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자로 살자 (롬1:13-14)
본문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은혜를 아는데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은혜를 알지 못하면 동물보다 못한 존재가 됩니다. 이 땅에서 훌륭한 사람은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알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인격을 높이 인정하고 은혜를 모르면 그 사람을 배은자, 악한 자로 인정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높은 경지를 은혜받았다고 말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은혜를 안다는 것이고, 은혜를 깨달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은혜를 보답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늘 하나님 앞에 간구할 기도는 “주여, 은혜를 받게 하옵소서.” 이것입니다. 은혜는 사람을 통해서 받으므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므로 사람의 은혜를 알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을 통해서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또 함께 사는 사람의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은혜를 모르면 그 사람의 관계가 소중함을 모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알면 부모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남편과 아내가 살면서 남편이 아내를 통해서 날마다 베풀어지는 은혜를 알면 너무 소중해서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납니다. 우리가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은혜를 받으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너무 감사해서 길을 걸어가면서도 내 눈에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서 위대한 사도,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위대한가, 2천년 교회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사람, 그리고 이후에도 나올 수 없는 전무후무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흠모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가 한가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생각만 해도 감격했고, 감사했으며, 자기 전 생애를 쏟아 주님을 위해서 바치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바울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바울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곳이 어느 마을이든, 어느 도시든 그 순간부터 그 도시와 마을은 바울의 발걸음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울이 로마에 끌려들어온 날부터 로마의 하늘은 복음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바울만큼 세계 역사의 운명을 바꾼 사람은 없다.”
그때 당시에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로마를 바꾸었을 때 세계를 바꾸어놓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를 바울 한 사람이 들어가므로 로마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을 이끌어간 자아의식이 빚진자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이 정신 때문에 그의 모든 행동은 식을 줄 모르는 화산처럼 타오르는 열정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몇 가지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첫째는 마음속에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을 때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둘째는 내가 행복해지기 시작합니다. 셋째는 내 자신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감사로 고백하고 감격으로 고백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아! 나는 하나님께 빚진 자야 나는 부모님께 빚진 자야’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한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에게만 빚진 것이 아니라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표현은 모든 이방인의 총칭입니다. 당시의 세계는 헬라 문화가 지배하던 때이므로 헬라의 지혜로운 자가 아니면 야만인으로 어리석은 자라는 뜻입니다. 당시 로마도 헬라어를 썼기 때문에 헬라어를 쓰면 지성인이고 그것을 모르면 야만인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모든 이방인에게 빚진 자임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첫째, 은혜로 빚진 자
사도 바울은 늘 마음속에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1:13)
사도 바울이 왜 그토록 로마에 가기를 원했느냐? 빚진 자로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고 보니까 빚진 자가 되어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새 생명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는데 이 은혜를 받고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견딜 수 없는 심정에서 자기 자신을 빚진 자로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빚을 갚아야지 내가 빚을 갚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다.’ 마치 빚진 자가 빚을 갚지 아니하면 종으로 팔려간다든지, 감옥에 들어가기 때문에 채무감을 가지고 빚을 꼭 갚으려고 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채무감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그는 소아시아와 유럽 일대를 복음을 들고 다녔으며 마지막 그의 생명도 복음을 전하는데 아낌없이 바쳤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와같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가 구원받은 것 뿐만 아니라 사도 된 것에 대하여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요 죄인의 괴수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또 말할 수 없이 복음을 핍박한 자로서 내가 이렇게 귀한 직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게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은혜의 경지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예정하신 것이 은혜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은혜요, 산 것이 은혜요, 구원받은 것이 은혜요, 내가 사도 된 것이 은혜다.’ 이런 심정에서 자기 전 삶을 빚진 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저를 사로잡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전도사 시절 숲속에서 탁자에 앉아 성경을 읽는데 로마서 10장 13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4-15) 이 말씀을 읽는데 ‘빚진자’라는 말씀이 제 가슴에 와 닿으면서 저는 즉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 빚진 자’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너무 커서 평소에 눈물로 젖어 살던 내게 이 빚진 자라는 말씀이 와 닿을 때 완전히 저를 사도 바울의 은혜의 경지로 들어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하늘을 봐도 빚진 자요, 땅을 봐도 빚진 자요, 산천초목을 봐도 빚진 자요 어느 것 하나 빚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 빚진 자였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것이 은혜요, 가난한 환경에서 나를 낳아 길러준 어머님과 아버님이 너무 고마워서 즉시 다음날 제 고향에 갔습니다. 갔더니 밭에서 일을 하셔요.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절을 하는데 제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산천을 봐도 빚진 자요, 어린시절에 다녔던 초등학교 교정을 돌아봐도 빚진 자요, 나를 가르쳐준 학교에게 빚진 자,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고향 땅을 디디고 어린시절 밟던 오솔길을 걸어가면서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형제들에게도 빚진자요. 어린시절 나를 등에 업어 길러준 누나가 고마운 누나로 빚진 자임을 고백하게 했고, 나를 가르쳐 준 선생님에게 빚진 자요,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빚진 자요, 피어있는 꽃 한송이를 보아도 ‘아! 꽃이 나에게 향기를 날리기 위하여, 나에게 웃어주기 위하여 피어있는가 내가 빚진자지’ 그래서 온통 이 세상에 대하여 빚진 자임을 고백하고, 이 교인들을 볼 때 ‘내가 교인들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목자가 되었나’ 그래서 교인들을 보면 눈물이 나고, 아내를 보면 아내가 나를 만나 고생하며 산 것이 고마워서 눈물이 나고,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나에게 은혜로 와닿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은혜를 알아야 자식이지 은혜를 알지 못하면 자식이 아닙니다. 성묘한다고 자식이 아닙니다. 부모님을 찾아간다고 자식이 아닙니다.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어버이 날 낳으사 어질고아자 길러내니
이 두 분 아니시면 내 몸 낳아서 어딜소냐
아마도 못내 갚아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평생에 못갚을 일이 부모님의 은혜인데 부모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 아버지의 효자가 되기 시작합니다.
혹시 이 가운데 지난날 부모에게 불효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리는 분이 있습니까 회개하면 됩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대하여 내가 불효한 일이 생각나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서 하나님의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딸의 아파트를 팔았다고 십일조를 가지고 왔어요. 이것을 받는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이 딸이 얼마나 감사한지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권사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이런 일 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알면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거든요.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마음이 쏟아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저는 결혼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큰데 혹시 결혼해서 제 마음이 변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음이 안변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깊어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자식을 낳았을 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자식을 낳고 마음이 변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보통 사람들은 자기 아이를 낳으면 마음이 싹 변합니다. 부모도 몰라봐요. 형제도 몰라봐요. 이 자식을 위해서 미래에 할 일 때문에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효자 중에 효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본능입니다.
저희 교인 중에 가난하다고,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면서 아들을 카나다에 연수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연수를 보냅니까?” “목사님 연수 보낼 돈이야 있지요.” 부도가 나서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요. 그런데 결혼하는 딸한테 5천만원짜리 전세를 얻어주어요. “돈이 어디서 났습니까?” “그 돈이야 있지요.” 이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효자라고 칭찬하실까
자식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셨습니다. 자식이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심정을 알게 하셨습니다.
둘째, 빚진자의 소명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빚진 자의 심정을 지녔던 사도 바울은 참으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사는 것도 마음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보니까 빚진 자거든요.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못살았습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죽지 못했습니다.
종은 자기 것이 없습니다.. 종은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종은 자기 권리가 없습니다. 살 권리도 없고 죽을 권리도 없습니다. 종은 자기 소유가 없습니다. 자기 뜻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보니까 빚진 자가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단에서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에 한 분이 이준묵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거들랑 꼭 이중표 목사님에게 내 장례식 설교를 부탁해라” 그 분은 마지막 돌아가시면서도 제 설교를 듣고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면 테이프에 녹음이 되어서 설교가 전달되는데 거동이 불편하니까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테이프로 제 설교를 듣고 또 마지막 병원에서 돌아가시면서도 제 설교를 들으면서 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목사 나 오늘 이 목사 설교 들으면서 한없이 울었네.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제가 장례식 설교 초청을 받아서 해남읍으로 내려가기 전날 밤에 그 분의 회고록을 읽는데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거에요. 이 목사님의 회고록을 보니까 신혼 첫날밤에 신부와 함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는 말씀을 읽다가 갑자기 목사님이 엉엉 웁니다. 그리고 첫날밤을 그냥 그대로 보내고 며칠 있다가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로 떠납니다. ‘야! 이런 위대한 종이 계셨나’ 그래서 저를 또 울리는거에요. 그런데 장례식에 가서 설교를 20분 동안 하는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리며 설교를 했습니다. 이런 설교는 제 생에 처음이었습니다. 중간에 눈물이 조금 날 수는 있지만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린 것은 내 생에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이구나!’ 그 분은 일생동안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그 마음을 갖는다면 하나님의 효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종이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부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오버를 입었고, 구두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눈이 내리는 날 내 친구들은 나막신을 신고 가느라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 부요를 만끽했다. 나는 매주일 고깃국을 먹고 몸이 튼튼했지만 내 친구들은 연약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학교에 갔다 오다가 친구들과 뭉치기를 하면서 친구를 위에서 누를 때 밑에 있는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소고기 국을 먹는다면 네까짓 것은 문제가 안돼’ 나는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나 잘 먹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지’ 어린 마음에 그 생각이 딱 듭니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도 얼마나 건강했는지 일주일동안 철야를 해도 피곤함이 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논문을 쓰기 위해서 하룻밤만 철야해도 그 다음날 다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건강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해야 된다는 의무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21살이 되던 여름 성령강림절날 이런 감동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아, 나도 30세까지는 예수님처럼 나를 위해서 학문과 예술을 닦고 30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지’ 그래서 그는 30세까지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음악, 철학,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0이 넘어서 그는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서 36세에 아프리카 콩고지방 랑바레네로 갑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그 많은 명예와, 영광을 두고 왜 죽으러 가는가”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빚진 자다. 우리 조상들이 흑인들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괴롭힌 그 죄가를 내가 대신 지러 간다.”
그는 드디어 아프리카에 건너가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저들을 위해 살았고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그는 20세기 참으로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성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성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다 하나 있는 것이고 우리 모두 다 마음속에 ‘나는 빚진 자다’ 이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잘 살고 있습니까 잘산다고 교만하지 말고, 남보다 더 많이 배웠습니까 그렇다면 안다고 자랑하지 말고, 건강하십니까 건강하다고 자랑하지 말고 ‘나는 빚진자야’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야 됩니다.
셋째, 빚진자의 전도
이러한 빚진 자의 심정을 지니고 살아갈 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자가 됩니다. 복음에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사도 바울은 ‘나는 빚진 자요, 종인데 빚을 갚지 아니하면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심정이 우리 속에서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심야 때 우리 집사님께서 다락방 순장 간증을 할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 빚진 자의 심정을 지닐까’ 한신교회에 와서 별세의 은혜를 받아 자기를 죽이고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까 저들을 돕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고,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고, 저들에게 복음을 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빚진 자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요.
이 땅에 살면서 장수했습니까 나이가 많습니까 이것은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빚진 자요, 높은 학위를 받았습니까 내 노력으로 되었다 할지라도 그 노력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빚진 자요, 공부하기까지 부모님이 나를 뒷바라지 했으니 이것도 빚진 것입니다.
오래전 얘기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자기 딸이 공부 잘한다고 너무 너무 사랑해 주었고, 학비도 다 대주었고, 이른 아침부터 학교에 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공부를 잘해서 토플 시험에도 높은 점수를 얻어서 유학을 갔습니다. 유학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유학가기 전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갔기에 몇 년 동안 길러주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은혜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공부해서 높은 학위는 올랐으나 은혜를 모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 못한다고 구박하고 학교도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딸은 비록 구로공단에서 일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부모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철철이 부모님에게 좋은 옷도 사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허리를 만지면서 “어머니 허리가 많이 굽었네. 꼬부랑 할머니 되면 어쩌나”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얼마 전에 이 권사님이 딸이 용돈을 주어서 관광 갔다 왔다고 선물을 들고 와서는 “목사님 공부 많이 해도 그렇고, 공부를 못해도 중요한 것이 있더군요. 은혜를 알면 효자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추석이 오면 부모님에게 뭔가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까?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드리고 싶습니다. 드리고 싶은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이 영혼 제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구원하셨기에 한 생명이라도 하나님께 드려질 때 하나님께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배운 것이 없습니다. 내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재주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명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 가운데 최고의 바치는 것은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전도해서 하나님 앞에 인도해 올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천하보다 귀한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돈이 없어서, 물질이 없어서 많이 못바치는 것 걱정하지 마세요. 전도하면 됩니다. 재주가 없어서 갖가지 은사로 봉사하지 못한다고 탄식할 필요 없습니다. 전도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효자의 최고의 헌신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효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하나님의 효자가 되게 하옵소서. 나에게도 생명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저는 손자를 낳고서 효자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손자를 낳아서 제게 안겨줄 때 ‘그대가 효자구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그때 제 마음속에 감동을 주어요. “종아, 네가 이렇게 손자를 품에 안아주는 네 아들을 효자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진짜 효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많이 전도하라 내 생명을 생산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효자니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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