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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선한 것 (미6:6-8)

본문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선한 것(미6:6-8)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이를 벗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에 이 말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는 말은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의도가 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갇힌 것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는 다소 의외의 말을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감옥에 갇히면 복음전파에 마이너스가 되면 되었지 어떻게 진전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반문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사도 바울은 3가지 이유를 들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고 전하기 어려운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동역자들이 나를 대신하여 예전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동역자들 뿐 아니라 반대자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겉 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의 의도가 결코 자신에게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를 강화하고 자기의 어떤 유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나 특히 목회자들이 교회의 부흥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를 할 때에 때때로 그 의도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어 자신이 유명해지고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의 자존심이 높아지는 그 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를 합니다.


그런 의도를 갖고 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존귀하게 되시기 위해 나는 죽어도 괜찮고 살아도 괜찮다는 자세로 일할 때,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는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숨겨진 의도가 나타난 모습보다 훨씬 더 중요한 줄 믿습니다.


 


두 번째가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계시하신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창작하고 내가 고안한 방법으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의 성인 예루살렘으로 올리고자 할 때 그는 3만 명의 군중들을 동원했습니다.


말이 3만 명이지 얼마나 많은 인원입니까?


새로운 수레를 아름답게 만들어서 거기에 궤를 실고 그 앞에서 여러 가지 악기를 총동원하여 장엄한 연주를 했습니다.


지금 상상해보아도 다윗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궤를 모시려고 했던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궤는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하는데 다윗은 새 수레를 만들어 운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이 아니라 자신이 창작하고 고안한 방법으로 운반했습니다.


그 결과는 제사장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는 불상사로 이어졌고 궤를 옮기려는 계획은 전격적으로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내 방법일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잘 믿는 길은 내가 창작하여 내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계시하신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도 내 방법대로 하면 그것은 주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계시하신 방법대로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는, 내가 편하고 내 마음에 맞는 것으로 다른 것을 대체하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면서 ‘각종 십일조는 잘 드리면서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도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러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를 잘 드리니까 나는 되었다가 아니라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에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다른 것을 대체하고 이 일을 행했기에 다른 것은 안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성도들이 나는 이것을 잘 하니까 저것은 잘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는데요,


어떤 사람은 나는 봉사를 잘 하니까 십일조는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나는 십일조를 많이 하니까 봉사는 그것으로 대체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고 큰 악을 행하게 되는지를 오늘 본문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 나라에서 활동했던 미가 선지자의 말씀입니다만 이 말씀 속에서 당시 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잘 한 모습이 6,7절에 보여 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일 년 된 송아지를 번제물로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일 년 된 송아지는 번제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가장 좋은 제물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또한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기름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풍성함을 과장법을 써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는 내 허물을 위하여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했습니다.


이러한 인신제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닌 이방종교에서 유래된 아주 잘못된 모습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허물을 속죄받기 위하여 맏아들을 드리는 헌신까지 불사하겠다는 뜻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얼마나 갸륵한 생각입니까?


당시의 백성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에 힘썼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좋아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전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미가 선지자의 책망의 말씀을 보면 그들은 정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인자를 사랑하지 아니하였고 겸손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과 함께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냐?’


‘다른 것은 조금 못해도 괜찮지 않겠나?’


‘이만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지 모릅니다.


미가서 2장에 보면, 선지자가 책망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침상에서 죄를 꾀하고 악을 꾸미며 날이 밝으면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외치면서 ‘그들이 밭을 빼앗고 집을 탐하며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했습니다.


3장에서는 통치자들을 책망하면서,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먹으며 그 뼈를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악을 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만 드리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바로 이런 엄청난 죄를 짓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생각이 잘못되니까 삶이 잘못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별 죄책감도 없이 행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 경건한 선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개인적으로 한 시간 이상씩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했고, 저녁에는 선원들 중에 신자를 모아서 선상에서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떤 선원들은, 기항지에 이르면, 의례 습관처럼 해오던 관례대로 거리낌 없이 어울려 사창가로 가곤 했지만 이 경건한 선장은 그런 선원들과 어울리지 않고 선장실에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장난 끼 있는 선원이 아주 요염한 매춘부를 선장실에 들여보냈지만 선장은 호통을 쳐서 내 보낼 정도로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배가 아프리카의 노예를 잡아서 미국에 파는 배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남의 나라, 남의 일 만은 아닙니다.


언젠가 큰돈을 횡령하는 금융 사고를 저지른 은행 간부가 체포되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자기 월급뿐만 아니라 횡령해서 얻은 돈까지도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돈을 만지지 않아야 그것이 옳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선상에서 경건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노예를 잡아 파는 더 큰 죄악을 범하지 않아야 그것이 옳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은 내 중심으로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바라시는 뜻을 깨닫고 그것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선한 것,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먼저는,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정의를 행하며’ 정의를 행하는 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선한 것입니다.


이 ‘정의’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서 이 사회 속에서 ‘옳은 것을 실천하고 그른 것을 반대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가 선지자 시절에 이 정의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는 충실했는지 모르지만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는 소홀하였습니다.


그 결과 힘이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착취합니다.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잘못된 재판을 합니다.


제사장들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고 이 나라가 안전할 것이라는 헛된 말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 성도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공의롭게 하나님 앞에 범죄 하지 않고 정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삶이 어디에서 무너지느냐 하면 돈 앞에서, 내 눈에 보이는 이익 앞에서 무너집니다.


내 이익을 위하여 잠시 눈을 감거나 잠시 모른 체 하거나 잠시 신앙을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이익을 위하여 내 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하시고 보여주신 선한 것에 충실하여 정의를 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정의를 행하는 삶에 이어서 하나님이 보이신 선한 것은 인자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이것은 사랑, 긍휼이라는 뜻으로서 인자를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정의가 살아있어야 그 사회가 공평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평한 사회가 된다고 꼭 행복하고 살맛나는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서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정의가 있으되 사랑이 함께 있을 때 행복한 삶이 구현되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몇 번 예화로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미국의 뉴욕 시장까지 지낸 라과디아가 판사로 있을 때 빵을 훔치려다가 붙잡혀 온 노인을 즉결 재판하게 됩니다.


빵 가게를 지나다 너무 배가 고파서 나도 모르게 빵을 훔쳤다는 안타까운 노인을 향해 판사는 말합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당신의 죄는 벌금형에 해당됨으로 벌금 10불을 언도합니다.’


그러면서 라과디아는 그 벌금을 자신이 내겠다고 하면서 이 노인을 사랑하지 못하고 돌보지 못한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정죄하기만 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 죄인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의가 필요하지만 그 위에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주님 중심의 신앙생활, 주님이 제시하신 선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고 바라시는 아름다운 신앙은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 되심과 우리가 주의 종이 됨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창조주이심과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겸손이고 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알파와 오메가가 겸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 속에도 미가 시대의 백성들처럼 내 마음대로 내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취하면서 내 이익을 위하여 내 마음대로 말씀을 해석하고 그것이 옳은 양 고집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한 편으로는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엉뚱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내 중심의 신앙생활을 버리고 주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보이신 선한 것을 기억하고 주님이 구하시는 옳은 것을 분별하여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2020.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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