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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갈망하며 바라 볼 때-낙심에서 소망으로 (시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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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갈망하며 바라 볼 때-낙심에서 소망으로/시편 42:1-5



시편 42:1-5 | 엔게디

함께 부를 찬양 –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편 이해하기

시편 42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위에 작게 쓰여 있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뜻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우리는 시편을 생각할 때, ‘다윗’을 떠 올리게 되고, 저도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다윗의 시’로 알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고라자손’과 ‘마스길’이 궁금해 졌습니다. 그래서 조금 공부를 해보니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시편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고라자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라 족속’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라 족속은 출애굽 당시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가 땅이 갈라져서 모든 짐과 함께 땅 속에 삼켜지는 끔직한 형벌을 받았던 집안입니다.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지닌 채 살던 그 자손들은 다윗의 때에 건국을 도우면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수종드는 자들로 높임을 받게 됩니다.

이 시편이 다윗의 시로 생각되는 것은, 고라 자손 중에 성전에 시중들던 자가 다윗과 함께 피신하면서 지었기 때문에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 같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나님의 면전에서 추방당해 더 이상 성소에서 제사할 수 없게 된 시인의 고뇌와 신앙적인 슬픔이 여기에 묻어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회복의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마스길은 ‘깨닫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주로 교훈적이거나 명상적인 시편의 제목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오늘의 본문을 포함해 13개의 시편이 여기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가운데 우리가 함께 생각하려는 지명이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과 고라자손의 상황이 가장 잘 묻어나는 장소가 될 듯합니다. 위에 사진에 보이는 곳이 ‘엔게디’ 사막입니다.

 

쿰란에서 남쪽으로 32킬로미터를 내려가면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었다는 엔게디 국립공원(ein Gedi)을 만나게 되는데, 엔게디는 ‘염소들의 샘’이란 뜻으로 유대광야의 동쪽 끝에 자리한 요새였습니다. 이 지역은 사해 서쪽에 있는 석회석 벼랑 기슭의 온천에 흘러나오는 물 때문에 늘 습기가 있으며 유대광야 지역의 오아시스 지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엔게디는 이스라엘 어디서든 수십 킬로미터의 광야를 지나야만 오갈 수 있는 고립된 성읍이라는 특징이 있죠. 엔게디가 처음 성경에 언급된 것은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이곳 황무지에 오랫동안 숨어 지내며 굴에서 자고 있는 사울의 옷자락을 베면서부터입니다(삼상 24장).

 

 

흥미로운 것은 폭포가 있는 엔게디로 가려면 어디로 가든지 황량한 광야를 지나야만 합니다.

타는 갈증을 경험하고서야 만나는 오아시스이기에 더욱 절절한 갈망이 묻어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과 희열을 위해서 목마름의 과정을 지나가야했다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하는 과정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내 영혼이 갈급합니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분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그 때 그 때 계속해서 포기하는 작업이다.”

 

이 문장을 보면서 저는 이렇게 정리해보았습니다.

“가장 큰 갈망이 ‘나’를 만든다.”

여러분들의 마음, 생각 삶 속에서 가장 큰 갈망이 여러분들을 만듭니다. 우리는 갈급함이 가장 클 때 덜 갈급한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갈급’이라는 말과 참 잘 맞는 문장인 것 같습니다. 갈급한 정도에 따라 열망이 강해지죠. 즉, 그 열망의 정도에 따라 주변에 하찮은 것들을 제거하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어떤 것 하나에 굉장히 몰입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저희 어머니가 제 방에 있던 장기판과 바둑판을 모두 쪼개버리셨어요. 초등학교때 매일 장기와 바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못하게 되니까 중학교를 올라갈 무렵 탁구를 치기 시작했는데 친구들과 내기 탁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도 어머니는 탁구 라켓을 모두 부러뜨리셨습니다. 탁구를 할 수 없게 된 저는 중 3때 급기야 노름을 하게 되었어요. 그 후에 고3에는 당구에 푹 빠지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제 삶의 순간순간에 저의 어머니께서는 제가 목사가 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을 하나하나 제거해주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군목시절 은혜 체험을 하시고 나서 가장 먼저 낚싯대와 바둑판을 부러뜨리셨습니다. 은혜 체험을 하고 나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낚싯대와 바둑판이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죠.

여러분 낚싯대와 바둑판이 모두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에게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 있다는 것이죠. 이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기 시작할 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가는 것처럼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갈급함이 있다는 것은 ‘어려움’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 가운데 갈급함이 생겼다는 것이고, 갈급함이 생겼다는 것은 이제 그 어려움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갈급’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요구뿐만 아니라, 위협과 절망 가운데서 경험하는 부족함에 대한 간절함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시편 42편의 이야기는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다니던 때, ‘엔게디’ 요새에 머물며 경험했던 ‘갈급함’의 경험을 추억하는 내용으로 이해해도 될 듯합니다. 육체적으로 지쳐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었던 갈급함은 영혼의 갈급함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23장 26절에 보면,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것은 지금 물을 먹지 않으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라 자손이 목격하고 있는 상황이 그랬을 것입니다.

다윗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갈급한 이유는 그의 생명이 지금 ‘안전’을 찾지 않으면 죽을 수 있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도망을 가도 집요하게 쫓아오는 사울 때문에, 이 산으로 피했지만 또 저 산으로 피해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게다가 제가 몇 해 전 6월에 가보았던 그 엔게디는 무척이나 더운 곳이었습니다.

40도가 훌쩍 넘는 날씨에 황량한 광야에서 도망을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을까요?

사실 우리의 원수가 참 집요합니다. 이렇게 육신적으로 힘든 가운데서 다윗의 진짜 문제는 ‘영혼의 갈급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당하는 현실적, 육체적 고난의 문제는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우울함으로 인해 기도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게 육신이 힘들어지니 영혼마저 하나님과 멀어지는 듯,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듯,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듯 느껴지는 것이죠.

다윗이 느끼는 갈급함의 정도를 옆에서 바라본 고라자손은 이렇게 상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에서,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하나님!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저로 하여금 이렇게 힘들게 하실 수 있나요?

 

지금 다윗의 상황은 한가하게 앉아서 누군가가 고백하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하나님의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living God’ 지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묻어나고 있는 것이죠.

우리말성경에는 “…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고 나와 있는데,

NIV 성경에 보니 이런 의미입니다.

When can I go and meet with God?

내가 언제쯤에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요?

 

또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이 순간을 지나가는 것이 너무 버거워서 지금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팀 켈러 목사님은 『묵상』에서 이 부분을 ‘하나님을 놓쳤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시편기자는 독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통찰을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화석화된 믿음이 아니라 ‘생생한 믿음’이라는 것이죠.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living God’이 필요한 것이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몸’이 ‘물’을 찾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생한 믿음을 상실하고 나니,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3절에 보니,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눈물이 음식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울었으면 그렇게 표현을 했을까요?

정말 힘든 것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비웃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하나님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믿는데,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에게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엔게디’에서 있었던 상황이 무엇인지 아시죠?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울 왕이 삼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쫓아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울 왕이 뒤가 급해서 굴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곳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피신하고 있던 장소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경험하죠. 환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볼 수 있는 것이죠.

바로 그 상황에서 일어난 일, 사무엘상 24장 4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은 사울 왕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또 사울은 다윗을 향하여 축복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쯤 되었으면, 다윗이 이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고 존중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 할 때, 다윗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24장 5절과 6절,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그런데 25장과 26장으로 넘어가면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들을 데리고 쫓아가고 다윗은 또 쫓겨 다니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신앙을 지키고 굳건하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도 지금 그가 당하는 어려움들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과를 이미 알고 말씀을 읽으니 무덤덤할 수 있지만, 그렇게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바보 같이 사는 다윗을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아니, 그가 그렇게 믿는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이제 그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입니다.

 

다윗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과거에 그가 경험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힘이 듭니다. 마음이 상합니다.

하지만 상한 마음을 이겨낼 수 있는 것 또한 믿음의 기억입니다. “믿음의 추억”입니다.

본문의 4절은 다윗이 기억할 수 있었던 믿음의 기억들입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영혼을 향한 노래

시인은 자신의 문제가 다른 사람의 조롱이 아니라, 낙심한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을 보면서, 자신이 처한 도망자의 형편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의 삶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사울 왕이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하며 쫓아오는 것이 아니라, 너무 힘들어  스스로 낙심하고 실망하고 포기할 지경에 이르는 것이죠.

그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 역사하지 않는 순간이 온 것이죠.

이제 다윗은 자신을 향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 부분이 저에게는 이렇게 다가옵니다.

“여러분, 힘이 들 때는 힘을 내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어쩌면 다윗이 자신이 한 행동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고 자신의 동역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사람들은 다윗의 편도, 하나님의 편도 아니었습니다.

점점 외톨이가 되어버리는 외로움 속에서 다윗에게 찾아온 감정은 ‘불안’이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에게 노래합니다.

불안해하지 말아라!

더 이상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확신해라!

NIV성경에서는 5절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우리의 영혼이 침체에서 벗어나는 좋은 비결이 있다면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게시된 [산마루 서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독수리의 일종인 ‘뱀잡이 수리’는 하늘 높이 나르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가 먹이를 낚아채는 민첩한 새입니다.

그런데 땅에 내려와 먹이를 먹고 있을 때에, 갑자기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의 습격을 받게 되면, 잡혀 먹히고 만다고 합니다. 이유는 맹수들이 공격을 하는 순간 당황한 나머지 날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뛰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난다고 하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이런 일이 뱀 잡이 수리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인생에 어려움을 당하고 뜻하지 않은 낭패를 보았을 때에 대다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맙니다. 세상에서 불어오는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이럴 때에는 주의 날개 아래 피해야 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구하고, 이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날아오를 용기를 구한다면 맹수처럼 공격하는 절망감과 실패감에서 벗어나 다시 하늘을 높이 날게 될 것입니다.

 

좋은 예화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왜 우리에게 낙심과 불안이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낙심’과 ‘불안’이 무엇인가요?

영어 단어를 보니까 참 재미있습니다. ‘downcast’라는 말은 눈을 내리까는 것입니다. 아래를 바라보면 낙심이 옵니다. 지금 세상을 보고, 친구들을 보고 있던 자신의 영혼에게 다윗이 이야기 합니다. “나의 영혼아! 왜 내 안에서 불안해하느냐?”

이제 자신의 영혼을 향해 명령합니다.

눈을 아래로 깔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가요? ‘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사실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소망이 생겨서 찬양하게 되었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영혼이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양했더니 소망이 생긴 것일까요?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Fix my eyes on God—soon I’ll be praising again. He puts a smile on my face. He’s my God.

 

세상을 바라보던 눈이 하나님을 향하면, 다시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면 그 분이 나의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 분은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언제 나올까요? 소리는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요?

이청승의 『두 개의 르네상스』에 보면 아주 멋진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피리나 바이올린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그 속이 비워져 있기 때문이다. 여백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빛나게 한다.”

 

하나님만을 바라며, 여호와를 갈망하며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비워져 가는 것입니다.

많이 비우면 비울수록, 많이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렁찬 소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망에서 나오는 찬양이야말로 아름답게 공명된 소리가 될 것입니다.

로렌스 형제가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며 투명한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때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고,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기채 목사의 『습관, 신앙을 말하다』에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려움 때문에 마음까지 우울해질 때, 스스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오히려 찬양하겠다고 말입니다. 자동차가 전진하느냐 후진하느냐는 액셀이 아니라 변속기의 기어가 결정합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환난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닥쳐올 수 있지만 내 생각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그는 단지 운이 좋은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폄하했습니다. 이때 콜럼버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달걀이 있습니다. 탁자 위에 세워 보십시오.”

사람들은 시도해보았지만 아무도 달걀을 탁자 위에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달걀의 밑 부분을 살짝 깨뜨려 달걀을 세워 보였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죠”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처음으로 생각해 낸 사람은 나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생각, 창조적인 생각, 믿음의 생각이 세상을 바꾸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기자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잠언 23장 7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 즉

 

또한 열린 교회 김남준 목사님은 시편 42편 5절을 가지고 설교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섭리’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 ‘하나님의 감춰진 뜻’이죠. 고라 자손은 지금 다윗과 함께 고난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악한 자들에게 왕권이 찬탈 당하는 아픔을,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놓아 둔 채, 타국으로 쫓겨 가는 슬픔을 말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어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나요? 이런 슬픔과 불행한 일들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것을 볼 수 있나요?

시인의 고백이죠.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사라지고, 이 갈급함 앞에 서 봐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직시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솔직하게 경험하는 일들이 아닌가요?

때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게 되는 때,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재물들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릴 때,

그렇게 자신했던 우리의 건강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의 보금자리를 흩어 놓으실 때,

우리의 안정된 질서를 깨실 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되죠.

우리가 이런 것들에서부터 얼마나 연약한 존재요, 비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자기 성찰’의 시간이 없으면, 인간의 본성이란 끝없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끝없이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고, 이 관계가 깨어지면 우리 영혼이 불안의 심연을 경험하게 되죠. 그러므로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용기 있게 우리의 영혼을 향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낙심하지 말아라!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말아라!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인간들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말입니다.

다윗과 고라 자손들에게 그렇지 않았을까요?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던 때가 얼마나 귀했는지, 그 때에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그 때를 추억하고 나니,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며 영혼의 침체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오늘 시편이 고통당하는 시인에게 위로가 되었듯이, 자신에게 격려가 되고, 스스로 cheer up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 시편을 대하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피난 중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깨닫고, 노래했던 시인처럼 우리도 그렇게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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