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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시6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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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시 65:8-13)



 


   다니엘 데포(Daniel Defoe)가 쓴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탄 배가 대서양 한 가운데서 난파당했습니다. 그는 널빤지에 의지해서 표류하다가 한 무인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구조되거나 탈출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무인도에 홀로 고립된 크루소는 처음에는 자신의 그런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 있기보다는 생존할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감사의 목록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노트를 두 칸으로 나눈 후에 한 칸에는 자신이 처한 좋지 않는 상황을 기록하고 다른 한 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일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외딴 무인도에 던져진 것은 나쁜 것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익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인간사회에서 추방된 것은 좋지 않는 일이지만 주변에 먹을 것이 있어 굶주림 면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몸에 걸친 옷이 다 헤어졌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지만 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날씨가 따뜻하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이었습니다. 그에게 방어도구가 하나도 없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지만 그 섬에는 자신을 해칠 맹수가 없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것은 좋지 않는 상황이지만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했습니다. 생필품이 없고 그것들을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파선된 배를 해안 가까이에 보내주셔서 그가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이 당한 좋지 않은 상황과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열거한 후에 마지막 내린 결론은 삶이 비참한 상태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론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내가 원치 않는 좋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지만, 때론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것은 항상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외롭고 고독한 그 무인도에서 그런 감사를 느끼며 살았던 로빈슨 크루소는 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겸허하게 감사드렸다. 하나님은 나를 깨닫게 하고 기뻐하셨는데, 이렇게 고립된 환경에서도 내가 살았던 자유 사회의 삶이나,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나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과거에 내가 살았던 고약하고 저주받은 진저리나는 날들보다 비참한 이 모든 환경에서, 내가 누리는 이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이제 나는 느끼고 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성경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은 극한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그가 평생 모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애지중지 키웠던 열 명의 자녀들이 한날한시에 갑자기 몰아친 태풍으로 인해 집이 무너져 죽게 됩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참담한 현실 앞에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찬송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욥은 자신이 당한 비참한 현실 속에서 자신이 태어난 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알몸으로 태어난 자신의 삶에 지금까지 은혜 베푸시고 풍족하게 누리도록 도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 다 사라진 현실에서 태어난 그 때의 모습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 뿐입니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은 생명의 원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망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평할 이유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모은 재산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에도 불평이 생겨날 것입니다. 내 자식이 내 소유라고 생각했다면 그 소유를 한 순간에 거두어 가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원점을 생각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난 그 날을 말입니다.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태어나 여기까지 누리며 살았던 것만으로도 그것을 주셔서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심이 마땅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무엇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우리는 늘 우리가 얼마나 감사를 잊고 살았는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 감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중요한 신앙의 미덕을 따라 살지 못한 우리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는지 찾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에 불평이 먼저 고개를 들곤 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뭔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어찌 저에게 이러실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드러내놓고 하진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마음에는 너무 자주 그런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주셨는지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믿음으로 살피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너무 쉽게 마음을 빼앗겨버리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 다윗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돌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대상이 자신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땅을 돌보셨다고 고백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땅을 돌보신 것입니까? 물을 공급하시어 우리에게 곡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돌보신다’는 말은 ‘방문한다. 감찰한다’는 의미입니다. 농부가 자신이 씨를 뿌려놓은 밭에 곡식이 잘 자라는지 보기 위해서 밭에 직접 찾아가 그 땅을 살필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물을 주시기 이 땅을 직접 방문하시어 강물은 얼마나 되는지 친히 살펴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있는 것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 부족하다면 언제 어느 때에 비를 내려 밭고랑에 물을 넉넉하게 하여 그 땅을 기름지게 할 수 있는지, 그런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친히 당신 백성의 땅에 방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돌보지 않으셨다면 농부는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지만 그 씨를 싹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적절한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물을 많이 주고 거름을 주고 돌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지 않으시면 추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받고랑과 이랑에 충분한 물을 공급해 주신 이유는 싹에도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농부가 밭에 뿌린 싹에 복을 주셔서 그 싹이 자라 열매 맺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싹에 복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 싹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쓴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찌 농사일만 그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지 않으신다면 우리 역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밭고랑과 이랑에 물을 주셔서 싹을 복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추수하여 곡식을 먹을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이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게 섬세하게 돌보시고 은혜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삶을 유지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강에 물이 가득하여 그것으로 밭고랑과 이랑에 충분한 물이 공급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늘상 있는 일이고, 자연이 주는 혜택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신앙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마태복음 5:45) 세상에 햇볕을 비춰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비를 내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선인과 악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내려주십니다. 매일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의 시간을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그 생명으로 살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 반면,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기에 오늘 아침에도 떠올랐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믿음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에 작은 부분들까지도 섭리하시고 역사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그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매일의 삶에 평범하게 일어나는 일상을 바라보며 다윗이 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한 해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니 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은택’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언어인 히브리어로 ‘토브’라는 단어입니다. ‘토브’라는 말은 ‘좋은, 선한, 아름다운’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셨다.’는 말은 지나온 한 해의 모든 삶에 하나님께서 좋은 것들로 내 삶을 덮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좋은 것들로 채워주셨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불만스러운 것도 있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풍족하게 주셨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돈도 좀 넉넉했으면 좋겠고, 장사도 좀 더 잘 되었으면 좋겠고, 회사에서 사장을 비롯한 사람들이 나를 좀 더 인정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도 자식들이 속 썩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남편이나 아내가 좀 더 나에게 잘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 로빈슨 크루소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노트 반쪽에 적어보면 우리가 불만스러워 하는 것들 속에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계속 바라보면 내 삶에 부족한 것만 보입니다.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내 상황을 바라보면 불만스럽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부족한 가운데서도 채우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상황이 없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다가 홀로 무인도에 떠밀려왔습니다. 거기에서 문명의 혜택이라곤 거의 누리지 못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노트 반쪽에는 감사할 일들이 수북하게 적혀 있습니다. 왜요? 불평스러운 상황의 이면을 보려했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이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우리 인간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상황이 좋거나 좋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 때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언제나 지속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감사할 상황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마음은 그런 상황에 금새 익숙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의당 감사해야 할 상황조차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 감사할 마음이 무디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감사하다고 생각하지만 곧 감사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감사는 찾아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감사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께서 땅을 돌보셔서 농사지을 수 있는 물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비가 오는 것을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자주 표현되고 있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물이 필요할 때 주신 비가 이른 비이고, 곡식의 알맹이가 영글어가기 위해서 물이 필요할 때 주신 비가 늦은 비입니다. 필요할 때에 적절하게 내리는 그 비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그 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때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장인이 월급을 받으면 내가 한 달 동안 수고했기 때문에 당연히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농부가 가을에 추수를 하면서 내가 농사를 잘 지어서 추수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직장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장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지 않으시는데도 추수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내가 직장생활 잘 할 수 있고, 장사 잘 할 수 있고, 농사도 잘 지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죄로 물든 인간의 거짓된 마음이 우리에게 심어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직장생활하면서 힘든 것을 내가 내 힘으로 견디는 것도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그래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한 것이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무더운 여름에 땀을 흘리며 논과 밭에 나가서 거름을 주고 풀을 매는 힘든 작업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건강과 시간과 능력을 주시지 않았다면 아무리 내가 발버둥을 치고 몸부림을 친다 하더라도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짓된 우리 인간의 마음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부분은 망각하고 내가 한 것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내가 수고한 것만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악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신앙적인 이성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결코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늘 우리 자신을 믿음의 눈으로 살펴야 합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묵상하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풍요가 덧입혀집니다. 감사를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감사하는 사람에게 놀라운 은총이 덧입혀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신앙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리더십 훈련과 직무환경개선 컨설팅을 제공하는 톰피터스 사의 CEO 및 회장을 지낸 제임스 M. 쿠제스(James M. Kouzes)는 그의 책 『리더십 챌린지(The Leadership Challeng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직원들이 퇴사하는 이유는 돈이나 조건 때문이 아니다. 상사에게서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떠난다. 조사에 따르면 81% 사람들이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리더와 일할 때 근무 의욕이 더 생겨나고, 70%는 리더가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정기적으로 자주 해줄수록 기분이 더 좋아지고 의욕이 생겨난다고 답했다.” 리더십에 있는 사람들이 직원들에게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할 때 직원들은 더 열정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직원이 사장이나 상사에게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사가 직원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 그것은 돈을 들이지 않고 매일 직원들에게 배당금을 나눠주는 매력적인 투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격려가 되고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에는 그만큼 힘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그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계산하고 음식점을 나올 때 꼭 감사하다는 말을 하십시오. 반찬이 맛있어서 반찬을 더 달라고 해서 반찬을 더 가져오면 반찬을 가져다주는 직원에게 꼭 감사하다는 말을 하십시오.’ 기억나십니까?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이 그 설교를 듣고 그 후로 식당에 가면 꼭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직원이 기분 좋아하고 맛있는 반찬도 더 잘 가져다주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비록 내 돈을 내고 먹는 음식이지만,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서비스를 해주는 분들에게 감사하는 것 어렵지 않지 않습니까?

   이제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 보십시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하나님 또 하루의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출근해서도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는 ‘좋은 사람 만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에게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을 만나고 나서도 ‘나는 저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식사를 하고 나서는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입맛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나면 ‘고단한 하루이지만 큰 탈 없이 하루를 마감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하며 사십시다. 감사는 결코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신앙의 마음을 가지고 찾아야 찾아지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은혜로 갚아 주십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요 설교가였던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인간은 감사를 통해 부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부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감사하며 사십시오.

마음에 부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게 하십시오.

우리의 신앙과 영혼에 부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십시오.

감사하는 사람이 부유한 사람이요, 감사하는 사람은 부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진짜 신앙인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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