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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과 사명 (롬1:1-7)

본문

이 로마서가 기록될 때, 바울은 아직 로마에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가장 크고 위대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의 처음을 매우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써내려 갔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소명 (call)과 사명 (mission)에 대해 고백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받은 바 소명과 사명을 다시 점검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소명 (call)

소명은 부르심을 뜻합니다. , 소명은 나의 존재에 관한 인식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이라는 말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야 됩니다.

첫째로, 희랍적인 배경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희랍적인 배경에서 볼 때, [](둘로스:)[주인](큐리오스:)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 종이란 주인의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이상한 빛을 보고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늘로부터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거룩한 영에 의해 압도당하는 체험을 한 뒤에, 자신의 전 생애를 예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삶의 결정권자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유대적 배경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에 따르면 []이라는 말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표현하는 상투어였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종이요, 노예였습니다. 또한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종이었으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자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또한 바울은 사도가 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증거했습니다. 구약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가 그러했고, 이사야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바라고 계신 그 무엇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계몽주의 이래로 인간은 자율성 (autonomy)에 대해 깊히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서, 인류는 '자유'에 대해 참으로 많이 생각해왔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에겐 억눌림의 오랜 역사가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엔 일본의 식민지로서 민족적 자존심이 꺾이고 굴욕을 당해야 하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60대부터 80년대엔 군사독재 하에서 자유와 인권을 유린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엔 IMF의 경제적 통제를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누가 나의 자유와 운명에 간섭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쾌한 일일뿐만 아니라, 내 전 존재와 삶의 의미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나의 자유에 간섭할 권리가 없으며, 아무도 내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와 운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충분히 자유롭게 살지 못합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 갇혀 지내며,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 충분히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가정하며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율법의 굴레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자유는 스스로의 노고와 수행에 의해서 성취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온전케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둘째로, 인간은 누구나 신을 모시고 사는데, 하나는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리기로 작정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부름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의 가치와 의미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결정권자는 누구입니까? 나의 행복, 심미적 만족, 내 욕구의 충족이, 내 모든 일들의 판단 기준이라면, 나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하나님은 내 판단의 근거와 기준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나에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넘치는 기쁨과 꺽이지 않는 소망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2. 사명 (mission)

사명이란 일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의 자녀라면, 나는 마땅히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도록 위임받았을까?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봉사하기 위해 따로 부리심을 받았다고 증거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따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어떤 특권이나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와 사랑을 하기 위해서 구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이었습니다 (2-3a).

바울은 3b-4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으며,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인간으로 사셨으며, 인간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셨고, 그의 뜻을 따르기 위해 죽으셨으며, 그의 능력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하나님의 실재를 만졌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자마다, 용서와 참된 자유와 거룩한 변화와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나는'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사명과 사도의 직분은 우리 모두가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느 날 루이지애나주의 폰차트렌 호수에서 기선이 파선되었습니다. 아름답고 즐겁기만하던 폰차트렌 호수는 허우적거리며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사람들과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수라장 속에는 여섯 명의 아들을 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여섯 명의 아이들이 뒤집혀진 배 위에 올라가 있게 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가 너희들 하나 하나를 육지에 데려 놓을 테니까 아무 겁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곤 한 아이씩 육지에 데려다 놓는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아이를 건져다 놓고는 거의 쓰러질 듯이 기진맥진해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다시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막내아들 지미가 아직 물 속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지미에게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리곤 다시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간신히 배에까지 헤엄쳐 간 아버지는 지미에게 물 속으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기운이 없는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아들을 꼭 껴안은 채, 물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여 희생하신 사랑은 이보다 더욱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10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예수의 이름을 전한다는 것은, 그의 십자가 죽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심자가 죽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고린도후서 5:14이하에서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자기를 위해 살지 마시고,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 분을 위하여 사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하도록 사명을 받은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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