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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의 추억 (롬4:1-12)

본문

남자에게는 나름 할례의 추억이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포경수술입니다. 요즘은 어느 나라나 보편화되어 태어나자마자 아예 산부인과에서 시술을 합니다만, 2차 대전 때까지만 하더라도 할례는 유대인만의 종교의식이었습니다. 유럽에서도 유대인만의 전유물이었지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위시해 전 유럽을 이 잡듯 하며 유대인을 색출할 때도 겉모습으로는 구분이 잘 안 되니, 그 사람의 할례여부로 유대인을 판별했습니다. 유대인은 나라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남자는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생상의 문제로 하지만, 유대인에게는 할례가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남성은 주로 군에서 많이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군에서 해결하고 제대했습니다. 그래서 다 개인적으로 할례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부대 내 의무병에게서 받은 기억이, 어떤 이는 사제 병원에서 했던 추억, 어떤 이는 군에서 단체로 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본문은 누구의 할례의 이야기입니까? 12절을 보면 할례자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할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 추억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와서 할례를 시행하지만, 이스라엘은 4000년 전 아브라함 때부터 시행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할례의 원조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할례와 관련하여 본문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본문이 새삼 아득한 옛날의 할례를 들먹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핵심은 간단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의 인물인 아브라함의 소명과 구원과 복이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할례를 받은 데 대한 보상이나 반대 급부냐, 아니면 할례 이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순수한 선물이고 은혜냐입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이 할례 이전이냐 이후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다음주일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로마 가톨릭 가르침에 대한 95개 조의 반박문을 내걸고 종교개혁을 기치를 들었던 것이 15271031일이었습니다. 지난 달 말 미국의 퓨리서치에서 교회에 관한 설문을 발표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으로 실시한 설문입니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개신교도 가운데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믿음만이 아니라 선행도 해야 받는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미국과 유럽의 개신교도 60%가 개신교와 가톨릭이 다를 바 없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루터나 츠빙글리는 믿음도 필요하고 공덕도 쌓아야 한다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거짓이라고 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시작된 겁니다. 이제는 그 원초의 종교개혁 정신이 그만큼 퇴색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답한 미국 개신교도들은 46%, 믿음과 선행이 함께 해야 구원 받는다고 답한 사람은 52%였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가톨릭의 구원관입니다. 이것에 반기를 든 게 개신교입니다. 이제는 미국과 유럽의 개신교도들이 52%가 믿음뿐 아니라 선행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답한 겁니다. 유럽에서는 26%만이 믿음만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선행 모두 필요하다고 한 유럽 신자들은 46%, 독일에서는 무려 61%가 믿음과 선행이 모두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칼빈이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제네바가 있는 스위스에서는 57%가 믿음과 선행 둘 다가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오직 믿음이라는 개신교의 중심사상이 종교개혁의 본고장에서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요?

 

저는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평소 교회에서 신앙훈련이 제대로 안 이루어진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교회에서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잘 모르는 겁니다. 개신교 신자이면서도 성서적, 교리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상식, 도덕적 관념, 윤리적 판단으로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양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윤리나 도덕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전문적 교육이 없으면 사람들은 윤리로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다른 하나는 개신교회가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는 교리만 내세우고 선행에 너무 소홀한 데 대한 반동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의 교리가 선행이나 율법 무용론을 뜻하는 것이 아님에도 실제로 개신교회가 윤리 도덕적으로 부조리를 저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점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가 요즘 개독이 되었습니다. 왜요? 딱 이 문제입니다. 믿음만 강조했지 행함이 없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아브라함의 할례와 구원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79절 이하입니다.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그러니까 유대인들의 할례는 그것이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요 언약의 표징이요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의 절대적인 물증입니다. 이렇게 할례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경우 그의 구원이 언제 이루어졌다고 합니까?

 

 

본문 10절입니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무할례 때 아브라함의 구원은 결정되었습니다. 무할례 때 아브라함은 소명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그가 율법을 잘 지키고, 할례를 받고, 하나님을 잘 믿어 의롭다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게 있습니다. 그러나 무할례 때, 율법을 지키기도 전에,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고 부르셨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랑할 게 없습니다. 할례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 아브라함은 부름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첫 소명 장면이 창세기 12장에 나옵니다. 1-2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오직 우상만 섬기며 살았습니다. 여호수아 242-3절입니다.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아브라함의 아버지 강 저쪽에서 거주하며 다른 신을 섬겼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거기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을 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강 저쪽은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입니다. 강은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어떤 곳입니까?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옛 바빌로니아, 오늘날 이라크 남부지방 일대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데라는 그곳에서 갈대아 사람의 우상 달의 신 나나를 제작해 판 장인이었습니다. 그때는 종족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이방신을 믿으면 아들도 당연히 그 신을 섬겼습니다. 요즘 같으면 부모는 절에 가도, 자식들은 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당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비 데라와 함께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거기에서 그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할례를 받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산 것도 아니고, 그저 이방 신을 섬기며 하나님과 상관없이 산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가나안을 향해 가게 하시고 그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삼으실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거나 채비를 갖춘 게 아닙니다. 그는 졸지에 일방적으로 구원을 당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습니다. 아브라함 소명장이 창세기 12장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최초로 언급된 곳은 창세기 15장입니다. 5절 이하입니다. “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세기 12장과 15장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10년도 넘습니다. 부름받고 구원받은 때가 언제인데 그제서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고,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의로 여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게 10년 전인데 그제서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고 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할례는 어디에 나옵니까? 창세기 17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15장과 17장의 시간적 간격도 13년이 넘습니다. 아브라함의 구속사적 이력, 영적 순례는 창세기 1275세에 처음 부름 받아 구원 받고, 10년 뒤 85세에 의인이라 여김 받고, 13년 후 99세 때 비로소 할례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헌신해야 구원을 받고, 천국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늗데, 아브라함은 그것과는 반대 수순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가장 완벽한 믿음의 모델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모델을 본받아 그가 걸은 그 길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시험하신 곳은 창세기 22장입니다. 이삭의 나이 15세 쯤될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그가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12절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잘 믿어서가 아닙니다. 구원과 복은 할례 이전,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행사로 이뤄진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개신교도의 정체성을 놓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 받겠다고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공기, 태양, , 우리 심장, 목숨 등은 우리 생존에 절대 필요한 것이기에 값 주고 살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너무 소중하기에 값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도 필요하지만 선행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다 틀린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선행을 행해야 그 반대급부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은 값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베푸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죽을 때까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감사하기에 그렇습니다. 이제는 율법적 강요가 아니라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경건하게, 빛과 소금, 그리스도의 향기로 사는 것입니다. 내 구원에 대한 감사의 응답입니다. 선행도 필요합니다.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해서입니다. 부디 율법과 복음, 할례와 구원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제대로 믿어, 언제나 개신교도 답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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