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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는 믿음 (욥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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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는 믿음/욥기 1:9~11





사라진 조강지처



대한민국은 지금 ‘부부 위기시대’라고 말합니다. 하루에 300쌍의 부부가 남남이 됩니다. OECD 회원국 중 한국이 이혼율 9위고 아시아에서는 1위입니다. ‘황혼이혼’도 크게 늘었습니다. 결혼한 지 20년 이상 된 부부의 이혼이 전체 이혼의 37.2%, 3분의 1이 넘습니다. (저처럼) 30년 이상 산 부부의 이혼도 10년 전보다 2배 넘게 늘었습니다.



이런 사회현상을 보며 떠오르는 말이 조강지처(糟糠之妻)입니다. 이 말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무슨 뜻인지 아세요? 조(糟)는 쌀 지게미(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고 강(糠)은 쌀겨입니다. 저도 그 세대는 아니지만 옛날 정말 먹을 게 없어 굶주리던 시절 쌀 지게미나 쌀겨를 먹었다고 하지요. ‘조강지처’란 쌀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며 고생을 같이 해온 아내입니다. 제일 가난하고 힘들 때 그 고생 함께 겪은 아내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더 이상 조강지처(婦)도, 조강지부(夫)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많은 부부들이 뜻이 안 맞으면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말 이혼할 수밖에 없는 ‘아픈’ 사정이 있는 분들도 있어요. 무조건 다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아픔 있는 분들을 잘 안아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는 게 너무 힘들어졌어, 나 저 사람 좋은 조건 보고 결혼했는데 그 조건이 없어졌다고 부부가 갈라서는 것은 잘못입니다. 반대로 좀 살만해 졌어, 사는 게 나아졌다고 딴 짓 하고 그동안 함께 고생한 아내나 남편을 버리는 것도 큰 죄입니다. ‘조강지처’라는 말처럼, 정말 힘들 때, 정말 고생할 때 변함없이, 끝까지 내 곁을 지켜주고, 그 고생도 아픔도 함께 겪은 아내가 진짜 아내요, 진짜 남편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랑은 바뀌는 거다.”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사랑이 바뀐다면, 사랑이 조건에 따라 변한다면 그게 진짜 사랑일까요? 좋을 때, 편안할 때, 행복할 때는 사랑하지만 힘들 때, 아플 때, 괴로울 때 사랑이 변한다면 그게 진짜 사랑일까요?



사랑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지요. ‘만약에 사랑’과 ‘때문에 사랑’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사랑’은 “만약 저 사람이 나한테 무엇 무엇을 해준다면... 만약 저 남자가 저 여자가 이런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랑’은 “저 사람이 이렇게 때문에, 저 사람이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랑’과 ‘때문에 사랑’은 같은 뜻입니다. 조건부 사랑이지요. 조건부 사랑의 특징은 그 조건이 존재하면 사랑하지만 그 조건이 사라지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세 번째 사랑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런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니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조강지처가 사라지고, 결혼의 숭고함과 부부의 신성함이 사라져가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랑이 점점 조건부 사랑, 즉 ‘만약에 사랑’과 ‘때문에 사랑’으로 변질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잘 생겨서, 예뻐서 사랑하고, 돈 있어서, 좋은 직장 다녀서 사랑하고, 건강해서 사랑하지만 그런 조건들이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랑도 사라지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무조건 사랑’이 그리워지는 시대지요.



그런데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이런 의문이 생길지 모릅니다. “에이, 목사님이 설교시간이니까 저런 소리 하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뭘 모르는 소리를 하시네.” 그렇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이런 순애보 타령을 제가 하고 있는지 몰라요. 아마 저희 아들들도 제가 이런 소리 하면 “아빠 세상 물정 참 모른다.”고 할지 몰라요. 세상이 변했습니다. 현실이 변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는 ‘조건부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런 거 다 옛날 얘기고 현실을 모르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랑’을 얻으려면 그만큼 ‘좋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그렇게 말들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 까닭 없는 믿음이 어디 있어?



욥기는 참 흥미로운 책입니다. 우리는 ‘욥기’ 하면 그냥 ‘의인의 고난’ 정도로 단순하게 이해하지만 욥기를 잘 읽어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참 많습니다. 욥기는 42장이나 되는 긴 책인데, 그 42장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재미있는 부분과 재미없는 부분 두 가지로요.



‘재미있는 부분’이란 욥기 첫 시작인 1장과 2장,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42장입니다. 욥이 사탄에게 고난을 받고도 믿음으로 잘 이겨내는 장면을 담은 1장과 2장, 그리고 마지막에 욥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그야말로 ‘갑절의 복’을 받는다는 42장은 비교적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3장부터 41장까지 욥이 한 마디,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가 한 마디, 또 욥이 한 마디, 친구인 빌닷이 한 마디, 또 욥이 한 마디, 친구 소발이가 한 마디, 이렇게 흘러가다가 뒤에 가서는 또 다른 친구인 엘리후가 등장해서 또 한 마디 하면 욥이 대답하고,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거지요.



바로 이 부분이 너무 길고 지루합니다. 뭔 소리인지도 잘 모르는 내용이 많아요. 그래서 제가 욥기가 ‘재미있는 부분’과 ‘재미없는 부분’ 둘로 나누어진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욥기를 읽을 때는 1장, 2장 ‘재미있는 부분’만 읽고 3장부터 ‘재미없는 부분’은 대충 넘어가고 그러지 마시고, 마음을 굳게 먹고 3장부터 41장을 잘 읽어보셔야 욥기의 진수를 읽을 수 있는 겁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재미있는 부분’인 욥기 1장을 보려 합니다. 제가 ‘재미있다’는 표현을 썼지만 욥기 1,2장을 읽어보면 그게 어디 재미있는 내용입니까? 욥의 입장에서는 정말 끔찍한 내용이지요. 자, 그럼 욥은 누구냐? 여러분도 알다시피 욥은 훌륭한 믿음과 모든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완벽한 인물입니다. 욥기 1:1 읽습니다.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은 이런 좋은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7남 3녀를 두어서 당시 기준으로는 자식의 복도 많이 받은 사람이고, 그 자녀들도 아버지의 기도와 소원대로 신앙적으로 잘 성장했습니다. 또한 엄청나게 많은 재산, 물질의 복도 받았습니다. 보세요. 교회 잘 다니고 믿음생활 정말 잘 해요. 자기 자신은 건강하고 자식도 다 잘 됐고, 돈도 많은데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까지 받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보통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 이 세 가지에다가 지위나 명예의 복까지 누리면 금상첨화라고 하는데, 욥은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고, 나아가 영적인 복, 신앙인의 기준으로 볼 때 신앙생활 잘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니 그야말로 완벽 중의 완벽, 완전 퍼펙트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이런 퍼펙트한 사람이다 보니 하나님도 욥만 보면 너무 뿌듯하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하나님의 자부심이 되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8절입니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이 사탄보고 “너 내 종 욥을 봤냐? 그 친구처럼 멋지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세상에 없어.”하고 말씀하신 거지요. 정말 욥을 향한 하나님의 자부심이 요즘 애들 말로 ‘뿜뿜’ 뿜어져 나오는 장면입니다. 저는 우리 효자의 성도들 모두가 이런 하나님의 ‘하나님의 자부심이 되는 사람’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왕 예수 믿을 거, 하나님이 여러분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시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자부심이 막 뿜어져 나오고, 여러분을 ‘그냥 두고 보기에도 너무 아까운 사람’으로 여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다!



이 말은 우리 교회에 두 번이나 부흥강사로 오셨던 장경동 목사님이 늘 설교 시작할 때 성도들에게 따라하게 하시는 말인데 참 멋진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다.” 이런 자부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이 이런 사람을 그냥 안 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그냥 두고 보기에도 아깝다.”고 하시는데, 사탄은 이런 사람을 정말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거에요. 이런 사람 그냥 두면 절대 안 되지요. 사탄 입장에서 큰일 나지요. 그래서 절대 이런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않고 반드시 넘어뜨리려고 시비를 걸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어보려고 하면 꼭 시련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이거에요.



그럼 사탄이 욥에게 어떤 시비를 거느냐? 우선 욥만 생각하며 너무 자부심 느끼시는 하나님 앞에 찬물을 확 끼얹는 말을 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욥기 1:9~11이에요. 교독합시다.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이 사탄의 말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첫째, 하나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둘째, 욥이 하나님 잘 믿는 건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러니까 그 복을 다 거두어 가시면 욥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하고 신앙을 저버릴 겁니다. 와! 엄청 논리적이에요. 3단논법에 의한 철저하게 논리적인 주장입니다. 사탄이 철학도 공부하나 봐요. 예, 맞습니다. 사탄은 엄청 똑똑합니다. 절대 우리 머리로는 이길 수 없어요.



사탄의 논리적인 말을 들은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욥은 절대 그럴 리 없다. 정 그렇다면 사탄 네가 가서 욥의 소유물을 다 쳐봐라. 하지만 그의 몸은 손대지 말라.” 하고 조건부 허락을 하시게 되지요. 자, 이렇게 돼서 결국 사탄은 1차로는 (욥기 1장) 욥의 재산을 다 쳐서 빼앗고, 2차로는 욥의 자식들을 한 자리에서 몰살시키고, 마지막 3차로는 (욥기 2장) 결국 욥의 건강마저 빼앗고 욥의 아내조차 욥을 비난하게 만듭니다. 결국, 3차에 걸친 시련으로 욥에게 있던 복들, 물질의 복, 자녀의 복, 건강의 복을 완전히 싹 다 빼앗아가고 만 것이지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겁니다.





❚ 까닭 없는 믿음이 여기 있다!



그런데 저는 욥기를 읽다가 이 사탄의 말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한 말을 요약하면 뭐라고요? 첫째,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둘째, 욥이 하나님 잘 믿는 건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러니까 그 복을 다 빼앗으면 욥은 틀림없이 신앙을 버릴 겁니다. 이 엄청나게 논리적인 사탄의 주장을 보면 말이죠, 여러분, 바로 이게 세상의 상식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전형적인 논리라는 겁니다. 설교 첫머리에도 말씀드렸지만 세상의 상식, 이 세상의 전형적인 논리가 뭡니까? “세상에 까닭 없는 사랑은 없다! 세상에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론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탄은 바로 이런 세상의 일반적인 논리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세상에 까닭 없는 믿음이라는 건 없다! 욥도 복을 받았으니까 잘 믿은 거고, 그거 없으면 그 믿음도 사라진다.”는 거지요.



오늘이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첫 번째 추수를 감사하며 드린 감사절기입니다. 7월 첫째 주일에 지키다보니 시기적으로는 1년의 꼭 절반을 보내고 나서, 한해의 절반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소중한 절기지요. 그런데 사탄은 감사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를 폅니다. “세상에 까닭 없는 감사, 그런 거 없다! 뭘 주셔야, 복을 받았어야 감사하는 거 아니냐?” 이겁니다. 이 말 속에는 그렇다면 하나님이 뭘 주신 게 없으면 감사할 일이 없다는 뜻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렇지요. 맞아요. 세상에 나한테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데 어떻게 감사합니까? 당연하지요. 그런데 사탄은 이 당연해 보이는 말 속에, 이 당연해 보이는 상식과 논리 속에 교묘한 함정을 파놓습니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이유로 우리로 하여금 이것만은 절대 못 가지게 하려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뭐냐?



까닭 없는 감사, 까닭 없는 믿음, 까닭 없는 사랑



이겁니다. 네, 세상에 이런 건 없다는 거지요. 여러분! 이 사탄의 논리, 교묘하게 세상의 논리 속에 숨겨놓은 사탄의 함정에 절대 빠지지 말기 바랍니다. 왜냐? 사탄은 이런 논리로 욥을 무너뜨리려 했고, 욥을 무너뜨리면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야, 욥 같은 사람도 저렇게 망하고 나니 하나님 원망하네?” 실족하게 만들려는 거니까요.



그런데도 욥은 이런 사탄의 교묘한 수법을 이겨냅니다. 물론 3장부터 41장까지 그 믿음 좋던 욥도 엄청난 고민을 하고 갈등을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기 억울함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욥도 사람이니까요. 우리도 다 사람이고 연약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면 아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 당연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결국 욥은 마지막에 철저하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42:5입니다.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 말은 “고난이 있기 전에는 내가 하나님을 귀로만 듣고, 이론적으로만 믿었지만 이제 고난을 받은 후 눈으로 직접 뵙고,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놀라운 고백이지요. 바로 이런 믿음으로 욥은 사탄에게 최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욥기를 읽다가 사탄의 말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사탄의 논리가 참으로 교묘하구나! 사탄의 논리가 세상의 논리와 상식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위장하고 있구나! 그러면서 오히려 이 사탄의 말, 바로 ‘까닭 없는 믿음’이라는 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탄의 말에 은혜 받았다니까 이상하네요. 하지만 사탄이 비꼬려고 한 말, 욥을 넘어뜨리고 하나님을 실망시키려고 한 이 말에 오히려 우리 믿음의 핵심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신기하죠? 사탄도 나름 머리 써서 이 말 해놓고는 “아차” 싶었을 겁니다. “아이쿠, 내가 그만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의 놀라운 비결을 알려주고 말았네.”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평생 가려면, 평생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려면, 특히 힘들고 어려울 때, 고난의 때 이겨내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까닭 없는 믿음’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유 없는 믿음, 무조건의 믿음, 하나님이 내게 뭘 해주셔서가 아니라, 뭘 주셨기 ‘때문에’가 아니라, 아무 까닭도, 이유도 없이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한테 뭘 해주셔서가 아니라 무조건, 까닭 없이 감사하는 삶, 이것이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신앙이요, 사탄의 모든 계략과 공격을 물리칠 능력이 여기서 나온다는 겁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황당하네! 세상에 까닭 없는 믿음, 까닭 없는 감사, 까닭 없는 사랑이 어디 있어?” 그때 여러분은 담대하게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어디 있기는, 바로 여기 있다! 바로 나한테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 까닭 없는 믿음과 감사가 세상을 이기고, 우리를 어떻게든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권세를 이길 능력과 권세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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