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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시는 사랑 (아8:6-7)

본문

질투하시는 사랑 / 아8:6~7




아8:6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1. 사랑과 질투



위 구절에서 '사랑'과 '질투'는 상호 호환이 가능한 동의어이다. *히 '킨아' (질투)


그래서 '사랑' 대신에 '질투'를 넣어서 읽어도 의미가 통하고,


'질투'대신에 '사랑'을 넣어서 읽어도 .. 의미가 통한다.



오늘 본문에서 ‘질투하는 사랑’을 보게 된다.


이 사랑은 ‘나는 네게 속했고, 너는 내게 속했다’는 소유로부터 비롯된 질투이다. 아6:3



요즘 사람들이 점점 옷을 시원하게 입고 다닌다.


성경에는 '아담하게 (단정하게)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지만, 딤전2:9


성경적 기준을 버린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다.



그래서 '하의 실종, 레깅스' 같은 낯부끄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일부 있는데, 주1)


남들이 그런 옷을 입고 다니면.. 대부분 모르는 채 하고 지나간다.



그런데 만약 자기 자녀나 자기 식구가 그런 옷을 입고 다니면,


그것을 길거리에서 목격한 부모는 고성을 냅다 지른다.


부모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남들이 다 보는 길에서도 큰 목소리로 고함을 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요, 곧 '질투'이다.



위 본문 8:6에 '그 질투의 불의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리라'고 했는데


습3:8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이렇게 나온다.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습3:8


얼마나 질투가 거센지.. 하다하다 안 되면 불사질러 버린다는 것이다.



이건 좀 전하기 껄꺼러운 '엄중한' 말씀이다.


주님이 신부를 너무 사랑하기에, 하다하다 안 되면,


기다리다 기다리다 안 되면.. 불을 보내신다는 것이다.


말이 안 되지만 '사랑의 불'이다. '질투의 불, 돌아오게 만드는 불'이다.



일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도 이 '질투의 불' 맛을 보았다.


그리고는 돌이켰다.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오라고 질투의 불을 보내셨고,


그 결과 예루살렘도, 성전마저도 불에 다 소멸되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왔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그 '질투의 불' 맛을 보기 전에 돌이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언약의 백성은, '불을 통과해서라도' 돌이키게 하신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질투, 즉 여호와의 사랑' 때문이다!




◑2. '질투'와 '열심'도 같은 의미



히브리어 ‘킨아’는 한 단어인데,


한글성경에 ‘질투’와 ‘열심’으로 다르게 번역되었다.



영어성경도 마찬가지로 ‘jealousy(질투)’ 와 ‘zeal(열심)’로 다른 두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원래 똑같은 단어 '킨아' 이다.



‘질투’는.. 그의 마음속에 ‘열심’이 있다는 뜻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질투’가 나오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질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의 질투’가 나오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해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열심’이 나오면, ‘하나님의 질투’로 이해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질투’로 번역한 구절 jealousy



출20:5, (십계명 2계명 후)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


*그 외 신4:24 신32:16



2) 하나님의 ‘열심’으로 번역한 구절 zeal *같은 단어 '킨아'



사37:32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사9:7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 외 사63:15 등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많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등


그 하나님 이름 중의 하나가 ‘질투’이다.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열심'이란 뜻도 되고, '사랑'이란 뜻도 되는 질투이다.



하나님의 성품도.. ‘질투’이다.


종종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름이 ‘질투’일뿐만 아니라, 성품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즉 열심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질투’는 하나님의 성품 중 가장 중요한 성품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이시듯이


동시에 ‘질투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모든 율법을 가장 압축하면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의 처음 두 계명이, ‘질투의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1~2계명을 천명하신 직후에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천명하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출20:3~5



‘질투’는 그만큼 하나님의 우선적이면서, 중요한 성품이란 뜻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적인 질투와는 다르다.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는.. 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의 그림자도 없으신데,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분이란 말은


이것은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질투와 시기는 비슷한 말 같지만.. 약간 다르다.


질투는 jealousy 는 사랑하기에 그를 아껴서 하는 것이라면,


시기는 envy 그야말로 그와 경쟁하는 마음이고, 종종 악하게 쓰인다.


*이 구분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학적인 정의가 아니며, 성경적인 개념임




◑적용



▲1. '하나님의 질투'에 나의 소망이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되


점 없고, 흠 없는 거룩한 교회로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고 성경에 나온다.


또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 앞에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권면한다. 벧후3:14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하신 교회(성도)로 회복되어지는 것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 들림 받을 주의 거룩한 신부로 회복되어지는 것은


우리 인간의 관점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현실을 보면,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변모할 것이라는 것은,


인간적 관점으로는 완벽하게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질투/열심을 가지고.. 이루실 것이다.



또한 실제로 지금 그렇게 이루어져 가고 있다.



내가 처한 환경을 보고, 내가 나 자신을 보면.. 굉장히 절망적이지만


정말 '정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가 되겠나?' 싶지만



우리가 항상 낙관적으로 미래를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질투가).. 그것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앞서 아6:3절에서, 신앙의 최고 경지는 '주님과 연합'이며


주님과 연합된 신부는, 주님의 생각을 자기도 똑같이 가진다고 했는데,



그래서 주님과 연합되어, 주님의 심정을 가진 성도는


종종 교회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질투의 심정을 자기도 가지게 되며


그 마음이 들어서야.. 중보기도가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질투심이 자기 마음에 없으면, 교회를 향한 중보기도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중보기도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윗, 바울, 모세,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분들 속에 하나님의 질투가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질투를 갖고서 중보기도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투를 나도 갖는 것은


내 신앙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부흥을 기다리고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회복시키기 원하시는데,


이 놀라운 일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질투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3. 그런데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하면서 어떻게 질투하느냐? .. 라고 질문할 수 있다.


고전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질투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전13:4



여기서는 ‘질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본문 아가서 8:장에는 ‘질투하는 사랑’이 나온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아8:6



그러면 사랑으로 질투하는 것이 마땅한가, 사랑하기에 질투하지 않아야 하는가?


고린도전서가 맞는가, 아가서가 맞는가?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 사랑이 누구를 위한 사랑이냐? .. 하는 것이다.



‘사랑은 질투하지 않는다’고 할 때, (고전13:4)


나를 위해서 질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질투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때는


사랑은 너를 위해서 질투하는 것이다. (아8:6)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질투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질투하신다.



그렇게 우리를 위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임을 보게 된다.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그 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질투하시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 분의 사랑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질투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강렬한 사랑인지요!



..........



여러분, ‘모든 고통은 내가 나한테 집중하고 있다!’는 싸인이다.


‘모든 평안은 내가 주님께 집중하고 있다’는 싸인이다.



여러분, 나를 묵상해 보시라.


끝없이 묵상하면.. 자살하게 된다.



왜 자살하는지 아시는가?


‘나만 골똘히 생각하다가’ 죽는 것이다.


자기 신세만 한탄하다가 숨을 끊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들어서 (나를 질투할만큼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질투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분께 시선을 두고, 그 분께 초점을 맞추면


여러분이 어디 있어도, 초막이나 궁궐이나


평안이 임할 줄로 믿으시라!



.......................................................................


주1)


'하의 실종'이란, 여성이 긴 셔츠 속에 짧은 바지를 입어서, 얼핏 보면 하의를 안 입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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