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바랄수록 시간이 소중합니다 (엡5:15-21)
본문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않는 성도들을 ‘잠자고 있는 성도들’로 분류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지식적인 정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날마다 삶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것을 ‘잠자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잠은 매우 위험한 잠입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시대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때입니다. 중세교회 시대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반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왜 예수님의 재림이 오는가?”라고 항의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AD 32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교회와 국가가 연합함으로써 핍박이 사라지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평안함이 한편으로는 유익하지만 다가올 미래,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지 않는 영적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성도들을 ‘깨어있는 성도들’로 분류합니다. 깨어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어떤지 보려면 공항에 가면 됩니다. 입국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입국장을 주목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데 바로 그 모습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떠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주목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믿음의 삶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잠자는 성도입니다.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삶의 변화를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시간과 영원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믿을 때 이 세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역사가 끝나고, 영원이라고 불리는 역사가 회복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됩니다. 현재의 순간도 잠시 후면 과거가 되고 맙니다. 미래였던 내일도 내일이 되면 현재가 되고, 또 과거가 됩니다. 이렇게 미래, 현재, 과거로 흘러가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공간과 물질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등 첫째, 둘째, 셋째 날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구분하셨고, 시간의 흐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고, 만물의 마지막은 보이는 만물의 마지막만이 아니라 시간의 마지막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마지막 때를 향하고 있고, 그 시간의 마지막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입니다. 우리는 영원이라는 차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시간과 영원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시간이 길어진 것이 영원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모든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회심의 여정을 기록한 후반부에서 시간과 영원이라는 주제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아마 기독교 신학자 중에서 최초로 시간과 영원의 문제를 성경적인 복음의 관점에서 기술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두 문장이 됩니다.
“시간은 항상 머물러 있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로 지나가는 것이다.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현재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항상 현재에 계십니다. 과거에도 현재로 계셨고, 미래에도 현재로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세월은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세월은 언제나 현재이고, 동일하며, 오늘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가지고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영역입니다. 언제나 현재이신 하나님,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 언제나 오늘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시간의 흐름을 창조하시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 만물을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시계)’와 ‘카이로스’(사건)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엡 5:16).
이 말씀을 영어성경은 ‘시간을 구속하다’, ‘시간 다시 사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현대 언어로 번역 될수록 ‘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하라’고 합니다. NIV에서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고 번역합니다. 기회의 활용이라는 의미로 다양하게 번역합니다. 제한된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기회를 극대화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의미만 있을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시간의 마지막이 온다는 것을 기억할 때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프리카 남단에 가면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생활하는 ‘스프링복’이라는 영양이 있다고 합니다. 이 영양 떼가 종종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서 학자들이 조사를 했습니다. 스프링복 영양은 식욕이 왕성해서 풀을 먹는데 앞에 있는 영양보다 뒤에 있는 영양이 앞에 있어야 풀을 많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더 빨리 달리고자 합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영양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뒤에서 달려오는 영양보다 더 빨리 가려고 달립니다. 목적은 풀을 많이 먹고자 하는 것인데 서로 경쟁이 가열 되어서 속도가 계속 빨라집니다. 그 스피드가 시속 94km나 되어서 치타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빨리 달리다 보면 처음에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를 잊은 채 무작정 달리게 됩니다. 앞에 절벽이 있는지, 바다가 있는지도 모르고 달리다가 떼죽음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우리에게는 처음 목적을 잃어버리고, 스피드를 조절하지 못해서 떼죽음 당하는 영양과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 중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빨리빨리’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언어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함으로 제한된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성취하는 인생으로만 해석하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사역했던 윌리엄 맥코넬은 시간의 관점에 따라서 문화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미래지향적 문화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입니다. 미래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을 따라 행동하는 문화입니다. 이 문화 속에서 시간관리가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건지향적 문화입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사건에 얼마나 충실하였는지에 관심을 두는 문화입니다. 어느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한 해를 구성하는 사건들이 다 이루어져야 한 해가 끝난 것으로 봅니다. 시간을 숫자가 아니라 사건으로 계산합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으로 번역할 수 있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시계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 목적이 이루어지는 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대개 우리의 시계는 크로노스에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의 시계는 카이로스에 의해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신 육체적 나이는 33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카이로스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일에 쓰기 때문입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없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도 후회가 있는 것은 카이로스의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면 우리 삶은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자하면 카이로스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서서히 일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랑이 아니셨다면 세상은 벌써 끝났을 것입니다. 세상은 벌써 심판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 오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간은 서서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왜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더디 오는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내하시기 때문이다. 재림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디 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 얻기까지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독특한 시간계산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내년이 2020년입니다. 주후(AD) 2020년입니다. 2020년을 시간계산법에 대입하면 예수님이 오신 지 이틀이 조금 넘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장구한 시간처럼 보이는 2,000년이 넘는 세월이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볼 때는 이틀 참으신 것입니다. 어쩌면 3,000년이 되어도 예수님이 오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루만 더 참자”라고 하시면 천년이 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천년이 너무 길고 긴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시간계산법은 더딘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언제나 더디게 계산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진 우리 시대는 뭐든지 빨리 추구하면서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시간을 구속하는 유일한 방법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을 번역할 때 왜 ‘시간을 다시 산다’는 의미로 번역했을까요?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를 “시간을 사탄으로부터 다시 되찾아 사오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탄은 시간의 영역까지 침투해서 삶을 혼합시킵니다. 우리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조급하게 만듭니다. 두려워하게 합니다. 또 욕심을 부리게 합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욕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우리 시간의 끝인 죽음을 이용해서 두렵게 합니다. 죽음은 시간의 끝이 아님에도 사탄에 속는 자들은 시간의 끝인 죽음을 오해해서 절망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고,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탄에게 시간을 빼앗긴 것입니다. 사탄이 빼앗아간 시간을 다시 되찾아 오는 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이 시간 끝에서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시간을 되찾아올 수 없습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시간에 파묻혀 휩쓸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구속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원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영원으로 되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살 때 우리의 시간은 더욱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장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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