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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쟁이에게는 고난이 축복의 필수 (창37: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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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쟁이에게는 고난이 축복의 필수/ 창세기37;12-36


 옛날 몽골제국이 전 세계를 제패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고려 시대에 몽골의 침입을 당했고, 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던 과거 역사가 있습니다.

그 몽골을 세계적인 제국으로 세운 사람이 징기스칸이라는 사람입니다.

징기스칸이 한때 전쟁에서 완전히 패하고 어느 시골집 헛간에 몰래 숨어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징기스칸이 숨어 있는 헛간에서 어느 날 바닥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개미 한 마리가 열심히 먹을 것을 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미는 자기 몸보다 몇 배가 큰 먹이를 계속해서 넘어지고 구르고 뒤집어지기를 71번이나 반복한 끝에 기어코 자기 집으로 끌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장면을 지켜본 징기스칸은 “맞아 이거야, 개미의 용기!” 이렇게 말하면서 용기를 얻어서 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작은 깨달음으로 인해서 징기스칸은 역사상 가장 큰 나라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넘어지면 바로 옆에 지팡이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넘어지면 엎어져 울면서 ‘왜 내 인생은 이렇게 형편없냐?’라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들은 넘어졌을 때 바로 옆에 짚고 일어설 수 있는 지팡이가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왜 내 인생이 맨날 이런 모양이냐?’ 하면서 한탄하고 가슴을 치면서 울고불고하는 사람입니까?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이 있듯이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다시 일어서고 다시 일어서다 보면 우리들은 목적지까지 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간혹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언제 이것을 다 하냐!’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하면 쉬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하나씩 하다 보면 언젠가 다 할 때가 있겠지....’

우리들은 개미처럼 71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가야 하는 길을 가다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세계, 사랑의 세계가 활짝 열리게 됩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라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면류관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꿈과 비전을 위해서 다시 일어서고, 또 다시 일어서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에서의 일행들은 세일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고, 야곱의 일행들은 아버지의 집, 이삭의 집을 상속받아서 브엘세바에 정착하게 된다.

야곱의 식솔들이 브엘세바에 정착하여 사는 동안에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은 두 번에 걸쳐서 의미심장한 꿈을 꾸게 된다.

창세기 37장의 사건은 요셉이 17살 되었을 때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브엘세바 아버지 집에서 70살이 넘도록 결혼도 못한 채 살고 있던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언약의 아들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가시기 위하여 아버지 이삭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가시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 리브가의 애끓는 모성애와 자신의 받아야 할 축복을 중간에 가로채 가버렸다고 하면서 동생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에서형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아가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성취해 가시려는 분명한 뜻과 섭리와 주권을 따라서 요셉을 믿음의 사람으로, 꿈과 비전의 사람으로, 축복의 사람으로, 구원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기 위하여 어떤 일인가를 추진해 나가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15;13-16의 말씀에서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 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라고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이루어가시기 위하여 요셉을 택하시고 요셉을 통해서 구원의 세계를 활짝 펼쳐가시려고 역사하고 계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세계를 펼쳐 가시기 위하여 어떻게 인도해 가고 계실까?

 

① 각별한 사랑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

 

3-4절에 보면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야곱은 자기의 첫사랑 여인의 아들, 라헬의 아들인 요셉을 각별한 마음으로 사랑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에 비하여 요셉에게는 오늘날로 말하면 명품꼬까옷을 입히면서 사랑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야곱의 집에는 막내인 베냐민이 있다.

요셉이 17살 될 쯤에 베냐민은 적으면 2-3살, 많아야 3-4살 정도 되었을 때이다.

베냐민은 야곱이 숙곳의 삶을 청산하고 벧엘로 올라온 이후에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이동했을 때, 라헬이 목숨을 죽으면서 낳은 아들이다.

어쩌면 라헬의 목숨과도 바꾼 아들이 베냐민이다.

그러니 베냐민은 엄마의 사랑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아들이다.

엄마의 젖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아들이 베냐민이다.

베냐민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고 쓰라린 아들이다.

요셉은 17살이어서 어느 정도 장성한 청소년이라고 한다면, 베냐민은 한창 부모의 손이 필요한 아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베냐민은 한창 엄마의 손이 필요할 때인데도 엄마가 없다.

어쩌면 오늘날 말로 말하면 베냐민은 계모의 손에 의해서 키워지는 것이다.

베냐민은 아무래도 엄마의 몸종이었던 빌하에 의해서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빌하는 자기 주인이 죽어가면서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베냐민을 사랑으로 키웠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아무리 빌하가 지긋한 사랑으로 베냐민을 키운다고 한들 엄마의 손길만큼이야 하겠는가?

그러니 야곱은 자연히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겠는가?

요셉이 아니라 베냐민을 더 아끼고 사랑해 줘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다고 모세는 창세기 37장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지상정으로 보면 요셉보다는 베냐민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정상이다.

베냐민은 13남매 중에서 막내이고, 엄마도 없는 불쌍한 아이이고, 아직은 아주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베냐민을 지극히 사랑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에서는 야곱이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막내인 베냐민보다도 더 요셉을 사랑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형님들이 미워할 정도로 아버지는 요셉을 편애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가실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세워서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다른 아들들 보다, 막내보다도 더 요셉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형님들이 미워할 정도로 요셉을 사랑하도록 야곱의 마음을 이끌어간다.

하나님은 베냐민보다는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구원의 세계를 펼쳐가시기 위하여 형들이 미워할 정도로 야곱에게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냐?’라고 하면서 자녀 사랑에는 똑같이 아픔과 사랑과 은혜의 마음으로 키운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아들 중에 유독하게 정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아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시려는 분명한 의도와 계획과 섭리가 있어서 부모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12아들들 중에서 막내도 아닌 요셉에게 특별한 정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주시는 분이다.

 

② 새로운 구원의 꿈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계획하시려는 구원의 세계를 펼쳐가시기 위하여 요셉에게 두 번에 걸쳐서 의미심장한 꿈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주신 꿈에 대하여 요셉이 7절에서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라고 형들에게 말한다.

두 번째 주신 꿈에 대하여 요셉은 형들에게 9절에서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고 말한다.

요셉이 두 번에 걸쳐서 꾸었다는 꿈은 형들의 심기에 불편한 마음을 주기에 충분한 꿈이다.

심지어는 아버지 야곱의 마음까지도 좋지 않게 만드는 꿈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진행시켜 나가시려는 구원의 세계를 펼쳐가시기 위하여 의미심장한 꿈을 주신다.

 

요셉 자신도 자신이 꾼 꿈이 어떤 의미를 지닌 꿈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요셉이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고 말하는 꿈 이야기를 들은 형님들도, 심지어는 아버지야곱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꿈을 주신다.

사람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는 꿈이었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실행에 옮겨가시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꿈이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이런 꿈을 주신다.

하나님은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꿈을 주시고 계신다.

흔히 말하는 돼지꿈, 용꿈과 같은 세상적인 꿈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활짝 펼쳐가시기 위하여 위대한 꿈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어떤 꿈을 주고 계실까?

하나님께서 의미심장한 꿈을 이미 주셨는데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통해서 우리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는 분명한 의도와 목적과 꿈과 비전을 가지고 보내주신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나서 살면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살도록 하셨는지를 기도하고 깊게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여쭈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과 뜻과 섭리를 갖고 계시는지 여쭈면서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

 

③ 꿈을 이루기 위하여 고통도 감내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요셉에게 두 번에 걸쳐서 의미심장한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시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열어가신다.

요셉이 꾸었던 꿈을 자신만 고이고이 간직하면서 형들이나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형들이 요셉을 죽이거나 팔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요셉이 형들과 아버지에게 자신이 꾸었던 꿈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에 형들은 더욱 더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님들이 양떼들을 치고 있는 곳까지 찾아온 요셉을 형님들은 죽이려고 모의하였다고 18절에 기록하고 있다.

18절에 보면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다.

형님들은 19-20절에서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라고 하면서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서 가두었다고 24절에 기록하고 있다.

요셉을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져서 가두었다는 상황 설명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우물이나 구덩이라는 환경을 기록하는 것은 그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고난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다.

우물이나 구덩이는 고난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그 구덩이에 물이 없다고 말한다.

물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니 물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 살 수 있는 생명이 없다는 의미이다.

요셉이 살아갈 수 있는 물이 없는 구덩이에 갇혔다는 말은 앞으로 요셉의 삶의 여정에는 고난의 삶이 펼쳐진다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고난의 삶으로 인도하고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요셉은 네 번째 형님인 유다의 제안으로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에 팔려나가고, 미디안 상인들은 다시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웃돈을 받아서 팔아넘기고, 이스마엘 상인들은 요셉을 다시 웃돈을 받고 애굽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아넘긴다.

요셉을 애굽 바로의 친위대장에게 팔리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이끌어가심이다.

요셉이 종으로 팔리더라도 앞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구원 세계의 노른자위로 팔려야만 하는 것이다.

요셉을 종으로 팔면서 애굽의 노른자위가 아니라 일반인에게 팔렸다면 요셉은 그야말로 종살이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요셉이 종살이, 노예살이로 끝나버리면 요셉은 고통스런 삶을 사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구원의 세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으로 팔려나간 요셉이 바로의 친위대장의 집으로 팔려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야만 되었고, 형들에 의해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고,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야 하고, 기나긴 종살이, 노예살이하면서 고난을 감내하게 하시는 것이다.

요셉이 겪는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고난이 아니다.

요셉이 겪는 고난은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 구원의 세계를 펼쳐가시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감내해야만 하는 고난이다.

요셉이 겪는 고난은 새로운 축복의 세계로 나아 가는 길목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의지와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서 동행하시며 인도해 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고난이라는 터널을 지나게 만들어가신다.

어떤 이에게는 질병이라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누군가에게는 실패와 좌절이라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누군가에게는 처절한 패배라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불합격이라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누군가에게는 배반이라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누군가에게는 사기당함이라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누군가에게는 사업부도라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누군가에게는 승진 누락이라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누군가에게는 불신이라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경제적인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정신적인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심각한 영혼의 고갈되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의 고난을 주시기도 하신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겠지만, 갖가지 고난이라는 길목을 건너고 나면 새로운 은혜와 감사와 사랑과 축복의 길로 열어주신다.

비포장도로나 자갈밭이나 터널이 지나고 나면 잘 포장된 고속도로와 같은 매끈한 도로가 다가오듯이, 푹풍이 지나고 나면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듯이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 구원의 세계가 다가오게 된다.

현재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 고난의 삶이라면 그 고난은 축복으로 넘어가는 길목임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꿈과 비전과 계획을 갖고 계실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꿈을 주신다.

각자에게 각각 같은 꿈을 주실 수도 있고, 다른 꿈을 주실 수도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한 가지 꿈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한 두 가지 꿈을 꾸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상황에서 태어나든, 이 땅에 사람이라는 인격체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각양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각양 다른 꿈과 비전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때,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꿈을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분명히 꿈은 가지고 있는데, 그 꿈을 이루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이들도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면서 자기 이름을 남기면서 살아야 하는데, 자기 이름을 남기려면 자신이 가진 꿈을 실현해 나가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꿈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꾼 꿈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전생애를 투자하면서 살아가지 않던가.

자신이 가진 꿈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본래부터 금수저 가정에서 태어나서 금수저답게 살면서 평안하게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이들도 없지 않아 많다.

그러나 금수저로 태어나서 금수저로 살아가면서 평안하게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자신들만이 겪어야 할 기나긴 고난의 터널을 넘어가야만 자신의 꿈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꿈을 가진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든 고난의 터널을 걸쳐야만 그 꿈을 실현해 나갈 수 있다.

흔히 스타라는 사람들, 뭔가 업적을 남긴 사람들, 자신의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고난의 터널을 건너서 이겨낸 사람들이다.

자신이 가는 길목에 펼쳐진 고난의 터널을 건너지 않고 뭔가 업적을 남긴 사람은 없다.

피나는 노력이라는 고난, 자신이 감내해야만 하는 온갖 종류의 고난을 견디어낸 사람만이 뭔가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신 꿈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고난의 터널을 건너가야만 축복의 세계로, 성공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주어진 꿈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려야 하고, 땀을 흘려야 하고, 온갖 종류의 비난을 받아야 하고, 듣지 않아도 될 심한 모욕적인 욕을 들어야 하고, 시기, 질투,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들으면서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야만 비로소 축복의 세계로, 성공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이다.

농부의 손에 의해서 밭에 심어진 곡식들도 수많은 고난의 시간을 지나야만 토실토실한 곡식을 거두지 않던가.

과일나무들도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견디어내야만 맛있는 과일을 따지 않던가.

경북 풍기에 계시는 장로님께 전화를 걸어서 사과농사는 잘 되셨느냐고 여쭈었더니 기나긴 장마 때문에 사과나무 잎사귀가 다 떨어져 버리고 사과들만 나무에 덩그러니 달려 있다고 하면서 한탄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올해같이 기나긴 장마와 연거푸 찾아온 태풍 때문에 농작물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농사도 수많은 고난을 견디어야만 농작물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야만 되는 현실이라면 그 고난 때문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도리어 감사드리고 찬양드리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야만 축복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역대상4:10에 보면 야베스라는 사람이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야베스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간곡하게 기도한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야베스가 간곡하게 드린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고 허락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베스(Jabez)라는 이름 자체가 고난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그러니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고난의 삶을 이겨낸 사람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께 간곡한 마음으로 기도하자.

야베스가 드린 기도를 우리들도 믿음으로 드려보자.

그러면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께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허락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의 기도도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허락해 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서 고난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기나긴 고난의 터널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묵묵히 견디어내면서 건너가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 뒤에 찾아올 축복의 세계, 은혜의 세계, 승리의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놓으신 축복과 은혜와 승리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믿음은 고난이 축복의 길목이라 확신하는 힘을 주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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