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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교회 (계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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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교회 (계 2:18-29)


두아디라는 주전 300년 경 알렉산더가 도로를 건설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도시는 마게 도냐 지방의 부유한 도시로서 우수한 염료를 제조하는 고장으로 고대 도시에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도시는 에베소교회를 통하여 바울이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한 루디아에 의해서 복 음이 전파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교회의 특징은 신앙적인 교리보다는 인간에 대한 그들의 수고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눈이 불꽃 같다 고 하는 것은 주님의 전지성(全知性)을 가리키 는 말입니다. 구약 다니엘서 10장 6절에 보면 다니엘이 본 환상 중에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 은 번개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 더라 했습니다. 주님의 눈은 불꽃과 같으셔서 세계 어느 모퉁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모르심이 없으십니다. 사람은 외모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속고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일 수 가 없습니다. 주님의 눈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의 눈은 불꽃과 같기 때문에 숨길 수가 없습니다. 시편 139편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 9:1∼4)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고 계시며 우리의 속사람과 겉 사람의 행동과 동작이 주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 하지 않고 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 고 말했 습니다. 이 말씀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제 3자적인 입장이 아니라 직접 관계를 맺 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우리에게는 언제나 주님과 내가 어떤 관 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했습니다. 나 의 목자 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나 자신이 양과 같이 어리석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됩니다. 양은 맹수가 살고 있는 위험한 지역에 가 있으면서도 그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라는 것도 사 실 모릅니다. 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린 줄은 알지만 자기가 갔던 길을 되돌아 올 줄도 모릅니다. 양은 여름에 자기가 풀을 뜯던 곳도, 겨울에 쉬던 곳도 모릅니다. 양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무리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바로 양과 같이 어리석고 사실 아무것도 모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양과 같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래야만 주님을 나의 목자로 삼을 수가 있 습니다. 지혜자 솔로몬도 나는 어리석은 양과 같다 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양은 어리석은 짐승일 뿐 아니라 전적으로 의존하는 짐승입니다. 다른 짐승은 집에서 키우다가 들에 내버려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자기 혼자서는 살 수가 없는 짐승입니다. 먹 이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기 생명을 스스로 지키지 못해서 혼자 놓아두면 얼마 가지 못해서 죽 고 맙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다윗이 우리를 양으로 비유한 것은 너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 니다. 우리는 양과 같아서 우리 스스로를 방위할 능력도 없고 살아갈 수 있는 방편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전 히 의지하고 그에 의해서 내가 사는 것을 느낄 때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양이 그 목자를 온전히 의지하듯이 우리의 심령 이 참 목자이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가 어떤 한 목자가 아닙니다. 나의 목자가 되실 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다 이와 같이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를 양의 우리 안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눈 은 불꽃과 같으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습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을 보살핍니다. 배가 고파 하지 않나? 목이 말라 하지 않나? 피곤해 하는 양은 없나? 다리를 절지는 않나? 독파 리가 와서 쏘지는 않나? 먹은 것이 소화는 잘 되나? 변의 색깔은 정상인가? 식욕이 있는가? 털이 지나치게 자라지는 않았나? 넘어져 있지는 않나? 살이 너무 찌지는 않았나? 이렇게 모든 방면을 감찰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처럼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십니다. 시편 121편을 보면 너를 지 키시는 자가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했습니다. 주님의 눈은 불꽃 같습니다. 주님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든지 나를 아시며 나와 내게 속한 모든 것을 아 십니다. 우리의 일 중에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은밀히 행한 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까지도 통촉하 십니다. 모든 동작 이전에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정밀하며 생각보다 빠른 것은 없습니다.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기 전에는 아무도 내가 생각한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입으로는 사랑하나 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 고 말씀했습니다.사실 우리가 상대방의 생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가 없 을런지도 모릅니다. 그저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에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반면에 남 의 마음속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 얼마나 큽니까? 옛날 야곱이 아버지인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나중에 그들의 아버지 야곱 을 또 속였습니다. 남의 속을 모르기 때문입니다.아내가 남편을 속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속입니 다. 부하가 상사를 속입니다. 학생이 선생을 속입니다. 집권자가 국민을 속입니다. 상인이 손님 을 속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의 눈은 불꽃과 같기 때 문입니다. 주님은 모르심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서 제자들과 조반을 드신 후에 베드로를 따로 불러 서 물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의 행위를 다 아셨습니다.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장담했으나 결국 주 님을 세 번씩 부인한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 그랬느냐고 나무라지 않으셨습 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물으셨습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었는데 어떻게 되었느냐? 고 물으셨다면 베드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마음이 약해서 주님을 부인하는 실수를 했지만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 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 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행위 이전의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주 님은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십니다. 내가 생각한 지 오래되어 잊어버렸어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시편 33편 13∼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은 나의 길을 감찰하시며 마음의 길을 헤아리십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나의 길을 키질하시나이다 하는 뜻이 있습니다. 키질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 내는 일입니다. 우리의 가는 길의 선과 악을 철저하게 구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감 찰하십니다. 누구와 함께 걷는지도 다 아십니다. 은밀히 행하는 것도 아십니다. 다시 말해서 어 떤 생각에서 그 말이 나왔는지 아십니다. 내 혀끝에 말이 없어도, 말하려 하다가 하지 않고 남겨 두어도 주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피해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곳도 없습 니다. 주님의 눈에서 우리를 숨길 수 있는 베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편에 보면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께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은 빛난 주옥과 같다 고 했습니다. 주님의 견고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악을 짓밟고 심판하실 분이신 것을 뜻합니다. 주님 앞에는 악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빛난 주석 같은 발로 모 든 악을 짓밟아 버릴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는데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많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저희의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교 회를 책망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서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했습니다. 구약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이세벨이란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세벨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로서 유대왕 아합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이것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 스라엘 왕이 이방 여인을 왕후로 맞았으니 사실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세벨은 아 합 왕의 왕후가 되면서 자기가 섬기던 바알신을 수입해서 신전을 건축하고 단을 쌓았습니다. 아 세라 목상을 만들었습니다. 옛날 이방신들의 공통점은 음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전마다 성녀를 수없이 많이 두어 음행하는 일을 자행했습니다.영적으로 말해서 두아디라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했 다는 것은 영적으로 음행한 결과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더렵혀지고 말았습니다. 세속화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미명을 붙여서라도 못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교회는 이렇게 해서 타락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 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그 죄에서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와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참으시면서 그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 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여기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란 헬라어는 현재분사로서 지금도 그 범죄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죄에 한 번 빠져 놓으면 이래서는 안되지, 이러다가는 죽지 하면서 죄에 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의사가 몰핀 중독이 되면 몰핀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러다가 죽 지 하면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어서 일어나 죄에서 빠져 나와야 삽니다. 회개할 기회를 잃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22절과 23절 에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 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했습니다. 주님은 두아디라교회를 향하여 부탁하십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4∼25절). 두아디라교회가 타락했다고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아합왕 때에 이세벨에 의해서 수입된 바알신과 아세라목상을 섬기 게 되었지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고 다른 사람은 전부가 바알에게 무 릎을 꿇은 줄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7천명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은 언제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그 믿음을 굳게 잡으라 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절을 지키라고 하십 니다. 주님께서도 인자가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만국을 다스리 는 권세는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인데 이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으 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특히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의 일을 힘 써 행한 사람이 누릴 권리입니다. 어떤 권세입니까? 철장으로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은 권세입 니다. 절대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막대기나 지팡이로가 아니라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뜨릴 때 깨 지지 않는 그릇이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 나는 광명 한 새벽별이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 자신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생각만 해도 좋은데 주님 얼굴 친 히 뵙고 그 영광을 누릴 때 얼마나 좋겠습니까? 1.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2. 만민의 구주 예수 여 귀하신 이름은천지의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3.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구하 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 랑 알도다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이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유혹이 아무리 많아도 그 믿음의 정절 지키며 주의 일 열심히 행하 다가 주님께서 주시는 권세와 새벽별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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