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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생긴 일 (창1:1-5)

본문

앞으로 몇 주 동안 창세기 1-11장의 내용으로 연속 설교하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살 수 있는 어떤 삶의 가치와 의미의 준거를 가져야 합니다.요즈음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먹고, 입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준거를 갖지 못하고 있는데 있습니다.이러한 현상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사람이 그러한 준거를 찾지 못할 때 무의미성과 권태에 빠지게 됩니다.심리학자 융은 그에게 찾아오는 환자 가운데서 ⅓ 정도는 임상적으로 신경증 때문이 아니라 삶의 공허와 무의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가치와 의미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그리고 이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입니다.사람들은 그것들을 목말라 찾고 있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에 조금이라도 신비로운 것이 있다면 몰려들곤 합니다.근래에 들어와서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이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독교 전통에서 내려오는 신조나 교리의 체계에서 삶의 준거를 찾을 수 있었지만, 요즈음 와서는 그것 조차도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창세기 1장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의미와 가치의 준거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시해 주는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삶을 긍정할 수 있는 준거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존재 문제와 관련됩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은 어떤 신학자나 사상가, 철학자들의 사고를 통해서 소개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여기에 하나님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소개되지 않고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와 함께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첫 장의 제목은 본문 1절의 내용 그대로 '태초'입니다.태초에 이 우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이야기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창세기 1장에서 전해주는 창조 이야기는 과학적 논증이 아닙니다.여기에 나오는 창조 보도 배후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이 물음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포함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창조에 사용된 동사는 모두 여섯 개입니다.그 여섯 개의 동사는 나누다, --라 명하다, 만들다, 두다, 창조하다, 복되게 하다입니다.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이러한 제한된 용어가 사용된 것은 창조의 전 과정을 우리의 상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그 때 이 우주의 정황은 혼돈과 공허, 어두움이었습니다.이러한 정황은 우리의 체험으로는 섬득함, 깊은 고독, 외로움, 적막함 같은 것입니다.하나님과 함께 이루어지는 창조는 먼저 모든 피조물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세 가지 분리로 이루어집니다.먼저 낮과 밤의 교체되는 시간, 그리고 위와 아래 공간이 이루어집니다.이것은 인간이 변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그러나 이것도 창조된 것이며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 아닙니다.그리고 물과 땅이 분리되므로 여기와 저기(here and there)가 형성됩니다.이러한 분리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들이 살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됩니다.


이러한 분리로 생겨난 세상은 전적으로 생명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그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면,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창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식물, 동물, 사람과 같은 생명들이 이미 창조된 세상으로부터 솟아나게 됩니다.하나님은 마치 건축가가 보기 좋은 건물을 다 지어놓고 그 건물 안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 넣듯이, 빈 공간으로 놓아두시지 않고 그의 충만하심으로 채워가십니다.먼저 땅 위에 푸르름을 돋아나게 하시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시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을 두어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고 계절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게 하였습니다.그리고 각종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있게 하였습니다.여기서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각종 식물과 동물들, 날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것과, 낮과 밤, 계절의 변화와 같은 자연의 법칙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이러한 질서가 이 세상을 조화있게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그리고 그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십니다.그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입니다.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엿새동안에 되어진 일들입니다.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깊은 의도대로 되었다는 뜻입니다.거기에는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졌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습니다.하나님은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시고, 그날을 복되게 거룩하게 하셨다는 데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어떤 목적과 의미로 창조의 세계를 관리해 가실 것인가에 대한 깊은 암시가 있습니다.이 암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창조에로의 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 십대를 걸쳐오면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를 가지고 있습니다.그런데 그는 그것이 왜 조상 대대로 가보로 전수되어 오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그 가보의 가치와 목적을 알기 위해 오랜 기간 고심하며 연구해 왔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고 문서가 가득 쌓여 있는 창고문을 열고 이것저것을 뒤적거리다가 아주 오래되어서 거의 다 바랜 문서를 찾아냈습니다.그는 깊은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그 내용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갔습니다.놀랍게도 그 순서는 그가 보관해 오고 있는 가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그 이후부터, 그는 그 가보의 가치를 새롭게 이해하고, 그것의 본래의 목적대로 활용해 가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었습니다.


이 우주와 우리의 생은 가보와 같은 것입니다.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의 가치와 목적을 몰라서 고심합니다.과학은 그 가보의 질료와 형성 구조를 분석은 해주지만 그것의 의미와 목적은 밝혀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처음 장에서 그 사실을 밝혀줍니다.창세기 첫장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영적 메시지는 이것입니다.이 삼라만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태초에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것이 그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태초에 모든 것이 있게 하신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착상되거나 상상화 되어진 분이 아닙니다.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이 간단한 한 문장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이 한 문장이 이 우주와 인류의 오랜 역사,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긍정할 수 있게 합니다.창세기 1장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그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태어났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그리고 이 우주 전체가 어떤 가치와 목적 가운데서 유지되고 보존되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앙고백이 매우 중요시 됩니다.초대 교회 때부터 신앙고백이 있어야 교회 회원이 될 수 있고, 세례를 받습니다.기독교 신앙에서 신앙고백은 주문이 아닙니다.그것을 외우면 구원 얻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기독교 신앙에서 신앙고백은 이제 나는 나의 생의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갖고 살 수 있는 생의 준거를 찾았다는 것입니다.한 걸음 나아가서 이 세상의 궁극 목적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나는 고백한다'고 할 때에는 나는 세계관과 인생관을 분명히 정립했다는 의미가 됩니다.다시 말씀드리면 나는 창조주가 누구인지 알며, 그 창조주와 이 세상 그리고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대명제는 우리 모두 새로운 천년에 우리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긍정의 준거입니다.우리의 생을 긍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영광의 날에 참여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이 이 우주의 중심이요, 우리의 생의 중심이 된다는 뜻입니다.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지 않을 때 삶에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 앞에서 자기 혼자 그 모든 것을 감당하여야 하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실존적인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늘 정신적 불안, 심리적 동요, 무의미성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생의 모든 고난과 역경, 무의미, 공허를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오늘 동서양 모두에서 사람들이 직면해 가고 있는 가장 큰 위기는 하나님을 잊어버려가고 있다는 것, 그과 더불어 믿음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입니다.그 결과 사람들은 더욱더 공허, 무의미의 늪에서 허덕이게 되고, 반면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포악해지거나 알코올, 마약의 노예가 되거나, 각종 정신질환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재앙과 함께 우리 눈앞에 뚜렷이 다가오고 있는 인간 파괴의 재앙을 우리 스스로, 부분적으로 경험해 가고 있고, 목격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내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내가 창조한 세상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새롭게 하겠노라."


이 창세기 일장의 창조 이야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로 의역해서 읽어드리겠습니다.그리고 천년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느 한 시대를 살다간 한 무명의 시인이 하나님의 창조의 세상을 보고 지은 시를 소개한 후 설교를 맺음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태초에 이 세상이 창조될 때


이 세상은 아무런 형태도 없었노라.


거기에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적막과 공허만이 있었노라.


먼저 빛과 어두움의 분리가 이루어져


시간과 공간이 생겼노라.


그 공간을 위의 부분과 아래 부분으로 나뉘게 하고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뭍을 드러나게 하고


뭍을 땅, 물을 바다라 명하였노라.


땅은 각종 생명체들이 자랄 수 있는 생명력이 있어서


거기에서는 각종 생물들이


그 종류대로 자라게 되게 하니


이것이 셋째 날까지 되어진 일이니라.


사흘째 되는 날 하늘에 별들과 해와 달을 두어서


해와 달, 날, 계절이 있게 하였노라.


그리고 땅 위에 각종 짐승과 새들이 살게 하고


바다에는 고기들이 살게 하였으니


이것이 다섯째 날에 되어진 일이니라.


여섯째 날에 하나님 나의 형상을 따라 창조의 동역자로


사람을 창조하였으니,


창조된 모든 것은 나의 보기에 매우 좋았노라.


그리고 일곱 째 되는 날을 복되게 하고 안식하였노라.


오너라, 우리가 주님께 즐거이 노래하자.


우리를 구원하시는 반석을 보고,


소리 높여 외치자.


찬송을 부르며 그의 앞으로 나아가서,


노래 가락에 맞추어,


그 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


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신 왕이시다.


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


신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


바다도 그의 것이며,


그가 지으신 것이다.


마른 땅도 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


오너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시편 9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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