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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할지어다 (합2: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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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할지어다(하박국 2:15-20절)


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는 것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한 일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올바르게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아야 올바른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할 때 그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이 목자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뒷날 사도 요한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의 선하신 목자로서 양을 가장 잘 알 뿐만 아니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시는 분이라고 말씀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가 시편 23편 4절에 그대로 묻어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이 그로 하여금 요동하지 않고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으로서 창세전에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에 따라 이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되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대화할 수 있는 너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향하여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양육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요한 계시록에 성도의 기도가 향연이 되어 올라가고 이 땅에 극심한 심판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성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들을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된 갈대아 사람들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거역하는 삶을 살 때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를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의 극심한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서 성도들이 소망을 잃지 않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망의 말씀을 곳곳에 배치해 두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소망의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소망을 잃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할 그날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망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주님이십니다. 이제 그 하나님이 교만한 갈대아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올바르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2. 이웃의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15-17절)


네 번째 “화 있을진저!”는 갈대아 사람들의 정복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되었지만 교만해 졌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15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서 그로 취케하고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입니다. 상당히 상징적인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이웃”은 전후 문맥으로 볼 때 갈대아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열국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은 술이 패망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열국을 정복하는 바벨론의 정복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패망케 하는 방법이 “분노를 더하여서”입니다. 이 말은 “독액을 섞어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정복해 나갔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결국 열국들로 하여금 하체가 드러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전쟁에 패배한 국가로서 말할 수 없는 곤욕과 부끄러움을 당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재산도 백성도 힘도 다 빼앗기고 오직 남은 것은 가난과 학대와 굶주림과 부끄러움뿐이게 된 상태가 하체를 드러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렘51:7절에는 바벨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그런데 이러한 열국에 대한 그들의 잔인한 행위가 17절에는 레바논으로 좁아지고 있습니다. 17절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15절에 대한 해설처럼 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레바논은 북에서부터 가나안을 공격해 들어오는 관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레바논은 팔레스틴 전체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전체 지역을 상징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스라엘에게 강포를 행했다고 했습니다. 짐승을 두렵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짐승은 레바논이 유다를 상징한 것처럼 유다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피를 흘리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갈대아, 즉 바벨론의 정복 전쟁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권모술수로 열국에 강포를 행한 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갈대아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네게로 돌아오리라”입니다. 16절과 17절이 모두 네게로 돌아오리라고 말씀합니다. 행한 대로 보응 받는 것이 그들에게 임할 화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교만하여 강포를 행하는 자들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들에게 심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게로 돌아오리라”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는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행한 강포가 그들에게 증거가 되어 그들에게 그대로 돌아가는 날이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싫어하십니까? 교만하여 과도한 욕심을 행하며 강포를 행하는 자들을 싫어하십니다. 그들의 그런 잘못된 삶이 그들에게 돌아가게 만드십니다.



3. 화 있을진저 우상 숭배에 빠진 자들아!(18-20절)


다섯 번째 화 있을진저는 무엇입니까?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입니다. 이 마지막 화 있을진저는 6-17절에 이어지는 네 가지 화 있을진저에 대한 결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와는 달리 심판의 선언이 없고 주로 우상들이 가진 거짓되고 헛된 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상은 무생물인 돌, 나무, 금속 등으로 사람이 만든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생명력도 없습니다. 시135:15-17절을 보십시오.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그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것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합니다. 왕상18:22-29절에는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인의 결전이 나옵니다. 그때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득한 과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상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롬1: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러한 것들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즉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단락이 앞의 모든 화에 대한 결론 부분인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욕심과 교만 높은데 깃들이려 하는 것,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읍을 건축하는 것, 권모술수를 의지하여서 살아가는 것들 모두가 우상 숭배로 연결될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러한 것들을 올려놓음으로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결론은 “화 있을진저”였습니다. 교만과 우상숭배는 연결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결국 하는 행동은 우상을 신으로 숭배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교만한 인간들의 우상숭배를 아주 싫어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상은 자리바꿈입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것으로 자리를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리바꿈을 끔찍하게 싫어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다른 신들의 하나로 끌어내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4.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그러면서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잠잠할 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적어도 이 한 구절은 2장 전체를 받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성전이란 지상의 성전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하늘의 보좌가 있는 곳을 일컫는 말입니다(시11:4).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은 온 세상을 감찰하시며 통치하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갈지라도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떠한 일을 할지라도 ‘그 앞에서 잠잠’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잠잠하다는 말은 “쉬!”와 같은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늘의 처소에 계시니 바벨론을 포함한 온 천하는 쉬! 잠잠 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침묵으로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 있는 우상 숭배의 덧없음과 대조를 이루면서 소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인간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그것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다는 사실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잠하라는 것은 불평과 회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니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반면 교만하여 높아진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온 천하를 다스리시니 잠잠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박국 선지자와 그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지금도 통치하고 있으니 믿음을 가지고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평강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잠잠하라는 말씀은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믿으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세상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움직인다고 해서 이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서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파수하는 곳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하박국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이 기다리고 바라보아야 할 것에 대해서 답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장 전체는 4절의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대조가 전체로 확산되어 있습니다. 음부처럼 욕심을 내는 자들과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아지려는 자들, 피로 읍을 건설하는 자들,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자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우상 숭배에 빠진 자들에게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이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로입니다. 그들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이것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나라가 연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그 나라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실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득세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사십니까? 현실의 벽이 너무나 높고 힘들어서 날마다 그것과 싸우느라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의 영광과 소망이 주는 기쁨을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저 매일 매일 부도를 막기 위해서 급급하다 보니까 하늘의 영광도 소망도 다 부질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저 날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는 직장을 생각하다보니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지시지는 않습니까? 그저 매일매일 생계를 위해서 마음을 쓰다 보니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배부른 사람들의 허영쯤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함께 찬양합시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 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죽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손을 견고하게 붙잡고 계십니다. 비록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처럼 느껴지신다고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를 즐거워 하십니다. 힘을 내십시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 땅의 영광과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십시다. 그리고 이기시기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감사의 외침을 발했던 하박국과 같이 기쁨과 감사의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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