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을 회복하자 (창1:26)
본문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권을 받았습니다. 지금 함께 읽은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봐서 인간이 온 지구를 다스리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주권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주권을 주셨지만 상실해 버린 것은 영적인 주권입니다. 창세기 2:7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참다운 인간은 정치적․사회적인 주권이 아니라 생령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주권이 보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7에 인간 창조를 언급했는데 인간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영적인 사람이요, 둘째는 육적인 사람입니다. 로마서 8:5-8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고, 또한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는 유다서 1:16-19에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13, 14에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3:3에도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인간들에게 에베소서 4: 22, 23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5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소유했던 주권을 상실해 버리고 영에 속하여 성령에 충만했던 자가 범죄한 이후 살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6:3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즉 생령된 자가 범죄하여 육에 속한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6-49에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육이 죽어야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은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이후 회개하고 구원받는 자들은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육이 부활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인간들은 주권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3에도 나의 신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에 이런 말을 자주 봅니다. 예수의 생명성령의 생명하나님의 생명이란 말은, 즉 에베소서 4:18에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하셨으니, 이 말씀을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영이라고합니다. 내 속의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주권을 행사 하게끔 했으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신이라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인간의 주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아담은 하나님의 신이 떠났던 것입니다. 창세기 6:3이하에 하나님의 신이 떠나 주권을 빼앗겨 버린 사람들이 있으나 창세기 6:8에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를 통해서 주권을 회복하는 축복이 창세기 9:1이하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 문명이 고도로 성장하고 있기에 더욱 방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인간은 방황하다 못해 물질에 의존했고, 경제에 의존했고, 자력에만 조급했습니다. 가인은 제사의 주권을 상실하고 결국 아벨을 죽이는 몹쓸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제사의 주권을 회복하여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예배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주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매일매일 단을 쌓기를 바랍니다.
에서는 장자의 주권을 빼앗기더니 창세기 27:38에 에서의 주소는 뜬구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아우를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 한평생 전쟁을 일으키고 칼을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주권을 빼앗긴 자가 얼마나 불행합니까? 르우벤은 영토의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첫째 아들인 장자 르우벤은 레위 지파를 빼고 11지파의 땅을 나누는데 여호수아 13:8에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인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법궤를 빼앗기고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렸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주권이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하루 빨리 주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사울은 확신이 없어서 블레셋과 싸움이 일어났을 때 떨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다윗은 떨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하고 다윗이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주권을 회복하는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윗도 한때 주권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성전 건축의 주권입니다. 다윗은 금, 은, 동과 레바논의 백향목 등 일류 재료들을 가져왔으나 솔로몬이 주권을 가졌으므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도 범죄함으로 인해서 왕위 계승의 주권을 빼앗기고 민족의 비극인 북국 이스라엘, 남국 유다로 갈리는 분열 왕국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또한 양심의 주권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양심의 주권은 선 이기에 베드로전서 3:16에도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3:20, 21에도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모습을 가지며 사기 행각 등 뻔뻔스러운 인간상이 주권을 빼앗겼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불의한 일을 행했을 때 가책을 느끼는 것이 인간 양심의 주권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23:13에 너희가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씀에 찔림을 받아 양심이 부끄러워 심히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새벽 기도, 철야 기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기껏 예배 지각해 놓고도 조는 자들이 있습니다. 졸고 있는 것은 강단에서 울려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영광스러운 주권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주권을 잃은 한국 사회의 앞날이 어떻게 되어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적으로 옷을 잘 입는 나라가 한국이라고들 하는데 잘 입는 것은 좋으나 속 양심의 주권을 잃어 버렸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양심의 주권 상실은 인격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떤 학위나 명예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잠언 1:7이나 골로새서 3:1-7등에 보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상실, 에덴에서의 참인간의 정서의 상실, 선한 행위의 의지 상실 등으로 인하여 인격의 파멸을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도덕 시간이 필요해지고, 대학에서는 윤리가 강조되며, 직장과 기관에서는 교양 교육이, 군부대에서는 정신 교육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양심의 주권을 상실한 기업주, 양심의 주권을 상실한 정치가, 양심의 주권을 상실한 지도자가 있다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서 사회와 국가의 파멸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주권을 회복할 것인가? 의식주가 보다 더욱 시급한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만 와서 앉아 있다고 의식주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릴 줄 아는 인간이 실지로 인간의 주권을 해결받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자신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심령의 영토가 점령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또는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왜 베드로 앞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심령이 사단에게 점령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간은 범죄로 인해서 사단에서 심령 영토를 점령당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없었습니다.
자식에 관한 부모의 기대, 학생에 관한 스승의 기대, 백성에 대한 국가의 기대가 있듯이 성도에 대한 성령님의 기대는 골방에서 두려워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두려워 말고 성령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인간이 마귀에게 점령당한 심령 영토를 점령키 위해 오십니다. 즉 천국을 건설키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성령님께서 오시면 모든 주권을 회복시키십니다.
현대인은 육체의 건강의 주권을 읽어 병원은 갈수록 대만원이고 양심의 주권은 더욱 잃어 각종 범죄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인간의 잃은 주권을 회복시키십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이 와야 주권을 회복할 것입니다. 노이로제, 정신병, 신경성 환자가 교회 와서 병이 낫는 예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오면 주권이 회복됩니다.
베드로같이 비겁하고 배은망덕했던 자가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했던 일을 회개하자 성령님께서 임하시더니 삼천 명 오천 명의 회개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생명을 내걸고 세상의 말보다 하나님 말씀을 듣겠다고 결심하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앉은뱅이도 일으켰습니다. 죽은 다비다도 살렸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온갖 문제들을 해결받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런 주권을 회복하지 못했습니까? 속히 회복합시다. 심지어 병자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지나가기를 기대할 정도로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불량한 청년 사울이 세계적 지도자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비겁한 베드로가 능력의 베드로로 변화되었습니다. 양심의 주권, 영적인 주권, 건강의 주권, 물질의 주권을 회복시키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형상이 곧 하나님의 생명이요 이러한 생명을 회복합니다.
이러한 주권을 회복하여 사업에, 학교에, 국가에 모든 것에 투여해서 복받은 가정, 복받은 사회, 복받은 국가를 이룩합시다. 가는 곳곳마다 풍성한 축복이 넘쳐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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