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지킴이 (창1:24-31)
본문
처음 하나님이 창조한 에덴 동산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마디로 생명이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식물창조, 동물창조, 인간창조를 통하여 땅에 생명을 충만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만 번성하라고 축복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동물들, 새들에게도 땅에 번성하라고 축복했습니다.
창세기에 6일간의 창조 이야기를 하나 하나 읽으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시켜 가시는 것을 봅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거하시려고 만든 곳이 아니고 바로 우리 사람을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에덴 동산은 완전한 삶, 충만한 삶을 위하여 준비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모나지 않고 축 나지 않는 완전한 삶을 살도록 인생들이 창조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샬롬"의 삶을 위하여 인간들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음에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삶은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지은 에덴 동산에 더 이상 머물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이 여기에 있습니다. 샬롬은 살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살인사건이 터졌습니다. 아담의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생겼던 것입니다. 친동생을 죽이는 비극은 인간의 잔인성을 증명해줍니다. 이권을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자존심을 위하여서는 그 누구도 죽일 수 있다는 인간의 무서운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는 깨어졌습니다. "쇠다" 즉 어둠과 그늘과 죄악과 죽음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악이 들어 온 것입니다. 악이란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삶이 멍들고 쭈그러지고 억압되어 있는 것이 "쇠다" 인데 "샬롬"의 반대입니다. 둥근 달처럼 환하게 피여 있는 삶이 샬롬 이라면 제대로 피지 못하고 눌려있고 갇혀있는 삶은 쇠다 입니다. 그것은 곧 병, 아픔, 고통, 탄식 등등입니다. 이것의 극한적인 상황이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이 충만한 나라인데 생명을 억압하고 죽이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력입니다. 성경은 이 세력을 사탄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간사한 뱀, 즉 사탄에 의하여 평화롭고 달콤한 에덴의 삶이 깨어졌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인의 마음에 파고들어 자기의 라이벌을 죽이고 득세하려는 욕심을 품게 하는 사탄의 간교가 계속되었습니다. 즉 가인의 후예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가인들 때문에 이 땅에서 생명은 계속해서 죽어 갔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지구촌을 창건하시고 동식물을 만드시고 사람들을 지어 놓았을 때 모두가 선하였습니다. "좋다" 라는 하나님의 찬탄사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중의 새들과 바다의 고기들과 들의 짐승들 모두가 착하고 좋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뱀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해도 해함이 없는 선한 동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의 동산이 파라다이스였던 이유는 모든 생물들이 선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먹고살라고 주는 과일을 먹으면서 서로 싸우지 않고 너무나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음에서 선한 질서는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탐욕이 생긴 것입니다. 욕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과일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욕심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기에게 준 삶의 범위를 넘어가서 다른 것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에서 시키는 대로, 나 아닌 다른 것을 제것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준 범위 안에서 주어진 청지기의 사명을 다 했다면 에덴동산은 아름다운 동산으로 유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먼저 하나님이 그어 놓은 선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엔 식물, 즉 과일을 먹고살도록 사람에게 명했는데 이 명령을 어기고 다른 영역에서 사는 생물인 동물도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도록 명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흘리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되니 동물도 점점 사람에게 대드는 무서운 성격으로 변하였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엄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을 죽인 가인의 살인행위는 이 땅에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은 더 이상 샬롬의 땅이 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 지구촌은 피흘림의 역사로 점철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서로 물고 뜯는 싸움이 계속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기록된 역사 이래로 약 92%가 전쟁사라고 합니다. 피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요즈음에 티비에 방영되는 드라마, 특히 역사드라마를 보면 무서운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고 갈등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참극을 많이 보여줍니다.
이런 정치적인 싸움들은 내적으로는 권세와 부를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에서 출발합니다. 상대방의 것을 보다 많이 빼앗으면 그 만큼 이 쪽은 부자가 되고 권력도 갖게되니 이런 재미 때문에 힘을 가진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수탈합니다. 이렇게 하여 가진 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없는 자들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됩니다. 덩달아 땅 값이 오르고 생선 값이 비싸집니다.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것들이 어째서 저토록 비싸졌나요? 이것은 마치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김선달 이야기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값을 받고 에덴을 주었나요? 그 수많은 자연의 풍성함을 우리 인생들이 나눠서 고루 고루 잘 살라고 공짜로 주셨는데 인생들이 제대로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아서 이렇게 피폐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늘의 구약의 본문에서 읽는 대로 땅의 관리를 잘 하도록 청지기의 사명을 우리들에게 부탁하셨는데 관리를 잘못하여 엉망으로 만들어놨습니다. 땅값만 올렸고 집 값을 올렸고 밥값을 올려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놨습니다.
지금도 1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하루에 1불 정도의 돈으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굶어죽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그 중엔 북의 어린이들도 끼어있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들이란 한 마디로 이 잘못된 창조의 질서를 제 자리로 되돌리려고 애쓴 사람들입니다. 인도에서 세도가들이 약한 백성들을 떡주무르듯이 약탈하고 착취하는 것을 보다 못해 굶주리는 자들 편에 서서 설파한 사람이 다름 아닌 석가머니입니다. 허기진 사람들이 길을 누비는 것을 보고 그는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그들의 편에 서서 중생을 계도했습니다. 그것이 불교가 되었습니다. 싸우지 말고 빼앗지 말고 착하게 살면서 서로 용서하고 나누면서 살자고 외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닐바나 열반의 평화로운 삶이라고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씀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아서 그 당시의 사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계속 그에게 모여들다 보니 큰 조직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후대에 창시자의 이름이 부쳐진 종교조직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지금 한창 열리고 있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순례의 길을 연 마호메트의 종교도 그 출발은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서 였습니다.
유대교의 출발이 어디에 있었나요? 애굽의 독재자 바로의 학정 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을 그 본래의 인간의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답게 살게 하려는 모세의 강렬한 의지에서 유대교는 탄생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이야기,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 모세는 이 아름다운 지구촌을 다시금 자기네들의 종족에게 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눌림이 없고 가난이 없고 억울함이 없는 샬롬의 나라를 누리게 하고 싶어서 모세는 해방운동에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그것이 훗날 유대교가 되었습니다. 모세도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바로의 딸에 의하여 왕궁에서 자란 왕자였습니다. 모른 척하고 호화판 왕궁에 처박혀 살았으면 큰 권세도 얻고 물질도 엄청나게 받아 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선한 세계가 그토록 뒤틀린 것을 참을 수 없어서 광야로 나가서 해방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고 자기 백성도 하나님의 형상의 존엄성을 얻고, 애굽의 바로나 그 부하들도 인간답게 살게 하고자 일생을 몽땅 드려서 해방운동에 나섰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님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누가 복음의 본문에서 보시는 대로 그의 선교의 비젼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깨버린 자들 때문에 가난하게 되고 옥에 갇히고 눌려있는 이 땅의 백성들을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요즈음의 말로 생명을 지켜주고 생명을 살려내려고 이 지구촌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지구촌에 오신 것은 눌리고 상하고 죽음 아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을 자유케 하여 생명 충만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신 것도 눌린 자들의 편에 서서 대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당대의 고관들, 로마의 황제의 침략정책을 옹호하고 그들에 의하여 억압을 당하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모른 척 했다면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인들의 친구요 약한 자들의 편에서 대변하다가 결국엔 어두움의 세력의 미움을 받게되었고 결국 십자가의 극형을 받았습니다.
모세도 예수도 억압받고 눌림 받는 백성들, 민중들의 생명을 살리려는 데 그들의 지상의 삶의 목적을 두었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나 불교의 참뜻은 생명을 살리려는 데 있었습니다. 종교는 생명운동입니다. 신앙운동은 생명운동입니다. 종교의 근원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모름지기 생명지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지나간 역사를 보면 교회가 가장 참신하고 개혁적인 경건의 모습을 가졌던 때가 교회가 약한 자들과 없는 자들을 위하여 헌신할 때였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지구촌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서 생명을 살리기 운동을 할 때 교회는 건전한 기관으로 존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만들어 놓으신 충만한 생명공동체를 다시 회복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뜻을 준행할 때 교회의 존재의의가 있습니다.
창조사적으로나 구속사적으로나 예수님의 지상의 활동은 너무나 분명한 생명운동이었습니다. 구태여 그것을 육신의 생명운동과 영혼의 생명 운동이라고 이분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 동물, 인간, 등등 우주 전체의 생명운동입니다. 육신의 삶과 영혼의 삶을 짜개서 생각하면 생명 살리기 운동에 혼선을 가져옵니다. 종말론과 환경론이 이원론적으로 해석되지 않고 일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죽임의 문화로 점철된 지구촌이 아닌가요? 20세기의 전쟁의 역사를 잠시만 돌아봐도 너무나 많은 생명들이 살상을 당했습니다. 6. 25. 세대인 우리들은 너무나 참혹한 역사를 목도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1, 2차 전쟁, 베트남전쟁, 등등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던 전쟁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었습니까?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는 평화를 꿈꾸었는데 9. 11. 테러에 이어 아프카니스탄 침공이 일어났고 지금도 국제적. 지역적 싸움이 끝이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환경의 오염, 공기와 물의 오염으로 자연이 죽어가고 있고 인간의 목숨도 무수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앞으로 10년간을 폭력극복의 해로 선포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폭력이란 생명을 죽이는 것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폭력극복운동은 1)나라와 나라간 2)민족과 민족간 3)그릅 대 그릅 4)개인 대 개인간의 폭력을 없애는 운동입니다. 폭력이란 남의 생명을 죽이자는 것입니다. 폭력은 하나님의 나라를 없애자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운동을 박멸하려는 세력들이 곧 폭력집단입니다. 최근에 여성에 대한 폭력, 어린이에 대한 폭력, 외국인에 대한 폭력 등등의 말을 자주 듣는데 이들은 모두 약한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폭력을 저지하여야 합니다. 생명운동은 1)자연 2)동물 3)인간 전체에 파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임의 문화를 생명살림의 문화로 바꿔가야 합니다.
폭력을 극복하면 생명은 살고 평화가 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 에덴동산의 회복운동입니다. 생명운동은 평화운동이요 동시에 사랑운동입니다. 사랑을 감정이나 이성의 차원에서가 아니고 상호 관계성, 즉 도덕성에서 이해하십시다. 친절하고 알뜰살뜰한 대접도 좋지만 상대방을 괴롭히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면서 존경해주고 인정해줌에서 삶의 충만을 느끼게 하여야 합니다.
생명운동은 평화운동입니다. 민족이 분단된 우리 조국은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고로 민족의 평화와 통일운동이야 말로 생명살림의 운동입니다. 남북이 다 함께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분단선이 있는 한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분단은 원죄입니다.
죽어 가는 생명들을 죽지 않게 지키는 생명지킴이들이 되십시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동네에서, 교회에서 생명들을 살려내십시다. 민족 안에서 폭력을 막아내십시다. 죽임의 문화를 내몰고 빨리 에덴동산을 회복하십시다. 우리 지구촌의 모든 인류들이, 우리 남과 북의 동포들이 평화롭게 사는 날이 오도록 생명지킴이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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