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간증 (단3:19-30)
본문
위대한 간증/다니엘 3:19~30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세상이 흔들릴 때, 믿음으로 살아가기는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선배들은 흔들리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보여주었습니다.
다니엘서가 증거입니다.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절망적인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습니다.
나라를 망해버렸습니다.
원수의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거야! 하며 위대한 간증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산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 이름은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입니다.(유대 이름, 바벨론 이름)
유대인이라면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로 불러야 하겠지만, 저는 익숙해진 이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과, 그냥 ‘세 친구’라고 할 것입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올 때 이들도 함께 바벨론으로 왔고,
다니엘이 음식의 정절을 지킬 때, 세 친구도 동참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학문과 지혜와 총명의 은사를 주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뛰어난 그들을 발탁하여 <지방 장관>에 임명하고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이없는 일을 합니다.
<두라 평지> 자신을 신격화 하기 위해 금으로 자신의 신상을 만들어 세운 것입니다.
<사진 자료 1. 금 신상>
높이가 약 27m(60규빗) 너비가 2.7m(6규빗)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준공식을 기해 <온갖 악기가 연주될 때, 온 국민이 그 신상 앞에서 절하게 하였습니다> 절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넣어 죽이겠다는 왕명이 있었습니다. 고대의 왕의 말은 곧 법이었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들어가서 타서 죽는다> 하지만 남들이 다 절할 때 절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자가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였습니다.>
대 바벨론 제국의 왕명을 어긴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몹시 화를 내며> 세 친구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줍니다. 이들이 출중한 인물이었기에 살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느브갓네살의 왕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한 말씀을 읽어봅시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〇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3:17-18)
세 친구가 왕에게 한 말은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믿음은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설령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대단한 고백입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 말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말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달라졌습니다. 노기가 극에 달했습니다.
왕은 <풀무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최대한 뜨겁게, 절대로 살 희망이 없도록 만든 다음, 왕명을 거역한 <세 친구를 불 가운데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세 친구는 관복을 입은 채로 결박되었습니다.
풀무불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도록 불을 지폈습니다.
세 친구는 군인들에 의해 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우리가 모닥불을 피우다 장작 하나를 던져넣어도 불꽃이 튀듯이,
세 사람을 불에 던지는 순간 얼마나 불이 대단했으면 던져 넣던 군인들이 타 죽었습니다. <외경에 의하면> 이때 화염이 풀무 입구에서 49규빗(약 22m)을 치솟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군인들이 타 죽었던 것입니다.
그럼 불에 던져진 <세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순간 타서 재가 되었을까요? 사람이 대단한 것 같아도 화장장에서 화장할 때 보면 1시간 30분이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세 친구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었으니 한순간 타서 재가 될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그들은 어떻게 죽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경<개역 개정판>은 23절과 24절 사이에 <단락만 구별하는 동그라미 표시만 해 놓았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 역에는 23절과 24절 사이에 66절이나 내용이 더 소게 되어 있습니다.
<공동번역, 제2 경전 다니엘서>에도 추가된 3장이 나옵니다.
66절 내용 중에 일부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앞부분 회개의 내용에 이어 이 말씀이 나옵니다.
<공동번역 다니엘 3:41-45 : 아사랴(아벳느고)의 기도>
“이제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당신을 따르렵니다. 그리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당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뵙기를 갈망합니다. 〇 우리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은 관대하시고 지극히 자비로운 분이시니 우리에게 관용을 베푸소서 〇 당신은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신 분이시니, 우리를 구해 주소서. 주님, 당신 이름이 영광스럽게 빛나시기를 빕니다. 〇 당신을 섬기는 사람을 학대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소서. 그들의 콧대가 꺾이고, 힘을 박탈당하여, 그들로 하여금 치욕을 뒤집어 쓰게 하소서 〇 당신 홀로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이 온 땅에 빛남을 알게 하소서”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46-50절에, 하나님이 간섭합니다. 하나님께서 뜨거운 불길을 보내시고, 세 친구에게는 산들바람과 시원한 이슬을 보내셔서 뜨거운 불꽃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51-90절>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세 친구들이 불가마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께 바친 찬송이 나옵니다.
<사진 2. 풀무불 속에 네 사람>
우리가 가진 성경으로 돌아와 생각해 봅시다.
세 친구들이 어떻게 죽을까? 궁금해서 보던 느부갓네살 왕에게 놀라운 장면이 보였습니다.
분명 결박한 채 던져 넣었는데, 결박한 끈이 타서 풀어졌습니다.
던져 넣던 사람이 타서 죽을 정도인데, 어찌 된 셈인지? 뜨겁다고 절규하며 죽어가는 모습은커녕 동산을 거닐 듯, 수성못 산책하듯 이리저리 다니고 있습니다.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풀무불 안에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 분은 <신들의 아들>처럼 보였습니다.
네 번째 인물 <신들의 아들>은 누구일까요?
구약학자 볼딩게이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네 번째 인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주변에 거하시며, 그들을 공경에서 구하시는 하나님의 돕는 자, 하나님의 탁월하신 에너지를 통해 해를 입히는 세력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불로 들어가신다. 젊은이들의 복과 성공의 삶은 위험이 전혀 없는 승리의 방식으로 다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방식으로 다다랐다. 그들은 정원에서 거니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이 해석을 들어보면 우리의 머릿속에 한 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구약학자 알렌 모티어는 노골적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네 번째 인물은 자비로운 돌봄과 겸손으로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 친구는 극심한 풀무불, 극한의 고통 가운데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놀라운 장면을 보고는 <불에서 나오라고 명령합니다.>
불에서 나온 세 친구는 코로도, 눈으로도,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이 불에 들어갔다고 나온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멀쩡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체험을 한 느브갓네살 왕은
28절에 간증했고, 29절에 조서를 내려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선포했고>,
30절에 세 친구를 승진시켜줍니다.
오늘 본문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간증임과 동시에
이들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느부갓네살 왕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대가 어려울수록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고 지켜주신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힘든 이 시기에 꼭 필요한 말씀 세 곳을 알려드립니다. 간직하십시오>
이사야 43장 1-2절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응답 된 말씀이지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〇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때로 침묵으로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과 반대되는, 순교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때는 주 후 320년 겨울이었습니다.
313년 양분된 로마제국 동방의 황제 리키니우스(Licinius)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인에게 관용을 베풀고 교회의 재산을 되돌려주겠다는 칙령을 내렸지만 후에
하지만 동방의 리키니우스 황제는 이후 기독교인에게 따돌림당해 316년부터 기독교를 다시 박해하기 시작했고, 주후 320년에는 갑바도기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독교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군사에게 이교도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때 아르메니아 세바스테(Sebaste)(현재, 터키 중부 시바스)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제국 제12 군단 병사 중 40명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이교의 신에게 제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며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 앞에서 “우리의 갑옷과 투구와 몸은 빼앗을 수 있어도 그리스도께 있는 우리 마음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교도이자 그 지역 관료였던 아그리 클라우스는 즉시 그들을 투옥했습니다.
투옥에도 불구하고 40명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은 믿음이 꺾이지 않았습니다.
아그리 클라우스는 그들의 절개를 꺾기 위해 기발한 고문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을 깨고 물속에 그들을 집어넣는 고문이었습니다.
아그리 클라우스는 40개의 얼음 구덩이를 파고, 병사들의 옷을 모두 벗긴 뒤에 그 얼음 구덩이 속에 병사들을 집어넣고 배교 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호수 밖에는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장작불 옆에는 이교의 신에게 경배할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를 놓아두었습니다. 참으로 유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악한 박해자 아그리 클라우스는 40명의 기독교인이 결국, 추위를 이기지 못해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병사들은 꽁꽁 언 입술을 움직여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우리는 모두 40명입니다. 우리 40명은 생명의 면류관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 거룩한 숫자는 변함없을 것입니다.”
3일 동안 40명은 지독한 추위를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4일째, 한 병사가 견디지 못하고 얼음 구덩이를 뛰쳐나와 이교도 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배교의 대가로 따스한 물이 담근 욕조가 그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으로 허락받은 그 욕조 안에서 그는 곧바로 죽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추위에 노출되어 얼어 있던 몸이 따뜻한 물에 닿자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39명의 병사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이교도 병사 중 하나가 모닥불을 쬐며 잠을 자다가 신비한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천사장이 내려와 얼어 죽어가는 병사들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 주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면류관을 쓴 병사들의 숫자를 세어보니, 40명이 아니라 39명이었습니다.
“한 명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하며 잠을 깬 병사는, 잠을 깨는 순간 배교 후 죽음을 맞이한 병사를 보았습니다. 이교도임에도 불구하고 그 병사는 자신이 꾼 꿈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재빨리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벅찬 감격으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참으로 영악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앙고백이 생명의 면류관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고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이교도 병사는 배교 한 병사가 있던 빈자리로 뛰어들었고, 나머지 39명의 그리스도인 병사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비록 물로 세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보혈의 세례’를 받고자 자기 몸을 던진 것입니다.
3일이 더 지났음에도 이들 40명의 병사 중 몇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아그리 클라우스는 부하들에게 아직도 살아 있는 병사들이 있다면, 꽁꽁 언 그들의 팔과 다리를 모두 잘라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미 죽은 순교자들의 주검은 불에 태워졌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아직 십 대였던 병사 멜리토(Melito)만은 남겨 두었습니다.
이 소년 병사가 도망치더라도 이내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차마 어린 멜리토의 팔다리만은 자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군인들이 떠난 뒤에 멜리토의 어머니가 죽어가는 아들 곁에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고통은 곧 끝날 것이며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라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멜리토 역시 승리를 손에 쥐고 순교자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순교자의 숫자는 정확히 40명으로 채워졌습니다.
이들 40명은 순교로 예수가 자신의 주(Lord)요 메시아이심을 간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필요하다”라는 것을 마지막 호흡으로 가르쳤습니다. 이 장엄한 집단 순교는 고대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자행되던 기독교 박해를 종식 시키는데 이바지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난의 시기에 믿음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믿음의 결과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간증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40명의 순교한 병사처럼, 죽음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간증이든, 저런 간증이든 위대한 간증을 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것은 위대한 간증을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 하나님은 여러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환경을 다스릴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특히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알게 합니다.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신뢰하느냐? 환난 가운데도 내가 너희를 사랑함을 믿느냐? 물어보십시다.
나아가 <교회가 국가의 모든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하는 고민도 하게 합니다.
이럴 때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믿음이란 이런 거야!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이런 거야! 하며
<우리의 삶으로 위대한 간증>을 보여주는 우리가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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