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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고 용서하기 (마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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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고 용서하기

마태복음 18:21-35

 

구독자 41만을 보유한 유명 유튜브 채널 ‘여행에 미치다’ 조00 대표가 지난 9일 31살의 나이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행에 미치다’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명한 채널이라고 합니다.

(사실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채널 공식 인스타그램에 지난 8월 29일 강원도 평창의 양떼목장을 소개하는 글이 올려 졌는데 이 게시물에 성관계영상이 포함돼있었고 이를 발견한 네티즌들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항의 했다고 합니다.

‘여행에 미치다’ 측에서는 즉각 해당 게시물을 삭제했고 사과문을 게시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네티즌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대표인 조00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누구를 비난하거나 누구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한 단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됩니다.

이 사건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용서받지 못하고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SNS의 발달은 사회적 뭇매를 더욱 광범위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용서받지 못하고 절망 속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그러운 사회적 용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복음서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러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도록 돼 있는데 당신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예수님의 처분을 다그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 사회적 뭇매를 치는 게 당시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그러운 사회적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도 이런 저런 죄가 있지 않느냐? 그것을 생각하고 이 여인을 용서해줄 수 없겠니?’

이것이 오늘 우리사회를 향해서도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용서가 상실된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볼 정도로 용서가 실종되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 진영의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정죄하고 비난하고 심지어는 없는 것 까지 덧붙여 뭇매를 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지적할 수 있고 그래야 바른 길로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사회적 환경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또한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용서 없이 이 사회가 바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이야기는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질문을 하고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스스로 답을 합니다.

당시에 사회적인 관념으로는 3번까지 용서하면 되었기에 7번까지 하면 정말 용서를 잘 하는 것이었습니다.

7번이면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말하였던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은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490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로, 끝까지 용서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것이 용서가 과연 무엇이기에 이렇게 무한대로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일단 용서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 무한대로 용서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지 못해도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일단은 용서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중요하니까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것이겠지요.

 

주님께서는 용서의 중요성을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한 종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었습니다.

결산할 때가 되어서 빚을 갚으라고 하지만 갚을 돈이 없다고 하자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종이 다시 한 번 사정을 하니까 주인은 그 종이 안 돼 보였는지, 아무리 해도 갚을 수 없음을 알았는지 그 엄청난 빚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빚을 탕감 받고 나오면서 이 종이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를 만나게 됩니다.

이 종은 그 동료를 향하여 빚을 갚으라고 다그치고 그 동료가 조금만 참아 주면 갚겠다고 사정하지만 참지 못하고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 사실을 다 임금에게 아룁니다.

그러자 화가 난 임금이 그 종을 다시 불려 들여서 탕감해준 빚을 다 갚도록 하고 그를 옥에 가두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종이 먼저 엄청난 양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종이 임금에게 진 빚은 일만 달란트이고 이 종의 동료가 진 빚은 1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하루의 품삯인데 오늘날 쉽게 계산해서 10만원으로 보면 100데나리온은 천만 원입니다.

천만 원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갚을 수 없는 금액은 아닙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여기에 비해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 즉 6억 원입니다.

이 종이 임금에게 진 일만 달란트는 현재 화폐로 환산하면 6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이 돈은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는데 조금만 기회를 주면 얼마든지 갚을 수 있는 백 데나리온의 돈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았을 때 임금에게 어떤 생각이 들어갔겠습니까?

감정적으로 우선 정말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확 들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화가 나고 괘씸한 것은 이 녀석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을 정말 감사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었는데 그 은혜를 정말 감사하고 있는가? 정말 고마워하고 있는가?

아니면 별로 감사하지 않고 고마워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정말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준 내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한다면 어떻게 백 달란트 빚을 참아주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겠지요?

그렇다면 이 녀석은 나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는 못된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정말 괘씸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읽기, 기도, 전도, 성수주일하기, 십일조 하기 물론 이런 것들을 순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장 순종하기 힘든 일은, 용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용서는 우리의 본능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솔직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라멕이 사람을 죽이고서도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자는 7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사람 죽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자에게 벌을 줄려고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또한 용서는 도덕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도덕은 권선징악을 그 기본에 깔고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능과 도덕에 익숙해진 우리이기에 우리는 용서를 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쉽지 않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내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라는 생각을 뼈 속 깊이 간직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나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데, 그래서 나는 죄의 노예가 되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죄의 빚을 다 탕감해주었다는 믿음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얼마나 깊이 깨닫고 감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고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본다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도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재는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망의 빚을 탕감 해준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

그것을 감사나 하고 있는 것일까? 전혀 은혜를 모르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이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시고 나 같은 죄인 용서하시고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깨닫는 자만이 이웃을 용서하며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생각해볼 것이 용서하지 못했을 때 이 종이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임금은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 그 종을 다시 불러들이고 야단을 치고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깁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드릴 수 있겠지만 한 가지만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고생이고 내가 손해고 내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마치 쥐약은 자기가 먹고 상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쥐약을 내가 먹으면 내가 고통스럽고 종국에는 내가 죽지 상대방은 고통스럽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삶이 이렇게 어리석고 고통을 당하는 삶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지 못하여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과 심한 말다툼을 하면서 하루 종일 기분 나쁜 부인이 저녁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하면서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들어오자 아침에 한 말을 생각하며 따지려고 하는데 남편이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왜 이러느냐고 합니다.

아침에 당신이 이런 말을 했지 않느냐고 하니까 아니 그 까짓것을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나는 다 잊어버렸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루 종일 나만 고생하고 나만 속상해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를 끼친 그 나쁜 인간, 당신이 용서하지 못한 그 사람은 하루 24시간 중에 여러분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앉으나 서나 그 사람이 생각나고, 자리에 누우면 천정에 그 얼굴이 보이고, 그와 비슷한 얼굴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분노가 치솟습니다.

 

여러분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만,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손해보고 내가 힘들고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 중에 하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벗어나기만 해도 병이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할 때 여러분들은 참 평안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이런 용서의 삶을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무한대의 용서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한 두 번의 용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기가 어렵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두 번으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그런데 잘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해도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 때마다 계속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가 완전히 될 때까지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에 관해 평생 연구한 미국 풀러신학교의 윤리학 교수인 루이즈 스미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날 우리 동네 경찰관 말로니가, 별 이유 없이 제 막내아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분노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경찰관 때문에 며칠을 집 안에서 큰 소리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를 용서하지 못하면 제가 비참한 사람이 될 것 같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정말 용서했습니다.

저는 서재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말로니 경찰,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어느 날, 순찰차를 타고 가는 그를 본 순간 다시 분노가 생겼고 저는 다시 그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번째 용서였기에 조금은 쉬웠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경찰관이 난폭한 행동으로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소식이 제게는 꿀보다 달았습니다.

마치 제가 보복을 한 것처럼 달콤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저는 ‘그를 다시 한 번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그를 완전히 용서하기 위하여 과연 몇 번 더 용서해야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한, 두 번의 용서가 필요하지만 분노가 오를 때 마다 끊임없이 용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결단적인 용서가 필요하지만 또한 감정적인 용서가 필요합니다.

 

남매가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격한 감정으로 대립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머니가 오자 ‘오빠가 먼저 싸움을 걸었어요.’ 누이동생이 씩씩거리며 말합니다.

그러자 ‘아니에요. 쟤가 먼저 시작했어요.’ 오빠도 큰소리로 말합니다.

두 아이의 말을 다 들은 어머니는 손을 잡고 이렇게 달랬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고 싶지 않단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누가 먼저 그만두려 하는가, 누가 먼저 화평한 사람이 되는가 하는 점이란다.’(202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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