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망, 산 믿음, 산 복음 (벧전1:3-12)
본문
산소망, 산 믿음, 산 복음(베드로전서 1장 3-12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 나오고,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라는 대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일생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대개 세 가지 정도로 압축 할 수 있습니다.
①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항상 인식 하는 것,
②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창조-구원-심판-영생)을 믿고 선포하는 것, ③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씀에 순종하며, 약속하신 소망중에 살아가는 것
이 세 가지를 잊지 아니하고 잘 이루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가려는 목적을 잘 지켜 나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목적인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저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행동이, 감사와 기도와 찬양 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심에 대한 영원한 감사,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영원한 기도, 하나님이 평안 주심에 대한 영원한 찬양, 이 세가지가 일상에서 끊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 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요리리문답 1문의 내용만 잘 이해하고, 실천 해 나가신다면, 신앙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하나님)를 영원히 즐거워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람이든 즐거운 일이 생기면 표정부터 바뀝니다. 얼굴에 미소가 생기고, 웃음소리가 나고, 몸에 활력이 나고, 마음에 평안이 가득합니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도록 흥이 납니다.
하나님을 향해 흥에 겨워 무심코 흘러 나오는 (콧)노래가 곧 찬양입니다. ‘찬송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시 22:3) 이라는 말씀이 있듯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항상 입술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달고 살아갑니다.
찬송을 잘 부르고, 못 부르는 것에 상관 없이, 찬송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찬송하게 하려고 지으셨다(사 43:21)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평소에 찬송을 얼마나 즐겨 듣고 계시고, 얼마나 즐겨 부르고 계시나요?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자동적인 반응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으며, 찬송을 부르며 살아가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람으로서의 가장 첫 번째 목적을 이루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 편지를 쓴 대상은 2절에 기록된 것처럼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곧 이 땅의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편지의 수신 대상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모든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찬양(찬송, 노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산 소망’이 있기 때문에,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고 부연 설명을 합니다.
3절을 보시면, 산 소망이 있게 된 원인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 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 두가지의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물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듭났다(중생, 의인)’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산 소망’의 실체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의 은혜를 입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부활 영생의 소망을 받았고, 성령님으로부터 위로와 인도함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는 ‘산 소망’이 이미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산 소망’이 주어진 모든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산 소망’을 허락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송(찬양)하며 살아가야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산 소망을 선물로받은 그리스도인 이라면, 찬송하며 살아가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용서하시고 사랑)하심을 입으셨나요? /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 영생 소망으로 살아가고 계시나요? / 여러분은 성령으로 인해 거듭났다, 새 사람이 되었다,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계시나요? / 이 질문에 “아멘”이시라면, 여러분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산 소망’의 주인공들 이십니다.
그렇다면, ‘산 소망’이 있는 나에게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찬송)하며 살아가야 이유가 차고도 넘치게 충분합니다. 여러분, 이제는 앉으나, 서나, 움직이나, 잠을자나, 우리 인생에서는 저절로 하나님에 대한 콧노래가 흘러 나오도록 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눈치 보지 않고 큰 소리로 찬양을 마음껏 부르며 살아가시는 ‘산 소망’의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산 소망’은 죽은 소망에 대한 반대 의미로, 그저 단순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소망 자체가 생생하게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 소망’이 나에게 능력으로 역사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냐 하면, 모든 사물의 밝은 면을 보게 되고, 모든 사람의 내면을 훤히 볼수 있게 되고, 모든 판단을 내릴 때 명확한 분별력을 갖게 되고, 모든 어려움의 사건 사고에서 안전한 통로를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 납니다.
이것이 ‘산 소망’을 지닌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리며 살아가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정말 만만하지 않습니다. 온갖 모진 고난과 고통의 시련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은 ‘산 소망’으로 우리에게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외적인 고통은 다 이겨내게 하시고, 내적인 기쁨과 평안은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가르쳐 준 ‘산 소망’의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 소망’으로 살아가는 참 된 그리스도인들은, 입술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즐겁고, 그저 감사하고, 그저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인생, 그 인생이 ‘산 소망’을 이미 간직한 우리 모두의 남은 인생의 모습입니다. 생각만 해도 행복해 집니다.
4절에서, 이 ‘산 소망’은 “썩지도 않고, 더러워 지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유업(유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유업(유산)은 돈이나 자존심이 아니라 바로 ‘산 소망’에 있습니다. ‘산 소망’의 유산만 있으면 하나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충분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님의 거듭남의 은혜를 허락 받은 ‘산 소망’의 주인공임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의 택함받은 자녀로서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시며, 늘 기쁘고, 늘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또한 ‘산 소망’의 주인공들에게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유업(유산)을 받게 하셨다고 했는데(4절), 그 유업의 실체가 곧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 이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말세(심판의 날)에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이라고 강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자들을 주목하여 지켜 보시고, 그 믿음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소망과 마찬가지로 믿음 이라는 단어도 추상적인 단어일 뿐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산 소망’이 되어 엄청난 능력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믿음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여 주시면,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보호해 주시는 ‘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산 믿음’이라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을 미래에 구원을 받게되는 약속이 됨은 물론이고, 당장 살아가기 만만치 않은 내 삶의 팍팍하고,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넉넉하게 이겨 나가고, 승리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6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 아래 보호 하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아멘.
이렇게 믿음의 힘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쁨으로 역사 합니다. 이것이 ‘산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해 주심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에 믿음이 더하여 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이 오게 될지라도 잠깐은 근심하게 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어 오뚝이 같이 계속 일어납니다.
결국에는 모든 시험과 고난을 이기게 되어, 크게 기뻐하는 승리자가 됩니다. 고난 가운데에서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이, 바로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심겨진 ‘산 믿음’의 능력이요, ‘산 믿음’의 역사입니다.
저와 여러분 마음에 이토록 놀라운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우리는 죽어 있는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의 주인공들입니다. 닥쳐오는 시험과 고난은 피해 갈 수 없겠지만, 여러분에게는 ‘산 믿음’이 항상 역사하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산 믿음으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승리자로 크게 기뻐할 일만 남았다는 사실, 이 하나만 항상 잊지 마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당당하게, 거침 없이, 승리의 길로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이렇게 ‘산 믿음’은, 모든 시험과 고난을 이겨내고 크게 기뻐하는 승리의 요인이 되지만,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산 믿음’의 역할이 있습니다. 8, 9절을 읽어 드립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아멘.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 앞에서 평가를 받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7절에서,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각각 어느 정도인지가 다 드러나게 된다고 했는데, 이 때 불로 연단한 금은 다 녹아서 사라질 지라도, ‘산 믿음’은, 우리 주님 앞에서 확실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이러한 ‘산 믿음’을 보시고,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으로 판정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이렇게 ‘산 믿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영혼을 구원하는 판정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산 믿음’은 두 가지로 정리 할 수 있습니다. ① 모든 시험과 고난 중에도 잠깐은 근심 할 수 있으나 크게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이고, ② 결국에는 내 영혼의 구원을 이루어줄 것이라는 확신한 믿음, 이 두 가지가 ‘산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산 믿음’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가든지, 영혼으로 살아가든지, 가장 중요한 유산 중의 유산입니다.
우리의 ‘산 믿음’은 날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주님 앞에 서게 될 그 날이 점점 다가올수록, 계속 성장하고 굳세져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의 ‘산 믿음’이, 고난 가운데에 크게 기쁨으로 역사하시길 바라고, 결국에는 영혼의 구원을 얻게되는 진정한 ‘산 믿음’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산 소망’, ‘산 믿음’이 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도 그냥 복음이 아닌, ‘산 복음’이어야만 합니다.
10, 11절에는 구약시대부터 예언 자들이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알려 주신 대로, 고난과 영광을 받을 자가 누구이며, 그로 인해 은혜를 받을 때가 언제인지를 늘 상고하여 왔다고 합니다. 12절에서, 성령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분과 그 때를 드디어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이셨다는 겁니다.
복음 되신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고, 영원히 살아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복음은 ‘산 소망’, ‘산 믿음’과 마찬가지로 ‘산 복음’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전서 2장 4절에서 ‘산 돌’ 이신 예수께 나아가라’라고 하면서, 복음이신 예수님을 ‘산 돌(머릿돌, 주춧돌, 터, 반석 등등)’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산 돌’, ‘산 복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살고 있음을 늘 확신해야 합니다.
그 확신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항상 ‘산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산 복음의 능력과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모습일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을 바울 사도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2장 13, 14절을 읽어 드립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아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라고 했는데, ‘강권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힘으로 계속 밀어 부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곧 구원하여 주시는 능력입니다. 이 사랑은 그냥 한 번 받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은혜에 합당하게, 그 사랑의 능력에 힘입어 삶 속에서 사랑 받은 자 답게 살아가도록 ‘강권’함을 받는 살아 역사하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강권함을 받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직 ‘산 복음’을 위해서만 살아가라고 계속해서 사랑으로 강권하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뜨거운 사랑의 강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힘쓰고 애써야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제가 늘 강조하는 신앙의 기본생활인, 예배, 기도, 말씀, 찬양, 감사 이런 것들 일까요? 아니면 봉사와 전도 이런 것일까요? 이런 것들이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순종의 일면일 수는 있겠지만, 가장 최 우선 순위는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서,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최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산 복음’이신 우리 주님과 ‘화목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화목은 말 그대로 서로 사이가 좋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예배와 기도 등의 신앙적인 행위를 했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삶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화목을 잘 이루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①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기를 습관으로 실천하는 사람,(언행일치)
② 성령으로 진실되게 회개하기를 힘쓰는 사람, (성령 충만)
③ 범사에 감사하며, 작은일에 묵묵히 헌신 봉사하는 사람, (섬김 헌신)
④ 묻고, 순종하는 삶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가는 사람 (거룩 성숙)
이런 모습은 화목을 관계를 잘 이룬 사람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논 농사 지을 때, 가뭄에는 양수기를 이용해서 논에 물을 대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성능의 양수기 모터가 돌아간다해도, 물을 대주는 호스가 양수기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하루 종일 양수기를 가동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과 ‘화목’을 이룬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호스를 연결하면 화목이요, 호스가 빠져 있는 것은 화목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산 복음’이신 우리 주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일, 좋은 일, 성과을 이루어 낸 일을 하든지, 그것은 나를 위한 일이 됩니다. 그것은 나를 위하여 살아낸 결과 물이지 우리 주님을 위하여 살아낸 결과로 인정 받지 못합니다.
복음이 복음되게 살고 싶으신가요? 사랑으로 강권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의 뜻에 따라, ‘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싶으신가요? 그러시다면, 만사 제쳐 두고 우리 주님과 ‘화목’을 이루는 관계 개선에 가장 먼저 집중하십시오.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발 아무 것도 하지 마십시오. 다 헛수고일 뿐입니다.
복음은 은혜의 선물이지만, 분명하게 살아 역사하고 있는 ‘산 복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산 복음’을 받은 우리는, 평생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오직 그 분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오직 예수님을 증거 하며 살아가라는 권면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산 소망’, ‘산 믿음’, ‘산 복음’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갈 힘이 생기고 능력을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나의 인생은 오직 나를 위해서 죽으신 우리 주님만을 위해서 나도 죽도록 충성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충성되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주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 급선무인 것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에게는, ‘산 소망’, ‘산 믿음’, ‘산 복음’이 있음에 늘 감사하시고, 늘 높은 자존감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선배인 베드로 사도처럼, 바울 사도처럼,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받아 영생복락을 누리는 진정한 구원 승리를 얻는 그날 까지,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하루하루를 충성되게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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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는 산 소망, 산 믿음, 산 복음을 주셨으니,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하게 하시고, 믿음의 결국인 영혼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복음의 능력을 담대히 전하며, 충성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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