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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을 갈망하며 (합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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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을 갈망하며/합 3:16-19


 


세계적으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산 되고 있습니다. 중국, 한국, 이탈리아, 이란에서 주로 일어나는 재난으로 알았는데 미국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님을 불과 두주 전부터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바이러스가 이렇게 빨리 퍼지고 미국까지 위협할 줄이야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국은 괜찮다고, 자기는 이 사건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수요일은 국가 재난의 날로 선포하더니 오늘을 국가 기도의 날로 토요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난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불평을 하고 염려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완화되지는 않습니다. 과연 성도로서 고통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잘 아시는 하박국서 3장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이 땅에 불의는 사라지지 않는가? 왜 죄가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을 허용하시는가? 악한 자들은 번영하는 것 같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시원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이미 2600여 년 전에 이러한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고 있습니다. 하박국이 활약하던 당시 북쪽의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이미 멸망을 당하였고, 남쪽의 유다도 바벨론의 위협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었습니다. 하박국이 볼 때 유다의 상황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율법을 받은 백성,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 받는 특권을 가진 유다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뿐 더러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부패, 폭력, 탐욕, 불의가 온 나라에 만연합니다. 선지자들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도무지 하나님께 돌이킬 줄 모릅니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어찌하여” 하는 단어들이 하박국의 안타까운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박국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통을 받는 자들, 그로 인하여 사랑하는 자들을 떠나보내 안타까워하는 자들, 불황의 여파로 힘들어하는 자들을 본다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하나님, 이들을 보세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영적으로 얼마나 힘들어합니까?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찌하여 이런 역병을 용납하십니까? 그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습니까? 하면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을 보시고도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 같아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계시가 하박국에게 임합니다. 너희 생전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하겠다. 아마 내가 말을 해도 유다 백성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갈대아 백성들을 도구로 삼아 유다를 징벌하겠다는 겁니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살육을 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박국은 다시 한 번 놀랍니다. 그가 놀란 것은 하나님의 심판 자체가 아니라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아니 많고 많은 민족들 중에 하필이면 바벨론입니까?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였나이다. 인정합니다.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갈대아인들을 사용하신다구요?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악을 행하는 아주 악한 민족입니다. 사람 잡는 것을 마치 그물로 잡듯 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자기 신에게 제사하고 분향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민족이 다른 악한 민족에게 짓밟히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항변이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그들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되기에 하박국이 이의를 제기하지만 사실 하나님 앞에는 큰 죄나 작은 죄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다 미워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가지고 이해가 안 되어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과연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던질 때도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에 안타까워하면서 하박국은 성루에 서서 기도하며 묵상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박국에게 임합니다. 오늘날도 많이 인용하고 암송하는 구절들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

의인은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유다를 징벌하기 위한 도구로 자신들이 사용된 것을 모르고 자신들의 군사력이 강해서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고 다른 나라를 괴롭히며 착취한 물건으로 자신의 영광을 세우지만 하나님은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한 갈대아를 징벌하실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만이 구원받게 됩니다. 믿으면 삽니다.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아무리 눈앞에 캄캄한 일이 벌어져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2:14)

유다의 죄악을 인하여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박국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멸망이 하나님 나라의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은 불타고 성벽은 무너지는 엄청난 시련이 닥치겠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운 것들은 안개나 이슬과 같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악인이 잠시 득세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에 가득할 것입니다. 이 약속은 포로 귀환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서 실현이 됩니다.

“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니라” (2:20)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결코 모르거나 무관심한 분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만물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하여 알지 못한 채 함부로 불평하는 자들은 입을 다물고 겸손히 그 앞에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봅니다. 머지않아 예루살렘은 폐허가 될 것이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솟아날 것을 바라봅니다. 하박국은 이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붙들고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깊어지면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합니다. 불평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바뀌고, 염려와 불안이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소망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왜, 어찌하여”하며 질문으로 시작했던 하박국의 기도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끝을 맺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회복을 갈망하는 기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지금 우리들이 붙들어야 할 기도의 본을 제시합니다.

 

1) 분노 중에도 자비를 베푸소서

3:2절에서 하박국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고 합니다. 소문은 직역하면 ‘들은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유다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갈대아인이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겁니다. 자기 나라가 망한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충격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말씀 속에 담겨진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여기서 ‘부흥’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revival입니다. ‘새로이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망하겠지만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셔서 과거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되찾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은 주의 뜻대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굳이 기도해야 합니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유다가 폐허가 되고 멸망하게 된 것이 기도하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먼저 유다를 위해 기도합니다. 유다가 멸망은 당하겠으나 멸망 이후 일어날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흥’이란 단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꿈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기에 좋으셨다’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에 ‘보기에 심히 좋으셨다’라고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정, 교회를 보시면서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살고 있구나, 보기에 좋구나 하는 말씀을 하기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부흥을 갈망해야 합니다. 회복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는 동안 자기 민족의 죄악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향해 진노의 채찍을 드셨다면 한 가지만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유다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갈대아인들이 와서 유다를 칠 텐데 진노 중에라도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를 드릴 때 우리가 하나님께 자기의 의를 내세우겠습니까? 자기가 한 일을 내세우겠습니까?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 자기의 한계, 자기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그저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마침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기는 선행으로 가득한 자로 착각합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죄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의식한 위선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특히 자기 옆에 있는 세리가 아닌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 못하고 땅만 보고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면서 단순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합니다. 주님은 실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입니다. 주여 저를 회복시켜 주소서. 주님을 향하여 가졌던 첫 사랑을 회복하게 하소서. 열정을 회복하게 하소서, 더 나아가서 저의 가정을 회복시켜 주소서. 부부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관계를 회복시켜 주소서. 우리 교회를 회복시켜 주소서. 평안의 하나 되는 띠로 묶어 주소서. 미국 사회가 다시 한 번 청교도 정신으로 회복하게 하소서. 고난의 길을 간다할지라도 그분을 믿고 나아가면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박국과 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해야 합니다. 보혈의 은총은 여호와의 날에 우리를 여호와의 진노하심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게 하소서

악인의 행위를 가만히 보고만 계시지 아니하시고, 주의 백성의 고통당하는 것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친히 나서겠다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박국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떨리며 내 뼈가 썩는 것 같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기도라. 시기오놋은 템포가 빠른 곡조를 말합니다. 박자가 빨라서 강력한 느낌을 주는데 다가올 심판을 바라보는 하박국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한편으로는 엄청난 시련으로 인하여 가슴이 뛰고 다른 한편으로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흥분된 마음을 나타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외적인 상황은 여전히 험악합니다. 불의와 불법이 여전히 횡행합니다. 장차 유다에게 임할 환난을 인하여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기도하는 가운데 깊이 생각하여 보니 하나님께서 아직도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박국의 놀라운 고백이 이어집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꽃이 피지 않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으며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나지 않고 밭에서 농작물이 나지 않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 되시므로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 무화과, 포도, 감람나무, 곡식 등 농작물이 열리지 않고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소들이 모조리 약탈을 하여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복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고 소망이시고 능력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있을 때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음을 하박국은 보여줍니다. 진정한 기쁨의 근원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3) 나를 높은 곳에 다니게 하소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나를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라.” 

하박국 1장은 골짜기에서 시작됩니다. 어둠의 골짜기, 탄식의 골짜기, 아픔의 골짜기를 헤매면서 하박국은 계속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 민족에게 이런 어려움과 고통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마치 골짜기를 헤매는 사슴의 비명소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슴은 위험을 알아차리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날렵한 발을 이용하여 뛰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비명을 질렀지만 어느 새 날렵한 발로 저 높은 언덕에 서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협하던 그 골짜기를 유유히 내려다보고 있는 사슴의 이미지를 상상하여 보세요.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복음 승리, 기도 승리, 회개 승리의 역설적 은총의 기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작년에 성도들이 가장 많이 붙든 말씀이 빌 4:6-7이라고 합니다. 그 만큼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작년 이상으로 힘들 것 같으니 가장 많이 암송하는 성구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성도들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다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염려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나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니 마음이 갈팡질팡하여 걱정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염려는 하나님과 관계를 반영합니다. 성도들에게도 염려하는 마음이 안 생길 수는 없으나 계속하여 염려하는 것은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염려는 성도들이 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6:25)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 염려가 없을 수 없으나 염려하느라 마음을 빼앗기면 평강이 없습니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염려 대신에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기도/간구/구하는 것 등 비슷한 단어를 세 번이나 나열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자기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찾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험난한 세상에 피난처가 되십니다. 광야 같은 인생에 장막이 되십니다. 기도는 성도들에게 최선의 방책이기에 염려하기 전에 주님께 먼저 나아와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오면 거기에 위로와 평안과 치료와 안식이 있습니다. 한편 성도들의 기도는 조급함과 불평의 마음이 아닌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자기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도록 의탁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감사함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려는 염려와 불안을 몰아내시고, 대신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미국에도 크게 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주간, 세 주간 학교를 쉬고 재택근무를 하면 잠잠해질까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제자들의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십니다.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우리도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문제는 계속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련을 극복하는 우리의 믿음이요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고난이 임할 때 하박국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박국은 기도한 결과 기쁨을 회복하였고, 모든 시련을 뚫고 지나갈 만한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꼭대기에 다니게 하신다 즉 승리를 맛보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기뻐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을 경험한 다윗도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고백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9).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험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여전히 붙들면서 도리어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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