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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며 즐거워하라 (욜2: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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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며 즐거워하라 (요엘 2:21-27)


오늘은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금년에는 감사할 조건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국가적으로도 세계적인 금융위기에서 우리나라가 제일먼저 탈출하여 금년에 잘하면 플러스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무역수지가 40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흑자규모입니다. 그리고 사상 처음으로 무역수지면에서 일본을 앞질렀다고 합니다. 저는 경제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어째든 예전에는 일본을 넘어선다는 것이 꿈만 같이 여겨졌는데 그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또


한 금년에는 22년 만에 태풍이 한 번도 상륙하지 않아 농산물이 풍년을 이루었습니다. 호죽교회 임 성기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호죽에서 평생 대를 이어 농사를 지어오신 


분들이 금년만큼 수확이 많았던 해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이 커다란 자연 재해를 겪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국가적인 축복이 우리의 축복입니다. 국가가 축복을 받지 못하면 개인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축복을 넘어서서 우리 대한민국에 베풀어주신 국가적인 


축복으로 인하여 먼저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그


대로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은 늘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항상 기뻐하


라’고 말씀하셨고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기뻐하며 즐


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기적이 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일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근심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만들어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키신 것이 첫 번째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사라져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십니다. 감사할 조건을 주십니다. 그러나 좋은 조건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모든 일들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언제든지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면 하나님은 환경이나 조건을 뛰어


넘은 삶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환경은 사실 그렇게 기뻐하며 즐거워할만한 좋은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요엘이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엄청난 자연재해를 겪었


습니다. 요엘서 1장을 보면 그 재앙을 말하고 있는데, 먼저 메뚜기 떼의 재앙입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4절) 여기에 나오는 곤충은 다 메뚜기의 종류를 말하고 있는데요, 메뚜기의 재앙이 몇 차례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의 재앙을 잘 이해


하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 전 무심천 자전거도로를 가다보니까 메뚜기를 잡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메뚜기는 예전에 좋은 간식거리였습니다. 없어서 못 먹을 정도의 


좋은 반찬거리였습니다. 그런 메뚜기가 떼로 몰려온다면 ‘어서 오너라. 환영한다.’ 하면서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메뚜기 떼의 재앙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 메뚜기들의 피해가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메뚜기가 나무란 나무는 다 갉아먹어서 나무마다 다 하얗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재앙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메뚜기 떼에 이어서 가뭄이 들었습니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들


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2:3) 이런 재앙의 참혹함이 얼마나 심했는지 요엘 선지자는 어렸을 때에 약혼한 자가 결혼 전에 죽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을 했는데 그 약혼자가 결혼 전에 죽는 것을 가장 가슴 아픈 일로 여겼습니다. 처녀들에게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없었습


니다. 요엘 선지자는 또한 여호와의 성전에서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을 합니다. 얼마나 곡식이 없고 포도주가 없는지 하나님께 제사드릴 것이 없는 상


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처참한 환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엘의 대답은 한 마디로 ‘여호와로 인하여’ 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은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비결이요 이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고백론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는 주후 396년에 히포의 주교가 되었고 그 전에는 5년 동안 설교를 전하는 장로로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40년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기독교계 


전체에서 하나님께 심취한 사람, 성경적이고 명쾌하며 설득력 있는 양떼의 목자, 마니교 도나투스 파 펠라기우스 등 당대의 주요한 교리적 위험에 맞선 믿음의 수호자로 유명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는 세상의 쾌락에 빠졌습니다. 결혼 전에 동거하여 아들까지 낳았던 패륜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가 있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은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쓴 책이기도 합니다. “오 나를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나의 주여 이제 당신이 나를 그토록 단단히 묶고 


있던 정욕의 족쇄와 이 세상 것들에 노예가 된 마음에서 나를 어떻게 해방시켜주셨는지를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고백하겠나이다.” 



그 고백론에는 이런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한때는 잃어버릴까봐 전전 긍긍했던, 그 무익한 쾌락들이 내게서 갑자기 다 사라지다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당신은 내게서 그 무익한 쾌락들을 몰아 내셨습니다. 참


된 최고의 기쁨이신 주님, 당신은 그러한 것들을 내게서 몰아내시고 그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혈과 육에는 기쁨이 되지 않으나, 어떤 기쁨보다 감미로우신 주님, 어떤 빛보


다 더 밝으나 우리 마음속의 어떤 비밀보다 더 깊은 곳에 감추어지신 주님, 자신을 영예롭게 여기는 자들의 눈에는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으나, 모든 영광보다 더 영광스러우


신 주님. 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빛, 나의 부요함, 나의 구원이시여.”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으니 무엇을 감사하겠습니까? 설령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원은 


전적으로 내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으로 누구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기독교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받을 자격이 없는 내가 거저 받았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


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


연히 감사하고 감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며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엘이 감사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근본은 여호와에게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먼저,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보면,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음이로다.”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일은 무엇입니까? 20절 말씀을 


보면 그 큰일은 메뚜기 떼가 물러가므로 재앙이 끝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


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여기에서 중요한 말은 '내가' 하는 주어입


니다. 자연적으로가 아니라 어떻게 하다보니까, 때가 되니까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서 메뚜기 떼를 쫓아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자연재해도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이고 그 재해를 물리치시는 것도 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


하여 많은 자연재해를 일으키셨습니다. 광야생활가운데서는 자연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금년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것이 이러한 자연재해를 하나님이 이 땅에 임하지 않도록 아예 멀리 물리치시고 쫓아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작년 올해 얼마나 많


은 자연재해가 지구촌 곳곳에 덮쳤습니까? 지진 해일 태풍 홍수 가뭄 등 세계를 강타한 재난은 끝 일 줄을 모르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상처는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


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을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태풍이 한 번도 이 땅에 올라오지 않도록 막아주셨습니다. 그 많은 재해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은 큰일을 행하셨고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많은 환난과 어려움을 주님이 막아주셨고 쫓아내


셨고 떠나게 하셨습니다. 신종 인풀루엔자를 하나님이 막아주셨습니다. 쫓아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주셨고 위험을 막아


주셨고 환난을 이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도 많지만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 많은 줄 믿습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


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지켜 주시고 어려움을 쫓아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큰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에게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


께 진정으로 감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


다만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는 생명과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비를 저장할 수도 없었습니다. 지하수를 팔수도 없는 때였습니다. 이러


한 때에 이른 비가 오고 늦은 비가 제때에 온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가뭄이 들었습니다. 모든 나무가 다 말라 비틀어졌


습니다. 대지가 바짝 말라버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걱정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비가 계속 올 것인가? 또 그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한번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은 늘 불안하고 안심을 하


지 못합니다. 건강을 잃거나 실패했다가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은 두려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지만 과연 내가 앞으로 사람구실을 하며 잘 살 수 있


을까? 그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예전과 같을 것이라. 예전과 같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계속적으로 내리게 하겠다는 것입니


다. 예전에 너를 지켜주고 사랑해주었던 그 모습으로 너를 사랑하고 너를 지켜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었으면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너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 주님이 약속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롬8:3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


을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음을 믿으시고 앞날에 대해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실 것입


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고 그 믿음가운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여호와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보상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절에서는 “내가 전에 너


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했습니다. 유다 백성을 괴롭힌 메뚜기 떼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였습니


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연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매를 대시기도 하시고 채찍질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런 채찍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때 주님은 우


리의 삶을 보상해주시고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때문에 고생하며 하나님 때문에 방황하고 하나님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그 모든 것을 갚아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


다. 내가 잘못하고 내가 실수하여 고통당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그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해주십니다. 그 세월을 보상받고도 남을 


축복을 허락해주십니다. 욥이 오래 동안 고통당하였지만 주님은 그 세월을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 축복해주셨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집을 떠나 방황했던 


그 세월을 다 보상해주셨습니다. 그 아픈 과거를 다 잊어버릴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 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2:13).



우리에게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손해를 다 보상받고도 남을 주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성도 여


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9년 추수감사주일에 여러분들에게 행하신 주님의 큰일을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었음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계속적인 축복이 임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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