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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20: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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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17-38)


올해 2020년은 종교개혁 503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기독교가 갈라지게 되었고, 거기에 기독교, Protestant가 탄생합니다. 16세기 1517년 10. 31. 종교개혁은 교회와 함께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개혁의 물결은 한 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 안에 개인과 공동체 속에 새로운 부흥과 개혁, 변화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인가를 기념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난 일들에 대한 회상과 그것을 재연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기념은 그 시대정신을 기리고 오늘에 적용하여 새로운 변화와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결단과 실천과 출발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습니까?


코로나19의 어려움 가운데 많은 교회와 많은 신앙인들 때문에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척박한 환경은 앞으로가 더욱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케 해야되나요? 새로운 변화와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그래서 말씀대로 살자, 말씀대로 은혜를 받고 복을 받자!!! 말씀대로 유업을 이어가자 라는 모토가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종교개혁 503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교회가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할까요?



종교개혁의 모토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변화와 개혁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 대자보를 비텐베르그 성당의 정문 벽에 붙여놓았습니다. 이유는 당시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고, 당시에 말씀에 바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고, 부패한 교회의 상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러니까? 부패한 교회와 함께 신앙의 삶이, 신앙의 기준이, 신앙을 바로 세우는 정신이 성경에 맞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전통과 관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에 없는 부분을 정당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출발한 종교개혁이 당시의 교회를 바꾸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시 로마의 교황청과 교황과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 거리낌이 없이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하여 많은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 돈을 마련하는 방법의 하나가 면죄부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제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고해성사를 받은 사제가 그 당사자의 죄를 벗겨주는 선행이나 고행을 하기 위한 과제를 주는데 그것이 선행과 봉사와 헌신과 속죄 제물입니다. 특별히 속죄재물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속죄재물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속죄라는 명목으로 구원을 위해서 물질을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참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교리적으로 누구든지 세례를 받았으면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괴롬과 고통이 많은 연옥으로 가게 된다고 현혹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옥에 대한 공포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 까지 값비싼 면죄부를 구입했습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될까요? 말씀을 모르니까? 권위에 눌려서, 교회법에 기초해서 순종을 했는데 이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신앙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패에 대한 항의로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인 이 95개 항의 질의서를 게시판에 붙였습니다.


당시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겠다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단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변화를 요구하고 고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 것이 마르틴 루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 모두가 다 여기에 공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용기와 힘을 얻은 마르틴 루터가 교권주의 속에서 극도의 타락한 중세 가톨릭교회와 종교인에게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그 것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입니다.


기독교 본질과 회복운동입니다. 이 것이 중세의 종교개혁의 본질이고 출발입니다.



그렇다면, 503년이 되었는데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 종교개혁이 필요한 상황입니까? 아니면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이루어진 개혁이 잘 지켜지고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교회를 보호하시고 강하고 크신 오른팔로 이끌어 오신 주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묵묵히 주의 일을 함께 감당하신 교우들 모두에게 축복을 전 합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왔고, 주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복음을 이어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교우들을 통하여 때마다 복음의 역사를 이루시고, 중요한 시기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여러 위기도 있었고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이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비교가 되고 선뜻 수용하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이런 힘든 일들을 통해서 순종과 복음 전파를 위한 섬김과 가르침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의 상황에서 맞이하는 종교개혁503년, 우리교회 주일 예배에 다시 한 번 바로 세워지고 다시 한 번 주실 은혜와 복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고자하는 기업을 이어가는 그런 일을 감당하며 주의 나라가 우리교회를 통해서, 여러분을 통해서 견고히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것이 주님께서 오늘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에게 요구하시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오늘 본문의 바울은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도중 밀레도에서 바울이 3년 동안 사역하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놓고 당부를 하고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말씀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결박과 환란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에베소 장로들에게 남기는데 이 말씀은 모든 믿음의 일꾼들을 향하여 던진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던졌습니다. 부르신 소명에 따라 소명의 사람으로 몸부림을 치며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무엇으로 기업을 이어가게 했나요? 겸손으로 기업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눈물로 기업이 있게 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기업이 있게 했고, 말씀을 가르침으로 주님과 교우들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31절에 삼년을 밤낮 쉬지 않고 훈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NIV 성경은 훈계를 warning 으로 기록합니다. 워닝은 경고인데, 말씀의 경고입니다. 20절에도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그런데 바울이 전하여 가르친 핵심 내용은 21절에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NIV 성경을 보면 20절에 바울이 전한 것은 preach로, 가르치는 것은 teach로, 21절에 증언하는 것은 declare로, 31절의 훈계는 warning으로 표현을 합니다. 이 모든 단어들의 공통점은 입을 열어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주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프리칭을 했고 티칭을 했고 디클레어를 했고, 워닝을 했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믿음을 더하고 주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지도록 수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때는 설교로, 어느 때는 훈계로, 어느 때는 대중연설과 어느 때는 경고까지 하면서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미 초대교회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허다한 무리가 우리가 어떻게 할꼬?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허다한 무리가 더하여 졌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이 장로들을 가르치는데 중요한 모토를 말합니다. 그 모토가 무엇이었나요? 무엇으로 기업을 이어가게 하나요? 3가지입니다.



1. 자기피로 사신 교회를 통해서 기업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자기피로 사신 교회가 모토입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부탁하고 가르쳤습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피로서 교회를 사시고, 양육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오직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출 34:25) 너는 내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희생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내 희생의 피, 하나님의 피는 유월절 희생의 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 예수님으로 인카네이션 하셔서 유월절의 양으로 희생이 되셨습니다.


(고전 5:7)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희생이 되셨으므로.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양으로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진리가 무엇일까요?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포도주)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포도주를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희생의 피는 유월절 희생의 피 이고, 유월절 희생의 피는 새 언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는 반드시 유월절 떡과 포도주로 새 언약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의 피를 의미하는 유월절의 진리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고전 10:16) 우리가 축복 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통하여 우리들을 죄에서 구속하여 주시고,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한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의 진리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피로서 세워주신 진리입니다. 피는 원죄와 자범죄를 속죄시키기 때문에 이 것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 또한 주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교회를 church라고 합니다. church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교회당과 예배당과 건물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람이 지은 건물을 자기 피로 사신 몸과 교회로 여기실까요? 여러분, 예배당이라는 건물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과 헬라인과 일본 사람과 한국사람 사람이, 모두 인격체인데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건물입니까?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전이 무엇이며, 회당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교회는 종탑이 있고 십자가가 달린 그 어떤 건물이 아니고 인격체입니다. 그래서 헬라어는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의 참뜻이 무엇일까요?



(벧전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문안한다고 했는데 건물이 문안합니까? (몬 1:2)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여러분, 교회의 교인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면 될 것 인데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합니다. 그러니까? 아킵보와 그의 집안에 머물러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안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성도들끼리 서로 문안을 하였습니다. 이 것을 교회에게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2가지로 나타납니다.



(행 14: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교회를 모아라는 표현입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목자가 양을 치듯이 인도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를 모아라는 표현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모임과 집회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영혼의 주인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모임과 예배가 교회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교회의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행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 라.


(행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또 하나는 인격체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 고별설교를 하는 바울도 인격체고, 장로도 인격체입니다, 교회도 인격체로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입니다. 교회를 굳게 하는 것은 바울과 실라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행 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고린도 교회는 더욱 확실하게 표현을 합니다.



(고전 1:1-3)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러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입니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피로 사신 교회의 한 구성원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인 저와 여러분이 기업으로 복을 받고, 기업을 이어가는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오늘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 것을 가르치고 경고하고 선언하고 선포를 합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32절, 말씀이 너희로 능히 든든히 세우고,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에게 기업이 있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는 이 귀한 날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직접 말씀으로 든든히 바로 세워지고, 그리고 거룩함을 입은 주님의 사람으로서 주신복과 기업을 이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으로 기업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합니다. 내 자신 혼자만 그리스도의 몸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괜히 신앙생활을 잘하고 괜히 열심을 내고 괜히 주의 뜻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기업을 이어가려면 그리스도의 몸을 바로 세워야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어떤 몸입니까? 여러분,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고 무슨 능력과 권세가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29-30절, 내가 떠남 이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 날줄을 내가 아노니. 바울은 2가지를 장로에게 경고, 워닝합니다.


그런데 하나는 외부로부터 흉악한 이리가 들어오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지 못하게 합니다. 악한 사탄 마귀와 거짓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기업을 받지도 못하고 기업을 이어가지도 못하게 합니다.


또 하나는 내부의 문제입니다.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지고 다른 말을 왜곡해서 교회인 피로사신 구성원들을 현혹입니다. 그래서 받아야 할 기업을 받지 못하게 하고, 이어 갈 기업이 없게 합니다. 여러분, 무엇이든지 내부의 문제나 외부의 문제가 항상 있습니다. 내, 외부의 문제는 가까이 다가오고 있고 또한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무한한 능력의 방편입니다. 그래서 32절에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합니다. 그런데 무한한 능력의 방편도 행정적인 것에서 무너지면 아니 됩니다. 성령이 감독자로 삼고 교회를 치게 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것, 이 것이 바로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에클레시아 입니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값을 치루고 산 사람들이고, 생명으로 값을 대신 했습니다. 사다는 뜻은 주고받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획득하셨고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의 자격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면 이 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엡 4:11-12)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자와 교사로서의 존재입니다. 이렇게 여러 직분과 달란트가 있는 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 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왜 이런 존재로 주님께서 소유하시고 획득하셨을까요? 모두가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기업을 이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의 목양은 주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그 섬김과 가르침과 경고는 교회에 세우신 저와 여러분, 직분 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하라는 것은 그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직분에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와 권사와 집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말씀으로 서로 섬기는 직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복음을 위하여 서로가 서로의 종 됨이 나타나야 합니다. 형제를 그리스도의 몸처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진리의 증거와 나눔으로 활동하는 것을 은사로서 섬김과 봉사라고 합니다. 모든 직분 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가 없는 교회는 직분도 없고 봉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은 무엇이든 주께 받은 것처럼 해야 합니다. 모든 직분은 교회의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사인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필요한 직분입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님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로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로서 존재이유와 방향성과 표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그 경계선이 바로 언약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밀레도를 떠나기 전에 장로들을 불러놓고 자기를 위하여 또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면서 그 말씀이 능히 든든한 거룩한 교회로 서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 거룩한 교회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항상 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감독과 섬김에도 불구하고 거짓교사와 삯군들의 훼방은 세상 끝 날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는 은혜의 말씀의 능력이 그들을 거룩한 교회로 이끌어 갑니다. 아무리 마귀가 사자처럼 삼키려고 날뛰어도 손도 대지 못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증거 하는 교회로서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와 본분을 가졌습니다. 주님으로 부족함이 없는 교회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 부딛쳐도 무너질 수 없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히 세워지고 이 사람들이 주님의 기업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려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요? 바울은 장로들에게 감독자가 되라고 합니다. 비솝입니다. 그러면 비솝, 감독자는 무엇을 합니까? over seer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역입니다. 오버 씨어는 외부로부터 위협이 있는지, 외부로부터 틈을 노리는 그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보호하는 사역입니다. 그리고 내부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이 것이 비숍의 역할이고 감독자의 역할입니다. 양 떼를 지키고 먹이는 비숍이고, 감독자의 역할입니다. 바울은 성령이, 주님이, 여러분들을 감독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감독자로서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한 가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우신 계획대로 이 세상과 인류를 돌아보시며 섭리하십니다. 때때로 역사는 어느 강대한 국가가 움직여가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강대국의 지도자가 자기 마음대로 역사를 주관하는 것 같이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환경이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코로나19를 보면서 하나님이 역사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느냐고 의심이 들어갈 때도, 절망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가운데 역사를 움직여 가시고 이끌어 가시고 완성해 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감독자가 되신 여러분이 코로나19의 환경 속에 있는 공동체와 교회와 사업장과 삶의 현장에서 내부와 외부를 살피고 보호하며, 책임을 지시는 그래서 주의 기업이 있게 하시고 놀라운 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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