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결단이 구원의 시작이랍니다 (창43:1-17)
본문
믿음의 결단이 구원의 시작이랍니다/ 창세기43;1-17
어느 부대의 수통
전쟁이 한창이던 때 어느 부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장교가 전투 중에 부상당한 환자들을 돌보다가 심한 상처를 입은 병사가 애타게 물을 찾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 중이라 물이 귀했지만, 장교는 자신의 수통에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내주었습니다.
목이 무척 말랐던 그는 무심코 마시려다가 동료 병사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모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이 귀한 상황이라 모든 병사들이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수통을 입에 대고 꿀꺽 꿀꺽 소리를 내면서 물을 마신 후 다른 병사에게 수통을 넘겼습니다.
수통을 넘겨받은 병사가 마시려고 보니 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깊은 눈빛으로 동료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꿀꺽 소리를 내며 맛있게 물을 마신 후 수통을 또 다른 병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며 모든 병사들이 물을 마셨습니다.
마침내 수통이 장교에게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수통의 물은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모든 병사들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고 더 이상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런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수를 마실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분입니다.
P4
7년 대 흉년이라는 대재앙 앞에 중동지역은 아수라장이 된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가까스로 곡식을 구매해 왔지만,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야곱의 일행에게는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식량난에 부딪치게 된다.
야곱의 식솔들이 몇 명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창세기 46;27에서 요셉과 바로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넘어간 숫자는 70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70명이라는 숫자는 야곱을 포함하여 순수한 혈손들이다.
70명에 + α가 등장해야 옳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α에는 야곱의 레아와 라헬을 뺀 아내들과 며느리들과 손자 며느리들과 손녀들과 수 많은 종들이 포함된다. 그러기 때문에 대략 2000-3000명 정도는 족히 되고도 남았을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 이들은 목축업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가축들도 포함된다. 나귀, 양 떼들, 염소 떼들, 닭들, 오리들과 같은 가축들이 포함된다.
이렇게 많은 식솔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최소한의 양식이라도 제공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애굽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시므온을 제외한 9형제들이 양식을 사 온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식솔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식이 필요하다.
요셉의 형님들이 애굽에서 곡식을 구매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 지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애굽에서 구입한 양식은 2000-3000명의 인원들이 먹고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란다.
어른들이야 어떻게 하든 참고 견디어보려고 하지만, 어린 것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매일 울부짖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더이상 참고 견딜 수가 없는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서 곡식을 구매해 오라고 한다.
그런데 아들들은 애굽으로 곡식을 구매하기 위해서 떠날 수가 없다.
분명히 애굽의 총리가 단단하게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절대로 곡식을 구매하기 위해서 올 수 없다고 단단하게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막내동생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애굽의 정황을 살피기 위해서 온 정탐꾼들이라는 누명을 쓰고 곧바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막내동생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절대로 애굽으로 다시 곡식을 구매하기 위해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 야곱은 절대로 막내아들 베냐민만큼은 보낼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곡식을 구매하러 애굽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D4.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은 “결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 속에 찾아오셔서 결단하게 하시면서 아들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구매하러 떠나고 곡식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고, 온 야곱의 일행들이 애굽으로 집단이주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찾아가셔서 무언가를 결단하게 하실까?
① 유다에게 결단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찾아가셔서 아버지를 설득하도록 역사해 가신다.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유다는 막내동생을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번에도 전면에 나서게 된다.
유다는 아버지께 여러 가지 말씀을 드리면서 자신의 결단을 아버지께 말씀드린다.
유다는 8-10절에서 아버지에게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유다는 아버지에게 만약에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오지 못하면 자신이 모든 죄의 대가를 책임지겠습니다.라고 결단하면서 아버지의 완고한 마음을 설득하려고 한다.
유다는 자기 자신이 담보물이 되어 모든 책임을 질테니 베냐민을 같이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애원한다.
그래야만 모든 식솔들을 굶주림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다는 자기 자신이 희생당함으로 온 가족들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결단한다.
유다가 이렇게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유다의 마음과 생각이라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감동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면서 이런 희생적인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후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와 같은 왕을 세우고, 더 나아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다로 하여금 모든 일에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살도록 감동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력도 더하여 주시고, 무리들을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쉽도 더하여 주시고 계신다.
② 아버지 야곱에게 결단하도록 하신다.
유다가 반드시 베냐민을 책임지고 데리고 돌아오겠다는 결단을 들은 야곱은 아들들에게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하면서 베냐민을 잃어야 한다면 잃겠다고 결단하게 된다.
막내아들 베냐민을 지키려고 하다가 모든 식솔들이 굶주려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막내아들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식솔들이라도 굶주림과 죽음에서 구원하여 살려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을 주신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마지막 살아가는 삶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베냐민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요셉을 잃었는데, 이제 베냐민까지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하는 아버지의 결단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베냐민을 잃을지라도 다른 식솔들을 굶주림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감동을 주시고 계신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가나안 땅의 토산품을 예물로 준비하여 가라고 한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유향과 꿀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를 준비하여 가지고 가라고 한다.
야곱이 준비하여 가져가라고 하는 토산품 중에 유향나무 열매는 ‘피스파치오(Pistachio)’라는 열매이고, 감복숭아는 ‘아몬드(Almond)’라는 열매이다.
야곱은 토산품을 준비하고 곡식 대금도 지난번 곡식 대금과 함께 넉넉하게 준비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막내아들도 데리고 가라고 한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어 막내아들을 잃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막내아들도 잃을 각오까지 한다.
그러면서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긴다고 고백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간섭하시고 섭리해 주시기를 간곡하게 기도하는 맘으로 막내아들을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절대로 막내아들을 보낼 수 없다고 하던 야곱이 이처럼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결단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새롭게 결단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③ 베냐민에게 결단하도록 하신다.
아무리 형님들은 막내 동생을 데리고 가려고 하고, 이제 아버지까지 허락해 주셨지만, 정작 당사자인 베냐민이 거절하면 동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베냐민이 가지게 된다.
베냐민은 이미 혼인하여 여러 명의 처자식들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다.
이 때 베냐민의 나이는 대략 24-27살 정도 되었을 때라고 추산할 수 있다.
베냐민은 20대 중반의 나이였는데, 나중에 야곱의 온 식구들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베냐민은 10명의 아들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냐민은 20대 중반의 나이인데, 10명의 아들들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한 명으로는 짧은 시간에 10명의 아들을 낳을 수가 없다.
짧은 시간에 10명의 아들을 낳으려고 하면 적어도 3-4명의 아내가 있어야 가능해진다.
그러니 베냐민은 형님들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불상사라도 일어난다면 내 처자식들을 누가 책임져 준단 말인가?
베냐민은 무섭고 두렵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래서 베냐민은 가능하면 애굽으로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싶은 마음이 많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냐민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감동을 주신다.
베냐민이 고집을 피워서 형님들과 함께 곡식을 구매하기 위해서 애급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처자식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굶어 죽을 수도 있지 않지 않냐? 그러니 처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곡식구매단의 일원이 되어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냐민의 마음에 담대하고 견고한 믿음을 주시고, 반드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베냐민에게 아무 염려하지 말고 형님들을 따라서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베냐민은 형님들을 따라서 곡식구매단의 일원이 되어 애굽에 다녀와야겠다고 결단하게 된다.
④ 청지기에게 결단하도록 하신다.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시고, 베냐민도 동행하겠다고 결단하여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애굽으로 떠난다.
몇 날 며칠을 여행하여 애굽에 있는 곡물판매소 앞으로 나아간다.
마침 요셉은 직원들이 곡물판매소에서 곡물을 구매하기 위해서 몰려든 수많은 인파들에게 곡물을 파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형님들이 곡물을 구매하러 온 것을 보게 된다.
요셉은 자기 집 청지기에게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명을 따라서 요셉의 집으로 인도해 간다.
형제들은 가나안 땅뿐만 아니라 온 중동지역에서 곡물을 구매하러 온 이들이 수없이 많은데, 자신들만 총리의 집으로 끌려가는 것에 대하여 크게 두려워한다.
형님들은 서로서로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라고 생각하면서 바짝 겁을 먹고 두려워한다.
형님들은 청지기에게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심정을 토로한다.
청지기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는 형님들에게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라고 하면서 안심시켜준다.
그러면서 먼저 인질로 가두었던 시므온도 데리고 온다.
요셉의 집에 있는 하인들은 최대한으로 맛나는 음식을 만들면서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나귀들에게도 먹이를 준다.
청지기는 곡식을 사기 위해서 가나안에서 온 이들과 요셉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모르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형님들이 첫 번째 곡식을 사러 왔을 때, 요셉이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직감적으로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청지기는 요셉이 본래부터 애굽 출신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종으로 팔려 온 히브리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요셉이 청지기에게는 자신과 형님들과의 관계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알았든지 요셉과 형님들의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청지기가 만약에 좋지 않은 악한 마음을 품고 방해물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야말로 청지기가 요셉의 형제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막 대하면서 형제들에게 더욱 더 큰 두려움과 무서움을 갖도록 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바짝 겁을 먹고 긴장하고 있는데, 더 힘들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게 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청지기에게 선한 마음을 갖도록 결단시켜 주셔서 그나마 덜 두려운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청지기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이렇게 잘해 줄 수 있었던 것들은 하나님께서 청지기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형제들을 잘 볼 봐 드릴 수 있도록 결단을 하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 특히 기근과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에서 구원받고 더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민족,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 히브리 민족을 만들어가시기 위하여 서로에게 결단할 수 있는 은혜와 감동을 주신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결단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어가시기 위하여 결단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유다와 야곱과 베냐민과 청지기에게 결단할 수 있는 은혜와 믿음을 주시고, 결단함으로서 낮시간에 요셉은 집으로 돌아와서 형님들을 만나면서 아버지의 안부도 물어보고, 막내동생도 만나게 된다.
친동생을 만난 요셉은 벅차오르는 뜨거운 형제의 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서 울고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식사하게 된다.
요셉은 자신의 상에 차려준 음식들을 형님들과 동생에게 나눠주면서 마음껏 먹고 마시라고 한다.
아마도 형제들은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에 식사시간이 되었을 때, 최대한 식사예의를 갖추려고는 했겠지만, 아무래도 허겁지겁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탈북민들이 북한에서 아사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목숨 걸고 두만강, 얍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와서 처음 식사할 때 그야말로 며칠동안 정신없이 허겁지겁 먹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들은 북한에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중국에서는 개들도 흰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은 개보다도 못한 존재로 살았구나. 하면서 한없이 자책하며 울었다고 한다.
요셉은 형제들이 허겁지겁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목놓아 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아무 것도 모르는 형제들을 극진히 섬길 수 있도록 요셉의 마음에 감동을 주신다.
L4 & B4.
오늘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구매하러 가는 과정에서 유다와 야곱과 베냐민과 요셉의 집 청지기가 각각 자신의 처지에 맞는 결단을 하고 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들 각자에게 찾아가시고 감동을 주시면서 결단할 수 있도록 역사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어떤 것을 결단하라고 원하실까? 무엇을 어떻게 결단하기를 원하고 계실까?
①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키기 위해서 결단하라고 하신다.
다양한 사상과 신학들과 이단들이 난무하는 난잡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핑계로 교회당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통제하려고 하는 정부 당국 때문에 수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의 절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저는 저 개인적으로 인터넷 예배니, 동영상예배니, 비대면예배니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스마트 정보화 시대에 발맞추어 인터넷 예배니 동영상예배니 하는 것을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하나의 예배트렌드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늘 아버지 앞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하는 신앙인에게 과연 합당한 예배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질문해보면 “예”라고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신앙의 절개는 어떤 경우가 밀려온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굳건하게 지켜야만 하는 신앙인의 기본적인 도리이다.
목회자들까지도 적당하게 세상의 기준과 타협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주저주저하고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신앙인으로서, 직분자로서, 사명자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는 결단을 수없이 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반문하신다.
정말 믿음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살고 있는지 스스로 반문해 봐야 한다.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동굴을 파고 들어가서 십자가를 그리면서 하늘의 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께 예배드리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믿음의 사람은 신앙인의 절개를 굳건하게 지키는 사람이다.
②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 결단하라고 하신다.
현대사회는 설교 홍수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스마트폰을 통해서 헤아릴 수 없는 각종 설교들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넘쳐나는 설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홍수 곧 물난리 속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설교의 홍수 속에서 영혼을 살리는 생명수같은 진짜 설교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설교의 홍수 속에서 넘쳐나는 설교들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아 숨 쉬고 있는가? 라고 질문했을 때 곧바로 “OK”라는 대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어느 유명 인사들의 어록을 인용하기에 급급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정말(?) 훌륭한 설교라고 떠벌리고 있지 않는가?
정말 훌륭한 설교라고 자랑하는 설교원고에 성경 본문의 내용은 양념에 불과하고, 본 내용은 세상의 이론, 세상의 이야기, 세상의 어록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이름은 설교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설교가 아니라 하나의 잘 짜여진 강연내용과 같은 느낌을 지어버릴 수가 없다.
세상의 어록을 인용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잘난 이야기를 예화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설교하면 재미없는 설교, 내용 없는 설교라고 정죄하기에 바쁘다.
성경 66권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유명하다는 그들의 어록에 비해서 형편없이 보잘것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설교하는 것보다 그들의 어록을 더 많이 인용하고 사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지울 길이 없다.
설교 준비한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 자체를 깊게 깊게 묵상하기보다는 여러 종류의 주석들과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탄방하면서 많은 시간들을 허비(?)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에 생명줄을 걸어야 한다.
성경 66권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고 죽고 살 수 있는 결단을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동성애를 비롯하여 수간에 대하여 엄벌을 내리도록 촉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신 이상한 신학자들, 목사들은 동성애, 수간을 찬양하고 격려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유일한 생명이요 복음인 성경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들은 세상의 원리, 사상, 학문, 어록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음으로 먹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당당하게 죽고 살고자 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
③ 오직 십자가 보혈과 복음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단하라고 하신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다양한 방법과 길이 있다.
어떤 이들은 마치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다양한 방법들과 도로가 있는 것처럼 구원의 길도 다양하고 다변화해야 하지 않느냐?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니냐?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야말로 이단이라고 정죄된 이들이 그렇게 주장하면 이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정상적인 교회라고 하면서, 정상적인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와 복음만을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면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정죄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특히 세계 최대의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카토릭교회에서 성경만을 고집하는 근본주의자들 때문에 세상에 평화가 오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한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다양할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누가 뭐라 해도 단 하나밖에 없다.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그리스도 한 분밖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우리들 주변에서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조롱하고 회유하고 핍박하고 고난을 준다 해도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불가지론의 원칙이요 법칙이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겠노라고 수없이 결단해야 한다.
만약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제정이 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들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지게 될 것이다.
만약에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제정된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순교의 제물이 될 결단을 해야만 할 것이다.
④ 매일의 삶 속에서 감사드리며 하나님만을 사모하며 살겠다고 결단하라고 하신다.
언젠가 우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본향,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가 언제가 될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시면 “아멘, 감사합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면서 천국으로, 본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본향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우리들은 매일매일 숨을 쉬면서 살아가게 된다.
매일매일 숨을 쉬고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건져주시고 막아주시고 베풀어주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오직 하나님만을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서 올곧게 살아가리라고 결단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삼위 하나님 앞에서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사람이다.
결단하더라도 곧바로 와르르 무너지고 쓰러지는 것이 우리 인생들의 연약함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하여 와르르 무너지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매일매일 반복하며 결단하고 결단하고 결단하고 결단하고 결단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우리들 자신도 믿겨 지지 않을 정도로 변화되고, 성숙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꽃들도 쉽게 피었다 지는 것이 아니다.
한 송이 아름답고 향긋한 꽃을 피워내기 위해서 그 식물들은 1년 내내 수고한 대가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매일매일 작심삼일(作心三日)하는 심정으로 살면 된다.
계속 작심삼일하는 심정으로 살다 보면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으로, 신앙인의 삶으로 변화되어지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만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자의 반열에 포함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조금씩 조금씩,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님의 나라 곁으로 발걸음을 옮겨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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