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우등 인생 (눅19:1-10)
본문
당신도 우등 인생 (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거기를 지나가시더라. 2. 보라, 거기에 삭개오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들 가운데 우두머리요 또 부자더라. 3.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되 키가 작으므로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볼 수 없어서 4.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5.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시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하시니 6. 그가 속히 내려와 기쁘게 그분을 받아들이거늘 7.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이르되, [주]여, 보소서, 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즉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KJV)
오늘 누가복음 19장의 본문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아시는 난장이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서너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사적인 방법에서 삭개오라는 죄인을 찾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래서 죄인에게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 하는 구원사적 방법에서 이 본문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둘째,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 본문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열망했던 삭개오의 신앙, 돌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는 그의 열심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신앙 교훈적 차원에서 이 본문 말씀을 살필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하고 주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회개라고 하는 것이 무어냐 말로만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뉘우치는 ‘행동의 회개’ 이런 차원에서 신앙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넷째, 인간 심리적 차원에서 이 본문을 살필 수 있습니다. 키가 작아 고민 속에 살았던 삭개오라는 그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관찰함으로서 오늘 우리들에게 좋은 삶과 신앙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오늘은 넷째 인간 심리적 차원에서 삭개오의 내면의 세계를 관찰함으로서 본문 말씀에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삭개오의 내면 심리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낱말이 있는데 그 key word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3절에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되 키가 작으므로.”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삭개오가 키가 작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키가 얼마만큼이나 작았겠습니까? 유대인들의 평균 키를 160-170cm로 우리가 상정을 해봅시다. 그런데 160cm 정도 되는 사람들이 쭉 서있으면 삭개오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깨는 얼마입니까? 150cm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꺠 넘어로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150cm도 되지 않고 아무리 많이 커야 130-140cm 정도 되는 작은 키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야생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키가 작았습니다. 어른의 키가 120-130cm라고 한다면 이것은 난장이 입니다. 이런 작은 키 때문에 그는 늘 심리적으로 열등감 속에 빠집니다.
때로는 구두에 5cm 정도의 굽을 달아 보지만 키가 2-3cm 작은 것은 해결할 수 있지만 30-40cm나 작은 키를 높은 구두를 신는다고 해서 감추어 지지 않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놀립니다. 돈이 많은 세리장이였지만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깊은 열등감이 그의 가슴을 때립니다. 따라서 그의 삶 속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언제나 피해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길을 지나가도 보는 사람마다 난장이 난쟁이 삭개오 하면서 놀리는 것만 같습니다. 신체조건을 통한 열등감이 그의 삶을 조금씩 좀먹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나는 못났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교만하면 안 됩니다. 자고하지 마시오. 교만하지 말라고 설교는 많이 하지만 열등감을 버리라는 말씀은 많이 않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남 보다 잘났다고 난척하는 교만도 문제지만 따지고 보면 남보다도 나는 못하다고 나를 비하시키는 이 열등감은 더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인생 전체를 파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인도나 아프리카에 가면 코끼리를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 큰 코끼리를 사람이 잡아당기거나 총을 몇 발 쏜다고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코끼리를 잡는데 어떤 방법으로 잡는가 하면 코끼리가 지나가는 길목에 지름이 5cm 되는 굵은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어 놓습니다. 지나가다가 올가미에 코끼리 뒷발이 걸리면 잡아당깁니다. 코끼리 뒷발에 밧줄이 칭칭 감겨서 코끼리가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밧줄 한쪽 끝을 지름이 2-3m 큰 야자나무 뿌리에다가 그 밧줄을 감아 놓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번 갈라서 며칠을 꽹과리를 두드리고 나무로 찌르고 잠을 못 자게 괴롭힌다고 합니다. 그러면 코끼리가 힘을 써서 도망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뛰어 보기도 하고 주저앉아 보지만 아무리 큰 코끼리라고 할지라도 서너 아름이 되는 야자나무가 뽑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일 주일 정도를 지나면 코끼리가 완전히 지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아! 나는 여기서 도망갈 수가 없구나. 나는 이제 여기서 헤어날 수가 없구나.” 하고 자포자기를 합니다.
그런 다음 야자나무의 밧줄을 풀고 조그마한 부지깽이 나무를 묶어 놓아도 이 코끼리가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도망갈 수 없지.” 하면서 조그마한 나무에 묶여 있어도 도망가기를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조그만 어린이가 코끼리의 밧줄을 살살 잡아 당겨도 어디든지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코끼리를 얽어매는 이런 작은 나무토막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내어 버리고 박차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그 속에 매여서 허덕이게 되면 결국은 인생 전체를 파괴하는 커다란 장애요소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한 때는 열등감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인가 하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몸이 좀 뚱뚱합니다. 다행히 우리 구 선생님, 동지가 교회에 나오게 되셔서 얼마나 큰 다행입니다. 이 몸무게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80Kg로 올라가고 결혼하고 나니까 90Kg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여학생들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뚱뚱하다고 놀릴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 비대한 몸을 가지고 열등감 속에 살면서도 장가간 것을 보면 제가 생각해도 참 대견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마 아내한테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프로포즈할 때 그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굳게 믿습니다. 그 때 그 용기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용기라고 믿습니다.(교우들 웃음)
여러분의 삶을 좀먹는 그런 열등감에 사로잡히지는 않습니까? 학력이 좀 부족하다고 신체조건에 이상이 있다고 주변 환경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열등감에 여러분을 얽어맬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여러분을 못났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여기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과 여러분을 맞바꿀 정도로 여러분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패배의 열등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박차고 극복하고 이기면 여러분도 모두 위대한 우등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 삶과 영혼을 좀먹는 이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등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오늘 그 해답을 찾으므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첫째로 자기비하의 열등감을 극복하자.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우등 인생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자아를 다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자아를 재발견 한다는 것은 자기의 가치를 재인식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라져야 할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사명과 가치를 가진 귀한 존재들입니다. 때로는 하수도와 걸레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냄새난다고 쳐다보지도 않고 더럽다고 집구석에, 방구석에 처박아 두는 하수도요 걸레지만 우리 하수도와 걸레가 없으면 당신들 살아갈 수 없소. 사실 우리에게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답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그런 걸레 조각, 냄새나는 하수도 구멍 하나 속에서도 사명과 가치가 있는데 하물며 인간에게 왜 가치가 없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가치와 여러분의 삶의 의미와 그 사명을 재인식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이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아 재발견한다는 말은 삶에 대해서 자신감과 의욕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챨스 에머슨은 그렇게 말합니다.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의 첫째 비결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면 이 63빌딩과 같은 빌딩을 수십 개를 가지고 있는 부동산 재벌이 있습니다. ‘록 헉슬리’라는 사람인데 언제 미국에 가면 한번 만나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처럼 많은 돈을 벌어서 성공했던 비결은 나 자신을 신뢰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여러분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여러분을 괴롭히는 나는 못나고 부족하다고 하는 이 열등감에서 벗어나서 위대한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한번 봅시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삭개오하고 예수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삭개오가 하는 말은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이르되, [주]여, 보소서, 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말도 많이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만 했겠습니까? 하루 저녁 같이 식사를 하면서 그날 밤을 같이 잤는데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 가시니까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무릎을 붙들고 하소연을 합니다.
“에수님 저는 키가 작습니다. 저 자신은 난장이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난장이라고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140cm의 키를 가지고 난장이가 아니라고 우길 수가 없습니다. 다 남들이 나를 무시합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많이 사람들이 돈 때문에 내 앞에서 굽실굽실 하다가도 돌아서면 나를 욕합니다. 이 작은 키 때문에 내가 인생의 기를 펴고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 차라리 제가 죽고 싶은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면서 자기의 신체조건 때문에 예수님의 무릎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을 하고 신세 한탄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삭개오야! 그렇지 않다. 너는 야생 무화과나무 위로 오르는 적극적인 마음을 가졌고 하나님의 아들인 나를 만나려고 하는 신앙적인 진지함이 너에게 있었다. 그리고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함. 이것은 키가 큰 사람보다 좋은 점이 아니냐? 키가 작다고 못났다 하느냐 너는 믿음에 큰 사람이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삭개오는 지금까지 작았던 신체적 열등감을 바라보았었는데 이제는 자기의 마음속에 자기의 신앙 속에 자기의 삶 속에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요소가 있음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이제 키가 작은 것을 한탄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작은 키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재발견한 삭개오가 아마 튈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너무너무 기뻐서 “예수님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키가 작다고 하지만 나는 키가 작은 반면에 더 좋은 은혜를 제가 가졌습니다. 그 은혜를 활용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열등 인생으로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축구선수 펠레가 수영을 못해서 울지 않았습니다. 화가인 피카소가 축구를 하지 못해서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남과 같지 않다고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슨 일에서든 최선을 다하면 그가 곧 위대한 우등 인생인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기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에서는 조용필이 제일 잘 부르겠지요.
노래로서 그 사람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면에 있어서 조용필 가수는 이홍열 목사 보다 몇십배 몇 백배 더 위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가 노래를 잘 부르기 때문에 저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노래를 잘 불러서 우등 인생을 살고 저는 열심히 설교하고 목회해서 우등 인생을 살면 그만입니다. 하나님 주신 달란트가 각기 다를 뿐입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는 귀한 가치를 지닌 분들입니다. 열등함의 요소보다 위대함의 씨앗들을 더 많이 가진 분들입니다. 하나님 뜻은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셔서 위대한 우등 인생의 삶을 살아 가시길 바랍니다.
2. 둘째, 신체불구의 열등감을 극복하자.
우등 인생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달란트를 찾아서 활용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만 모든 달란트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필요를 따라서 골고루 재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재능을 받았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재능이 적으므로 열등감에 빠질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재능을 최선을 다해서 활용하면 그가 곧 우등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10살짜리 꼬마 소년이 있었습니다. 막 뛰어 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넘어졌습니다. 팔꿈치에 상처가 났습니다. 왼쪽 팔꿈치에 상처가 덧나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니까 오른쪽 팔보다 무려 20cm가 짧아졌습니다. 그러니 길을 걸을 때도 한 손은 길 한 손은 짧습니다. 그래서 아주 보기 흉한 신체불구가 되었습니다. 이 소년 자라 20살이 되었습니다. 신체적 조건 때문에 많은 열등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길거리에 나갈 수도 없었고 여자 친구를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성격은 날로 포악해지고 삐뚤어 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젊은이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나 한쪽 짧은 팔 때문에 패배의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청년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골프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골프라고 하는 것이 특별한 신체조건을 요구합니다.
저도 연세대학교를 다닐 때에 체육시간에 골프를 아주 쪼금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마 사회에 나가면 지도적 인사가 될테니까 골프를 치라고 체육시간에 골프를 가르쳐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골프를 치려면 오른손은 골프채의 아랫부분을 잡고 왼손으로는 자루 윗부분을 잡습니다. 그래서 골프채를 잡고 뒤를 돌려서 힘차게 두드려야 골프공이 창공 높이 날라갑니다.
그런데 정상인들은 팔 길이가 똑같기 때문에 골프체를 잡으려면 어깨를 쭈그려야 되고 한 쪽은 펴야 되기 떄문에 상당히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수술을 해서 자연적으로 왼쪽 팔이 20cm가 짧아졌습니다. 그러니 오른손 왼손 쭉 펴서 세게 치게 됩니다. 팔이 20cm나 짧은 그 청년이 골프에 투신했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가 곧‘에드 파골’이라는 유명한 골프 선수입니다. 짧은 팔 때문에 인생을 한탄하기에는 그 인생은 너무나 큰 가치가 있습니다. 20cm나 모자라는 팔 때문에 열등감 속에 패배의 인생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재능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당신도 우등 인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공부를 못한다고 열등 인생이 아닙니다. 용모가 빼어나지 못한다고 열등 인생이 아닙니다. 자신의 재능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죽도록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세계적인 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말은 지질이도 못했다고 합니다. 파티석상에서 말을 시키면 일어났다가 땀만 뻘뻘 흘리다가 그냥 앉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 못하는 대신에 수학문제를 잘 푸는 재주로 해서 오늘날 세계의 대 물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열등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남이 갖지 못한 여러분만의 재능을 활용하여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십시오. 그 사람이야말로 스스로의 약점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우등 인생이 될 것입니다.
3. 셋째로 나를 사로잡은 열등감을 극복하자
우등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마음속에 승리의 자아의식을 가득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실패만 거듭하는 열등 인생과 언제나 성공하는 우등 인생의 차이는 극히 간단합니다. 그 마음의 차이입니다. 열등 인생의 마음에는 어떤 것이 사로잡습니까? 실패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언제나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항상 자기는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뭔가 나서서 해보았자 남들의 웃음거리 밖에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 실패에 대한 완벽한 변명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완벽하게 자기 실패와 열등감의 이유를 변명한다고 해도 그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 열등감이 우월감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실패와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을 변명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숨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대신 마음속에 언제나 승리자의 자기 모습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실패의 이유를 찾아서 변명을 준비하는 시간에 성공의 방법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 월, 화, 수요일 날 양양에서 목사님들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세미나를 쭉 하는 가운데 왜 우리교단은 다른 교단처럼 성장하지 못하는가? 주제를 시작을 하니까 날카로운 원인 분석과 예리한 판단으로 루터교가 성장 못하는 이유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한참 말을 듣다가 제가 그렇게 애기했습니다.
“목사님! 왜 우리가 성장하지 못했는가? 그 이유 찾기를 해서 천 개의 이유를 찾았다고 합시다. 그것이 우리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 마음만 아프고 스스로 교단 목사는 못났다고 하는 감정 때문에 상처만 받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왜 성장하지 못했냐는 이유 분석은 집어치우고 차라리 어떻게 하면 우리 루터교가 자라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지 않아야 되겠습니까?
백년 전 장로교 감리교를 보면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 루터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될 수 있습니다.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됩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나이 어린 목사가 주제넘게 한마디 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의 뜨거운 박수로 동감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못났다고 하는 생각은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슴속에서 실패와 변명을 내어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나도 승리한다고 하는 승리자의 자아의식을 가슴 깊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였습니다. 투르먼은 대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아니젠하워는 심장병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자신의 신체적 열등감 속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성공과 승리의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들이 되었습니다. 열등 인생은 없습니다. 다만 승리에의 의지가 약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4. 넷째로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을 극복하자.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우등 인생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은 여러분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듭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를 다시 봅시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합법적 강도인 세리장이었습니다. 돈만 아는 수전노였습니다. 민족에 피를 빠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로마권력에 야합하는 지조 없는 강아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은 난장이였습니다. 돈은 있었으나 인간적으로 볼 때 무가치한 열등 인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신체조건 때문에 자기를 학대할 수밖에 없는 열등감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재산의 반을 나누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강제로 빼았은 것은 4배로 갚았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었던 삭개오가 이제 돈을 쓸 줄 아는 주인이 되었습니다. 물질적 인간이 이제는 윤리적 도덕적 인간으로 위대한 삶의 전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무가치했던 그가 가장 가치 있는 인간으로 전환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했습니다. 이제 돈만 아는 열등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작은 키 때문에 자기를 학대하는 열등감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인간답게 살 줄 아는 여리고의 우등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물질이 있습니까? 그 물질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듣고 보니 우리교단의 신학교 기숙사 한 끼 식사비가 얼마인가 하면 600원 밖에 안한답니다. 그런데 그 600원 짜리 밥을 사먹을 수가 없어서 그저 한 끼는 굶고 한 끼는 라면으로 빵 한두 조각으로 때우면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주의 종들이 태어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책을 사주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얼마나 이 세계의 복음화가 더 빨리 올 수 있겠습니까? 물질을 가지신 분은 물질로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건강이 있는 분은 그 건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남다른 특별한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세속적인 일보다 가장 가치 있는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 때문에 열등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삭개오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니겠습니까? 많은 열등감이 우리를 아프게 찌릅니다. 장로교 감리교 목사님들 모인 곳에 루터교 목사 하나 끼면 주눅 들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스스로 못났다는 생각에 아파하기 보다는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돌 무화과나무 위에서 내려오라. 키가 작아서 괴로워하는 네 심정을 내가 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거하겠다. 나는 너를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바로 못난 사람들을 찾아서 구원하려함이 아니더냐. 네가 진정 뉘우쳐 바른 사람이 되었으면 키가 작고 크고는 문제가 아니다. 네게 구원이 임했도다.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삭개오를 못났다고 꾸중하는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모두를 위대한 우등 인생으로 치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모두가 위대한 우등 인생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 참으로 보람 있는 우등 인생으로 인정하셨는데 왜 우리가 스스로를 자학하며 열등감에 괴로워야 할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공의 자의식을 가슴에 품고 자신 있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영적인 새로운 창조를 하신 승리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심으로 누가 뭐래도 여러분은 우등 인생입니다. 주님과 함께 위대한 승리와 우등 인생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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