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질서 (창1:1-5)
본문
"질서는 편리한 것, 질서는 아름다운 것" 가끔 보는 문구이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도 질서가 좋은지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진국에서 질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질서가 몸에 배어 있다. 어디든지 가면 줄을 선다. 운전에도 절대로 얌체 짓은 없다. 아무리 줄이 길어도 끝에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긴장하지 않고 여유가 있다.
이러한 습관은 사회생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일 중요한 일을 먼저하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 또 그 다음으로 이어진다. 시간의 배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꼭 해야 될 일을 뒤로 미룬다던지, 회사의 일을 집에까지 가지고 와서 고민하면서 괴로워하거나 다른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없게 된다. 이것이 삶의 질서이다.
그저 보통 사람들처럼 살려면 이 정도로 완벽한 삶이 된다. 그들의 수준에서 가장 훌륭한 삶은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보자. 인간적인 수준이 아니라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수준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존재를 인식하고 삶의 질서를 잡아보자. 그렇게 되면 가장 중요한 일의 기준은 달라진다. 그리고 그 질서의 댓가는 놀라운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을 한다. 직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순서상 상사에게 인사하고 지시사항을 받은 뒤에 일을 시작할 것이다. 하루 일을 마친 다음에는 가족들을 만나서 함께 식사를 나누며 사랑의 교제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일은 반드시 있어야 할 질서이다. 가정과 일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서의 대상이다.
이것은 영원한 질서의 그림자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한다. 신자로서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해시의 신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배한다. 예배가 있는데도 체포될까 두려워서 참예하지 않는 것은 신앙의 포기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예배를 하면서 찬송과 기도와 헌금을 통해서 경배한다. 그리고 말씀과 축도로 복을 받는다.
예배로 신자의 할 일이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가족이다. 가족들끼리는 교제가 있어야 한다. 교회의 어른들과 인사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묻는다. 뿐만 아니라 작은 여러 구룹으로 나뉘어져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야 한다. 여유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먼저 약한 교우들을 도와야 한다. 그래서 명실공히 거룩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예배당의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에 참석하면 신자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좋은 설교나 듣고 돌아가는 것으로는 예배가 부족하다. 실제로 가족의 일원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서로 은사를 나누어야 한다. 구성원 각자는 각가지 장점으로 서로에게 영향과 도움을 주어 신앙을 북돋고 그리스도의 몸을 강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는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게 된다. 그냥 착한 사람으로 교양 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능으로 신비한 삶을 살아간다. 자기의 사업도 누구보다 잘 해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나누어준다. 정말로 신자 한 사람이 소금 역할을 하여 부패와 분열을 없애고 평화와 용기의 사도가 되어 자기 있는 곳을 비춘다.
이것이 신자들이 원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을 향해서 기대하는 삶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리스도의 말씀이요 그에 대한 확신이다. 여기서 믿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의 실천은 예배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 힘의 근원으로 인정하는 것이요, 사랑하고 경배할 유일한 대상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요 또한 고백대로 이루어진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악한 영주의 저주 아래 고통 받는 농노가 있었다. 죽기 직전에 겨우 탈출을 하게 되었다. 그가 자신과 가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은 황제를 만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은 일, 천한 존재가 어찌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겠는가. 궁전 밖에 숨어 배회하며 도울 사람을 찾았다. 황제의 측근을 구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쓰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현하는 것은 농노가 황제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 농노는 황제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였다. 어찌 원수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랴! 만나도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또한 만난다 해도 정의로운 하나님 앞에 죄인이 어찌 설 수 있겠는가. 불을 만난 짚단처럼 살라져 망해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인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다. 죽음은 삶의 모든 면에 저주의 그림자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영원한 지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구원의 방도를 위해서 준비단계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구름 뒤에서 그들에게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 죄의 해독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양을 잡으라고 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들은 양을 가지고 왔다. 양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양들도 무엇인가 두려움을 눈치채고 떨고 울고 있었다. 그 양들의 목을 잡고 칼로 베었다. 피는 쏟아지고 양들은 눈을 뒤집고 쓰려져 경련하며 죽어갔다. 사람들은 양을 보고 말했다. "내 죄 때문에 죄없는 네가 내 대신 죽어가는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앞에 와서 예배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매 안식에 매 월삭에 그리고 절기 곧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휘장 밖에서 예배할 뿐이었다. 오로지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두려움에 떨면서 휘장 안에 들어가서 경배하였다. 얼마나 많은 대제사장이 여기서 죽었는지!
예배를 마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날의 나머지를 안식했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이다. 율법을 지키지 못했던 죄의식, 죄의 댓가로 양을 죽이는 경험, 그리고 그 무서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져야 하는 당위성은 문자 그대로 공포의 감정이었다. 그들은 안식해야만 했다. 그렇게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복을 받게 되었다. 적군이 처들어와도 그들은 안식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예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종이었다. 여전히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었고 자기 백성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로지 땅의 복만을 주었고 외형적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렇게 완벽에 가깝도록 율법을 지켰어도 그것은 외형뿐이었다. 마음은 여전히 죄악에 빠져있었고 천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그림자를 남겨놓고 하나님은 축복의 본체를 허락하셨다. 죄를 해결할 어린양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그 양은 인간의 죄를 짊어졌다. 그것도 삼십 삼 년을 그렇게 하였다. 특별히 마지막 몇 일은 완벽한 제물로서 고난의 절절이었다. 그는 온 몸이 매로 피투성이가 되었고 마지막의 물 한방울까지 다 쏟고 죽어갔다. "우리 죄 때문에 죄 없는 당신이 우리 대신 죽었습니다."
이제 이 양이 우리의 죄를 짊어졌음을 믿는 사람들은 새로운 특권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면전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지만 특별히 신자들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감사의 찬양을 하며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문제를 아뢰며 헌금을 드려서 보잘 것 없는 예물을 하늘 황제께 올리게 된 것이다. 이 예배가 신자의 삶의 기본이요 출발점이다.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무엇이 예배자들에게 유익을 제공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어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 주셨는지 설명해 준다. 그리고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드셨는지 깨우쳐준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축복을 내려준다. 여기 믿음을 합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가? 이 예배의 경험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성례를 베풀어준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심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와 살을 주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음을 눈을 보고 손으로 만져 경험하고 믿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복을 깨닫고 그것을 통해 위대하게 살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성령이 함께 일해서 마치 그리스도가 직접 그 모든 일들을 진행하는 것과 같은 효력을 주신다. 예배는 그 시작하는 시간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을 의식하면서 해야 한다. 성령이 충만한 것을 믿음으로 알고 마음으로 느끼게 하라. 우리의 믿음이 분명할수록 함께하신는 성령으로부터 받는 여러 유익은 더욱더 확실하게 우리의 것으로 누려진다.
예배는 한마디로 신자의 삶의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모은 것이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는 모든 과정이 한 시간 속에 들어있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끊겨질 것이요 모든 축복으로부터 제외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제하지 않는 이도 모든 축복을 다 골고루 누리지 못할 것이다. 성령이 은사를 사람마다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흑암을 없애지 않았다. 혼돈을 정리하지도 공허함을 메꾸려 하지도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외로움과 허전함, 아픔을 무엇으로 메꾸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명령한다. "빛이 있으라." 이것이 우리 질서의 확실한 방법이다. 빛이 비쳐 들어오면 모든 어둠의 문제는 사라지고 기억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빛이 우리 속에 비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예배는 하나님 만나는 모든 방법이 다 요약되어있다. 기도와 찬송과 헌신 그리고 축복과 말씀와 은사가 다 그 속에 들어있다. 이것이 바로 빛을 받는 길이다. 축복받은 사람들치고 예배를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다. 아무리 멀고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예배는 우리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창조의 시작은 빛을 받는 것이다. 모든 혼돈과 문제의 해결도 우선 빛을 받는 것이다. 우리 삶의 시작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빛을 받고 일을 시작한다. 태초의 질서가 빛으로 되었듯이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새해의 첫날 그리고 일 주의 첫날을 예배한다. 말씀과 축복의 기도로 시작한다. 그리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서로의 은사를 나눈다. 거룩한 질서 속에 삶이 시작된다.
몸이 예배한다고 마음까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행위의 예배로서 완전한 예배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곧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예배를 참예해야 한다. 아름다운 복장으로 오라. 미리 와서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하라. 그리고 예배를 마친 뒤에도 주일 하루를 쉬면서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일주일을 계획하며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준비한다.
다시 말하노니 예배는 빛을 받는 가장 최상의 방법이다. 인간의 본성은 예배를 기뻐하지 않는다. 어둠을 좋아하고 빛에 나오기를 싫어한다. 신자가 되어서도 옛사람의 일을 여전히 끊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하는가? 예배에 참석하기 싫을 때가 가장 예배가 필요한 때이다. 예배하지 않는 신자는 빛이 없이 창조하려는 사람과 같다.
공식 예배 말고도 신자들은 시간을 내어서 만나는 것이 좋다. 만나서 어떤 일을 하려는가? "무릇 더러운 말을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세상에서 하는 풍습을 거룩한 모임에 끌어들이지 말라. 화토와 술과 음란한 농담을 삼가라. 예배에서 받은 감동을 유지하고 되새기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5:8-9) 의류업체로 이랜드가 있다. 사장은 34세밖에 않된 젊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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