헌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커다란 은혜의 강물, 은혜의 바닷물로 만들어가실 것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말한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작은 헌신, 작은 희생의 삶은 정말 값지고 귀한 것이라는 사실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작은 희생, 헌신의 삶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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