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생관 (창1:26-28)
본문
이 시간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신앙 강좌 시간이올시다. 총 제목은 七十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겠는가 하는 제목 아래서 우리가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제일 첫 시간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과학 시대이어서 인간의 모든 생활이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혁명을 가져오는 그러한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해서 이런 면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이 여러 방면으로 우리 인간에게 여러 가지 좋은 것을 가져왔지마는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과학은 만능이 아니고 그 영역에 제한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함을 말했습니다.
특별히 과학이 인간에게 가져온다고 하는 변화는 외부적 생활의 변화이지 결코 인간의 깊은 속 그 심령에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복음을 통한 정신 혁명을 통해서 인간의 속이 변할 수 있는 점을 생각한 것입니다.
과학 시대일수록 정신 혁명이 필요한 것은 이제 인간이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전에 없었던 지식과 전에 없던 힘, 그 가운데는 인간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기까지 가지게 된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능력과 지식을 바로 쓸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운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직 복음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는 계속해서 이 七十년대에 특별히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적 사상이 팽대(膨大)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소위 공산당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 우주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우주의 창조주 우주의 섭리 자이신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약간의 무신론자가 있었지마는 오늘의 시대처럼 무신론자가 많은 때가 없고 오늘날처럼 무신론을 공공연히 선전한 때가 없고 오늘날처럼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고 학살하는 때가 없었습니다.
북한의 사정을 생각할 때, 모든 철의 장막 배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정경을 생각할 때, 우리는 실로 격분을 견디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우리가 참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어찌하여 우리가 믿으며 믿지 않을 수가 없느냐? 이런 점을 지적 방면으로 모든 방면으로 우리가 분명히 알고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공산당들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소위 자유 진영에 사는 이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부인하며 사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계속해서 짓는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남한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사람이 죄인 줄 알면서도 양심을 거슬려 죄의 생활을 합니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혁명은 이미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히 옷깃을 바로 할 것이요.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양심을 거슬려서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 혁명을 일으키는 이러한 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리 남한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분명히 알려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그 생활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게 할 책임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시간은 이런 기독교 우주관에 대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셋째로 기독교 인생관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 장로교는 본래 제네바에서 요한 칼빈 선생이 세웠던 유명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우리 신교의 책「기독교 요강」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첫 장 첫 절에 무슨 말이 있느냐 하면『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알아야 할 지식이 많지마는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지식은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둘째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니라.』이런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잠깐 생각했습니다.
오늘 아침은 사람에 대한 지식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 七十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야말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유물론자들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짐승으로 봅니다.
유물론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람을 기계로, 생산의 한 도구로 봅니다. 인간 소외란 말이 그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컴퓨터의 한 구멍으로 봅니다. 인격을 무시합니다. 이러한 시대인 만큼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인생관이 무엇인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이것을 우리 모든 동포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정신 혁명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바로 이해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에 인생에 대한 문제, 사람이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하려 왔으며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이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는 신학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는 때문입니다.
지금도 말했지마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여기에 의지해서 도덕 사상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한 짐승으로 볼 때에는 사람을 짐승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할 때에 먹이고 기르고 쓰다듬어 주지마는 필요하지 않을 때는 마음대로 죽여버리는 것이 짐슴에 대한 대우입니다.
오늘 날,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국가의 한 도구로 생각해서 국가와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필요 할 때에는 먹이고 쓰다듬어 주지마는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불필요할 때에는 몇 백만이고 천만이고 죽여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관에 의지해서 윤리 사상이 지배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현대에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인간관에 의해서 사회 사상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회를 조직해서 살겠느냐? 인간을 근본적으로, 짐승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사회 구조로 동물원으로 만들어 놓으면 제일인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동물원엘 가 보셨지요,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 괜찮습니다. 먹을 때 먹고 잘 때도 있고 잘 살수 있지요. 그러나 동물원에 사는 짐승들 뭘 한가지가 없습니까? 자유 한가지가 없습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짐승으로 보는 유물론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조직을 보면 이렇습니다.
일 시킬 때 일시키고, 먹일 때 먹이고, 일만 하면 굶어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뭐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짐승 취급입니다.
자 이런 까닭에 인간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아주 필요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간에 대한 두 가지 그릇된 극단적 견해가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한 가지 견해는 인간을 너무 높이 봅니다. 인간을 신(神)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 시대 살아 본 사람은 일본 사람들이 천황을 신이라고 했던 사실을 압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천도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범신론적 인간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 그릇된 견해입니다.
시편 八편을 읽을 때 여러분께서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시되 천사 보다 조금 못하게 내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을 높이 보는 견해를 배격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천사가 아닙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그릇된 견해입니다. 사람을 신으로 숭모합니다. 북한 같은 데는 김일성이가 거의 신의 대접을 받습니다. 중공에는 거의 모택동이가 그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참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사람을 신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릇된 견해를 배격해야 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견해, 극단적으로 사람을 낮추어 보는 견해는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유물론적 인간관에서는 사람과 아메바의 차이는 사람은 복 세포 동물이고 아메바는 단세포 동물이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 사람과 벌레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만물을 다스리는 영물로 지으셨다고, 사람을 너무 낮추어 보는 견해를 배격하는 교훈이올시다.
이 밖에도 제가 일찍이 말했지마는 현대에는 사람을 꼭 동물로는 보지 않지마는 사람을 한 기계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또 현대 공업이 발전되면서 사람이 거저 거의 기계 노릇 하는 현상을 더러 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데드로이트란 곳에 가서 거기 큰 포오트(Ford)자동차 공장에 구경을 갔습니다.
자동차 만드는 공장에 가보면 우선 부분품을 만드는 공장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큰 건물을 지어 놓고는 부분품을 갖다가 맞추는 소위 아셈블리 홀이 있습니다.
거기 가 보면 가운데는 레일이 있어서 맨 처음에는 거저 자동차의 몸 둥이 만 척 갔다 놓은 것이 슬슬 들어오고 그 다음에 그 옆에 사람이 하나 섰다가 바퀴를 갖다 넣는 사람, 그 다음엔 한 사람이 나사를 구멍에 궤고 또 한사람은 그 옆에 섰다가 나사를 한바퀴 돌립니다. 또 한 사람은 그 옆에 두 바퀴 돌리는 사람, 그 옆에는 세 바퀴 돌리는 사람, 가만 보니까 하루 종일 서서 나사 못 하나씩만 꽂고 죄고 있단 말이요, 종일 나사못만 죄고 또 하고 또 하고, 나사못 한 번 죄고, 그 다음 사람이 또 한 번 죄고 종일 그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계지 사람이랄 것 뭐 있겠어요.
지금 공업화됨에 따라서 인간이 그런 취급을 자연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원치는 않지마는 인간을 기계로 보는 사상이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을 한 생산의 도구로 보는 사상이 점점 민주주의 사회에도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 여러분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관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번 분명히 이 것을 알기 위해서 이번에 이 문제를 가지고 강좌를 가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시편 八편을 읽었고 창세기 一장을 제가 읽었습니다. 또 二장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피조물이다.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자재(自在)한 존재, 스스로 있게 된 존재가 아닙니다.
어제도 제가 말씀 드렸지마는, 이 지구 위에 사람이 없던 때가 있습니다. 일정한 역사적 시간에 지음을 받음으로써 이 땅에 인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자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 어떻게 오게 된 것입니까? 여러분의 부모로 말미암아 오게됐지요. 여러분의 부모는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여러분의 조부모, 자꾸 이렇게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에는 결국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므로 우리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 스스로 난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오고 싶어서 여기 비행기 표를 사듯 표를 사 가지고 이 세상에 왔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지음을 받아서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해서 이 세상에 나게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재자가 아니고 자존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인간은 이렇게 피조물인즉 피조물에 대해서,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은 제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은 무한한 피조물은 없습니다. 피조물은 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도 제한이 있습니다. 키가 크는 것도 열 여덟쯤에 한참 클 때는 하늘이라도 찌를 듯 자꾸 크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얼마 크다가는 스톱하고 맙니다.
뭐 九척 장신이 있고 거인이 간혹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제한이 있습니다. 키가 제한이 있습니다.
요새 의학이 발달되어서 보통으로 좀 오래 산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수명도 제한이 있습니다.
옛날 유명한 중국 시에 두보의 시에 인생 칠십은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한 말은 지금도 맞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 해에 세상을 떠나는 분이 작년에도 아마 백 이삼십 명됩니다. 가만히 그 분들의 연령을 살펴보면 거저 五十-七十사이에 가장 많이 갑니다. 여러분 거저 스스로 속일 필요 없습니다. 환갑 지나신 분은 이제 내 때가 가까웠다 고 알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한이 있습니다. 그것 뿐 입니까? 우리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을 무엇에나 제한이 있습니다. 전에는 항우는 기운이 세서 역발산 기개세(力拔山氣蓋世)란 말이 있지요. 산을 뽑는다는 것은 다 과장한 것이지요. 사람이 산을 어떻게 뽑는다는 말이요. 체력이란 제한이 있어요. 시력도 제한이 있어요. 먼 것도 못보고 가까워도 못 봅니다. 듣는 것도 제한이 있어요. 너무 적은 소리도 못 듣고 너무 큰 소리도 못 듣는다고 합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너무 커서 못 듣는다고 해요. 못 듣는 것, 거 괜찮아요 제한이 있어요.
인간 만능이니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과대망상증입니다.
인간 만능이 아닙니다. 이 걸 알고 살아야 공연히 교만하지 않고 실수하지 아니합니다. 괜히 뱁새가 황새걸음 하다가는 다리만 찢어집니다.
제한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자, 또 인간은 이렇게 피조물이니,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만든 이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여러분 여기 마이크 둘이 있지요. 이거 누가 지었어요. 사람이 지었습니다. 마이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마이크 자체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만든 사람에게 있습니까? 사람에게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사람에게 있어요.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으심으로써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즉 우리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 목적이 뉘게 있습니까? 내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습니까?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거저 내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하고, 내 먹을 대로 먹고, 놀고픈 대로 놀고 내 멋대로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잘못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요리문답에 제일 첫째 문답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알지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여러분 다 잘 믿는 분이니까 요리문답의 첫 답을 다 알겠지요.
아는 이 한번 다 손들어 봅시다. 모르는 이는 손들지 마시오. 아는 이, 요리문답 첫 문제 대답을 아는 이만 손들어 봅시다.
아하, 손 내리시오. 못 드는 분이 많단 말이요. 요리문답 첫째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요리 문답을 다시 가르쳐야 되겠습니다.
사람의 둘째, 셋째 말고 첫 째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성경대로 거기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큰 즐거움을 하나님도 가지고 우리도 가지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인간이 세상에 사는 최고의 목적도 내 향락이 아닙니다. 내 부귀 영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그 목적으로 삽니까? 물론 직업은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최고의 목적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실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인즉 피조물 자체에 있어서 최대의 행복이 무엇인지 압니까?
자, 이 마이크가 피조물인데 이 마이크의 최대 행복은 무엇일까요. 마이크 노릇 잘하는데 있지요. 소리가 잘 안 들리거나 하면 그건 틀렸단 말입니다. 마이크 노릇 잘 하는데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를 지었습니다. 지을 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목적,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둘째 목적이 있어요 무엇인고 하니 이 사람은 이런 일을 해서 내게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겠다, 저 사람은 저렇게 해서 내게 영광 돌리게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제二의 목적은 각각 다르단 말이오.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압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소위 달란트라고, 각각 재능을 다르게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립니다. 어떤 사람은 이자윤 집사 님처럼 노래를 잘 부릅니다. 아 어떤 사람은 글씨를 잘 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있어서 만들기를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학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정치에 머리가 있습니다. 경제에 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경영에 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능을 다르게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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