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복 있는 성도 (계1:1-3)

본문

복 있는 성도 (계 1:1-3)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3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복 있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3절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의 내용은 이러 이러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라 복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복이 있는지 상고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죽기는 죽는데 주 밖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죽게 되어 있음에도 주 밖으로 나가서 살아 남으려는 사람이 있고 기어이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하여 굉장한 핍박을 받고 있을 때의 기록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붙잡혔을 때 끝까지 "예수를 믿겠다"라고 하면 가차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 오다가 붙잡혀서 예수 안에서 죽게 되었을 때 "나는 예수 안 믿겠오"하고 예수 밖으로 뛰쳐나가면 살아납니다. 예수 밖에서 사는 것보다는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이 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번째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을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똑같이 죽습니다. 주님이 공중으로 재림하시는 날에는 먼저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부활을 합니다. 이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다시 살아 들림 받고 공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혼인잔치를 합니다. 그러다가 혼인잔치가 끝나면 지상 재림을 하십니다. 그 때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때는 백보좌 심판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흰보좌를 베풀고 심판 할 때 그 앞에서 심판을 받기 위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옥에 갑니다. 이것을 두번째 부활 또는 사망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첫번째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요, 두번째 부활은 사망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 즉 첫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세번째로 요한계시록 22장 7절에서 '이 책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똑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보다, 듣는 자보다,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말씀에 약속된 온갖 축복은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키는 자가 복되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는데 어떤 복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계시의 복 (1)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처음에 기독교의 중심이 예루살렘이었다가 안디옥교회로 옮겨지고 안디옥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계선교를 합니다. 그러다가 사도들이 다 죽고 사도요한만 살아남았을 때 사도요한이 에베소교회를 시무하면서 에베소교회가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중심이 됩니다. 이 때는 로마정부가 굉장히 기독교를 박해 할 때인지라 에베소교회 감독인 사도요한을 밧모 섬으로 정배를 보냅니다. 밧모 섬의 사도요한은 주일이 되어서 예배를 드릴 에베소교회 교인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갈 수가 없기 까닭에 밧모 섬 돌 바위틈에 엎드려 기도하는 중에 하늘이 열리면서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장 1절부터 시작해서 22장까지에 있는 내용이 전부 이 내용입니다. 계시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큰복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따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가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서 숨겨진 바가 되었습니다. 숨겨진 하나님을 사람이 어떻게 찾겠습니까? 일반 종교에서는 숨겨진 하나님을 찾다 보니 귀신을 찾아 놓고는 '여기 하나님이 있다'라고 하며 섬깁니다. 이것이 일반 종교입니다. 그 귀신이 하나님 일 수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참 불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계시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하나님이다"하고 숨겼던 자신을 열어서 보여 주시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정확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자연계시입니다. 자연 만물이 우연히 생겼습니까? 분명히 만드신 분이 있고, 만드신 분의 솜씨를 보게 되고, 만드신 분의 뜻이 있습니다. 주전자 하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 주전자는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고, 사람의 뜻과 목적이 있고 재간이 있는 것입니다. 주전자를 보면 헤아려서 주전자를 만든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겠다, 이런 목적으로 만들었겠다 상상을 해 보지 않습니까? 이처럼 자연을 보고 하나님을 헤아려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을 보고 하나님을 헤아린다고 하는 것은 극히 제한된 일입니다. 자연을 본다고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즉 속죄의 복음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 재림이라고 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자연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정확히 보여 줄 수 없으므로 특별히 보여주는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둘째가 특별계시입니다. 곧 하나님을 특별히 계시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를 들면 빌립이 "주님, 하나님을 좀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한달, 두달이냐? 지금까지 일년, 이년을 지내오면서 무엇을 보고 있었느냐?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그 때서야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었고 심오한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구나. 예수님의 그 말씀 한마디에 대 자연이 순종하는 그 어마 어마한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예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축복이 하나님의 축복이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를 보고 하나님을 믿었기에 제자들은 정확하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타나서 하나님임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믿음이 정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믿음은 사도적인 믿음이어야 합니다. 교회도 사도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계시를 정확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계시가 이만큼 성도들에게는 복이 됩니다.



특별계시 중에 객관적인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보고, 예수님께 직접 배우고 하나님을 믿었으니 정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봤습니까? 못 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 가정 담벽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사진은 전부 가짜가 아닙니까? 그 사진을 무엇하러 걸어 놓습니까? 저희 집에는 예수님의 사진이 하나도 없습니다. 엉뚱한 사람을 그려 놓고 왜 예수님이라고 합니까? 그 그림의 예수님은 그림 그리는 사람이 자기의 짐작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을 꿈속에서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만 예수님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덮어놓고는 절대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성경 속에 숨어 있는 예수님을 곳곳에서 찾아 만날 때에 하루가 다르게 점점 깊이 알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정확히 보여주는 까닭에 특별계시가 예수님이라면 성경은 특별계시 중에 객관적인 특별계시입니다. 성경은 성경이요, 나는 나이기 까닭에 객관적인 특별계시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관적인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앞집의 김창인 목사는 성경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는데 뒷집에 사는 박서방은 성경을 봐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축사를 하사 베풀어주시니 오천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창인 목사는 그 말씀을 읽고 "내가 이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감탄을 합니다.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혼자 먹고도 모자랐다면 왜 예수를 믿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저는 그런 예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축사를 하사 베풀어 주시니 오천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그 능력과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하시고 책임지고 먹여 주시는 그 사랑,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게 하셨던 그 축복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뒷집의 박서방은 그 말씀을 읽고 "혼자 먹기에도 모자라는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를 가지고 예수님이 축사를 하고 베푸니 오천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니 무슨 소리냐?"라고 합니다. 그러기 까닭에 박서방은 성경을 읽고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철저히 믿고 열심히 순종하는 아내를 불러 놓고 "당신 이런 소리를 믿고 교회에 다니고 있소. 이런 소리를 믿고 이런 예수를 믿을 바에는 차라리 내 주먹을 믿으시오. 내 주먹이 밥을 먹여 주었지 언제 예수가 밥 먹여 줍디까?"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성경을 읽고도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입니까?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까닭에 성령의 도움으로 이 말씀을 읽어야 그 말씀이 내게 들어오고 가슴에 부딪히고 내가 믿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교통이 빠져버리면 '글은 글이요, 나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 성령의 계시 이것이 예수님을 성경에서 만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특별계시 중에 주관적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찬송가 506장에 있는대로 '성경이 스승이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라는 가사가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이런 특별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 때 인류역사가 쭉 전개되어 나가는 중에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을 계시 중에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늘나라가 전개되는데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설하는 것이요, 그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전부 환상 중에 요한이 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펴놓고 그 속에서 예수를 만나고 그 예수를 내가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서 영접하고 "믿습니다"라고 하는 그 믿음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계시를 받아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계시가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사도요한이 바로 주일에 돌 바위틈에서 이런 계시를 받은 것처럼 성도들에게 이런 계시가 있어야만 믿고 더 잘 믿게 됩니다. 그 계시를 받은 요한이 나중에는 목숨을 내 놓고 그 믿음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계시를 받지 못하는 믿음은 30년 동안 교회에 왔다 갔다 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축복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날마다 이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믿으시고 믿음의 생활을 바로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증거의 복 (2)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을 보면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본 것을 증거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 모릅니다. 증거하는 증거 자체가 큰복이기도 합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내가 분명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교통사고가 났을 때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현장을 정확히 목격했습니다. 그럴 때 그 현장을 본 사람만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나 증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에 대하여 목격한 일도 없이 자기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가 '내가 증인을 서겠오'한다고 해서 증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본 일이 없는데 어떻게 증인을 서겠습니까? 증인의 자격은 반드시 목도하고 체험한 사람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증인을 서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까닭에 '당신이 나의 증인을 좀 서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증인을 바로 서주면 내가 이기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상대편이 이기는 것입니다. 증인이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은 믿을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증인을 서 달라고 하시니 얼마나 복 된 것입니까?



누가복음 24장 46절에서 48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 하늘나라로 승천해 가시려고 감람산에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볼 때 내가 분명히 죽었었는가 아니면 죽지 않고는 죽었던 것처럼 하고 꾸면 낸 이야기인가?'하고 물으신다면 제자들은 '주님이 죽으신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너희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죽은 것을 분명히 보았다면 내가 삼일만에 살아 난 것이 꾸며낸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분명히 다시 살았는가? 너희들이 분명히 보았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는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증거하는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계집종에게 끌려 다니면서 뭐라고 그랬지? 나는 예수 모른다고 그랬지? 그럼 내가 너 모른다고 한번 부인 해 볼까? 얼마나 기가막히고 억울한 일이겠느냐? 그리고 나를 저주까지했지? 제자로서 그 이상의 더 큰 죄가 어디에 있겠느냐? 그러나 네가 밖에 나가서 통곡했을 때 내가 그 죄를 없었던 듯이 깨끗이 용서해 준 것 알고 있지? 그러면 누구든지 또는 어떤 죄를 지었던지 간에 예수 영접하고 회개하고 '잘 못했습니다'하면 깨끗이 용서함 받는 사죄의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지? 그러면 나가서 이 모든 일에 증인이 되어라"라고 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주님이 "증인이 되라"고 하실 때에는 믿을 만한 사람을 들어 증인이 되라 하시는 것이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증인 세웠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너희들이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만큼 우리를 믿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이 말을 요즘 말로 바꾸어 말하면 "내가 네 죄를 대신해서 죽은 줄로 믿느냐?" "예, 믿습니다" "내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서 너를 의롭다 한 사실을 믿느냐?" "예, 저는 주님의 의로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재림하사 구원을 완성시키는 줄을 믿느냐?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어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을 믿느냐?" "예, 저는 믿습니다" 그러면 나가서 증거해라 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증인은 아무나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 체험하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증인 세울 만큼 믿어 주시니 얼마나 큰복입니까? 우리는 입을 열어 그 예수님의 증인을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시고 나를 위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여기서 그 환상을 보고 증인을 서면서 그 환상을 글로 썼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방법으로는 첫째로 글로 써서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글 쓸 재간이 없는 사람은 말로 열심히 증거해서 많은 사람에게 전도 할 수 있습니다. 말로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말재간이 없는 사람은 생활로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앞집의 광성교회 부부가 사는데 그 집 부부가 처음에는 심하게 싸우다가 광성교회에 나간 이후로 재미있게 살고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재미있게 사는 것을 보고 뒷집의 박서방이 보더니 "여보, 저 앞집에 서는 어느 교회에 다니지?" "광성교회에 나간답니다" "그럼 당신 밥 먹고 뭐하고 있어 빨리 광성교회에 나가" "왜요?" "저 앞집 마누라 달라지는 것 좀 봐요" 이 부부는 예수 믿고 달라진 것을 생활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산다'라며 생활로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일에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어디에서나 예수님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날 위해 살아나셨고, 날 위해 재림하시고, 날 위해 하늘 나라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키는 복 (3)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첫번째로 말씀을 읽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책을 덮어놓아 두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복이 없습니다. 성경을 펴놓고 읽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과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읽는데서 끝내면 절대로 누릴 복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림의 떡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듣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열심히 들으십시오. 성경공부 시간에 교사가 성경을 가르칠 때 열심히 들으십시오. 광성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예수를 믿을 일이지 주일 낮 시간에 한시간 나왔다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주일 50분 예배에 15분 늦게 나와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가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고 예수 믿었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열심히 배우고 지킬 때 복이 있습니다. 안 배우고 공부 안하고 믿는 사람 보다 공부하고 믿는 것이 더 큰복입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만 해 놓고 '성경은 내가 알바가 아니다'라고 하면 공부는 하지 않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릴 복이 없습니다.



세번째로 공부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지킬 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업가 중에 콜게이트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시골에 살 때에는 너무 가난했습니다. 남의 집 양초 공장에 취직하여 겨우 살아가는 불쌍한 청년이었습니다. 콜게이트가 아는 것이라고는 양초 만들고 비누 만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이 청년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서 도시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동네에 제일 존경을 받는 어른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고 싶은데 나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러자 이 분이 묻기를 "네가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냐?" "양초 만들고 비누 만드는 것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럼 나가서 딴 일을 하지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그 일을 해라 그리고 고향에 있을 때처럼 주일을 꼭 지키고 또 많이 벌든 적게 벌든 십일조를 꼭 받쳐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가령 퇴직금 받아서 목돈을 가지고 있다가 전혀 자신이 할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이 돈 잘 번다고 하는 말을 듣고 투자하면 완전히 망하지 않습니까? 할 수 없는 일을 왜 하려고 하십니까? 콜게이트가 고향을 떠나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양초 만드는데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은 지키고 십일조를 꼭 바쳤습니다. 얼마나 그 기업이 커졌는지 모릅니다.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안 지켰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헤매고 다니다가 말았을 것입니다. 읽은 성경의 말씀, 배운 성경의 말씀, 들은 성경의 말씀 꼭 지키어 복된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복 있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계시를 열심히 받고 계시에 충실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계시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증거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증인은 아무나 세우지 않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믿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대해서 너의 확신하는 바를 증인으로서 증거해 달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큰복입니까? 열심히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는 것도 복이요, 성경을 배우는 것도 복이지만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온갖 축복의 약속은 지키는 자만이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7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