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왜 이런 일이? (창34:1-17)
본문
어떻게 왜 이런 일이? /창세기34;1-17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한답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그 사랑 때문에 50년을 함께 사는 것”이라 합니다.
신혼 때는 누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너만 있으면 돼”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너만 없으면 돼!”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아주 쉽게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의리이고 믿음’입니다.
부부간에 의리와 믿음이 있다면 인생도 행복도 의리 의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지역이 바뀌어도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오늘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입고 느끼고 고백하며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P4
하나님께서 밧단 아람에서 데릴사위로 20년 동안 종처럼 살고 있는 야곱에게 이제는 네 고향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셔서 온 가족들과 식솔들을 이끌고 밧단 아람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야곱은 에서형님 때문에 20년 동안 마음에 무거운 짐 덩어리를 갖고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무거운 짐 덩어리도 깨끗하게 해결해 주신다.
그렇다면 야곱은 당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브엘세바로 돌아갔어야 한다.
야곱이 브엘세바로 돌아가야만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축복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신 언약의 축복이 이제는 야곱에게 상속되어서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을 받아누리게 된다.
야곱은 이미 하나님께서 에서형님의 마음을 눈 녹듯이 녹여주셔서 완전하게 화해시켜주셨는데도, 야곱은 여전히 에서형님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 무서운 마음을 지을 길이 없다.
이에 야곱은 에서형님이 군사들로 호위하면서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호의도 거절하면서 에서형님을 따라가지 못한다.
야곱은 에서형님이 사는 세일산으로 따라가서 형님을 뵈겠다고 말해 놓고서는 세일산으로 가지 못하고 숙곳으로 이동한다.
숙곳에 정착하면서 장막을 치고, 가축 떼들을 위하여 우릿간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께 제사, 예배를 드리면서 정착하려고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제사드리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예배드린다고 해서 모든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예배는 드려도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수두룩하다.
간혹 신앙인들 중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해악을 끼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그럴까?
아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정해진 시간을 따라서 삼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철저하게 예배드리는 삶을 살면서도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아픔을 주면서 산다.
그들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그들에게서 예수님의 모습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인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간에 숙곳이란 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삶,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된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고 싶은 않은 일들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믿음의 삶이 어떤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인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계실까?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야곱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하여 어떻게 하고 계시는가?
D4.
오늘 창세기 34장의 말씀은 야곱이 불순종하며 산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불순종하며 살았던 삶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제대로 깨닫게 하려고 일을 꾸미면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어쩌면 34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야곱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들이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예배드리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순종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에 야곱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신다.
① 사랑하는 딸이 성폭행을 당함으로 지울 수 없는 수치를 입게 하신다.
야곱의 딸 디나는 숙곳에 있는 장막에서만 살다보니 그 땅의 아가씨들, 소녀들은 어떻게 사는가 보고 싶어서 세겜 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디나가 세겜 성에 들어갔는데, 하몰의 아들 세겜이 새롭게 디나를 보니까 너무 예뻐보여서 디나를 자기 여자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세겜은 디나를 자기 처소로 끌고 가서 성폭행을 하게 된다.
디나는 세겜성의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딸이 몹쓸 짓을 당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삶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깨닫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만히 놔두시고 지켜만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때로는 직접 관여하여 몹쓸 일을 당하지 않도록 막아주시기도 하신다.
사라가 그랄의 아비멜렉 왕에게 끌려갔을 때도 아비멜렉을 단속하면서 사라가 몹쓸짓을 당하지 않도록 막아주신다.
이삭과 리브가가 블레셋 땅으로 이주했을 때도 하나님께서 아비멜렉 왕에게 나타나서 리브가가 몹쓸 짓을 당하지 않도록 막아주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겜에게서 디나를 지켜 주시지 않으신다.
디나가 세겜에게 몹쓸 짓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실 뿐, 세겜을 막아서 디나를 지켜주지 않으신다.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은 야곱을 다시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디나가 몹쓸 짓을 당하는 꼴을 보고 계시면서도 가만히 지켜만 보실 뿐, 디나를 구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② 할례라는 미명 아래 아들들이 살인죄를 저지르게 하신다.
디나를 성폭행한 세겜은 디나를 자기 부인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세겜은 아버지 하몰에게 디나를 부인으로 받아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아들의 부탁을 받은 하몰은 야곱과 디나의 오빠들에게 찾아가서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라고 부탁한다.
지역이나 가문에서 서로 화합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서로 혼인시켜서 사돈을 맺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지방호족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호족의 딸들을 왕후로 맞이하면서 혼인정책을 사용한다.
하몰은 야곱의 일행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서 서로 통혼하여 사돈이 되면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 하면서 디나를 자기 며느리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세겜도 아버지 하몰과 함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라고 하면서 딸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애원한다.
이에 야곱의 아들들은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라고 하면서 할례 제도를 조건으로 서로 통혼할 수 있다고 한다.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이 내세운 조건에 좋은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서 세겜성민들을 다 모아서 이렇게 제안한다.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라고 제안하면서 세겜성민들이 다 함께 할례를 받게 된다.
세겜 성민들이 할례를 받은 지 3일 되는 날에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할례를 받아서 누워있는 성읍을 공격하여 할례받은 사람들을 다 죽이는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도, 하몰도 죽이고 여동생을 데리고 돌아온다.
다른 아들들은 이미 죽은 세겜 성읍에 들어가서 양과 소와 나귀와 성읍에 있는 모든 것들과 자녀들, 아내들을 사로잡아 오는 노략질을 하게 된다.
디나의 오빠들은 디나가 가나안의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더럽혀졌다는 이유 하나로 할례제도를 악용하여 세겜성민들을 도륙하고 노략질한다.
더럽혀진 동생의 수치를 갚아준다는 대의명목으로 세겜성민들을 도륙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면서 복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맺은 거룩한 할례언약을 여동생의 복수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할례언약은 살리는 언약이지 죽이는 언약이 아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살리는 언약을 죽이는 언약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할례를 받은 세겜성민들을 할례받은 지 3일째 되는 날이 가장 고통스러운 날인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성민들을 죽이고 노략하는 날로 사용한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자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행들을 이미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냥 묵묵히 지켜만 보고 계시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아들들의 악행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막아주시지 않고 묵묵히 지켜만 보고 계셨을까?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된 결정이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진 원인임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묵묵히 지켜만 보고 계시는 것이다.
야곱에게 디나 사건이나 아들들의 살인사건, 노략질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평탄했다면, 하나님께서 디나사건도, 살인사건과 노략질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계속 숙곳에 정착했더라면 야곱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족장 반열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들을 통하여 거룩한 이스라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하려고 하는 구원의 세계가 열리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묵묵히 지켜만 보시는 것이다.
③ 커다란 두려움에 빠지게 하신다.
결국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는 수치나 시므온과 레위가 살인자가 되는 수치는 아버지 야곱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아버지 야곱이 믿음 안에서 제대로 된 판단과 결단이 이루어져서 고향으로 돌아갔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 야곱의 잘못된 생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야곱은 이젠 분별하지 못하는 청소년도 아니고, 패기 넘치는 청년도 아니고, 이젠 서서히 일생을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정리해야 할 중년의 삶을 지나서 노냔의 시기로 접어들 때이다.
아버지의 연약함, 아버지의 무능함, 아버지의 유약함으로 인해서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야곱 자신도 큰 두려움에 빠져들게 된다.
세겜 성민들 뿐만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이 세겜성 추장과 함께 할례를 받았다가 죽어간 백성들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여 큰 연합군을 형성하여 자신을 공격해 온다면 야곱의 일행들은 꼼짝없이 멸족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야곱은 살인죄를 범한 시므온과 레위에게,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라고 하면서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고 무서움에 벌벌 떨게 된다.
야곱이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감과 무서움은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져야 할 감정이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나 무서움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새로운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
야곱이 느끼는 감정은 야곱으로 하여금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는 감정이 된다.
야곱이 느끼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더이상 숙곳에 정착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제야말로 진짜 아버지 집으로, 브엘세바로 돌아가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L4 & B4.
야곱의 일행들이 숙곳에 정착하여 얼마나 살았을 때, 34장의 사건이 벌어졌던 것일까?
디나는 레아가 낳은 7남매 중에서 막내딸이다.
레아는 야곱과 혼인하여 13년 동안에 7남매를 낳는다.
레아가 연년생으로 자녀를 낳기도 하고, 2살 정도 터울을 두고 자녀를 낳았다고 가정한다면 디나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기 1-2년 전 정도에 낳았을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그러면 디나와 요셉은 몇 살 정도 차이가 날까?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낳은 12남매 중에서 요셉이 막내처럼 보인다.
요셉이 12남매 중에서 막내라고 하더라도 디나는 레아가 낳은 7남매 중에서도 막내이기 때문에 디나와 요셉은 1-2살 누나이거나 동갑일 가능성이 많다.
나중에 요셉이 브엘세바로 돌아간 다음에 17살에 형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팔려나간다.
숙곳에서 브엘세바로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겜이 디나를 성폭행하고 자기 아내로 맞이하려고 한 점을 보면 디나가 아주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성숙한 때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디나는 적어도 10대 중반은 되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는 것과 아들들의 살인죄를 범하여 벧엘로 올라갔다가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에 야곱의 일행들이 숙곳에서 적어도 10년은 족히 넘게 살았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야곱의 일행들이 벧엘로 올라가지도 않고, 브엘세바로 돌아가지도 않았지만 10여 년 동안 큰 사건이 없이 평안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 신앙인들이 불순종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해도 어느 정도는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큰 사건 없이 그런대로 평안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는 묵인하면서 지켜보고만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돌이키거나 바뀌지 않으면 돌이킬 수밖에 없는 사건, 절대로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숙곳을 떠나 서원했던 벧엘로 올라갔다가 고향,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디나가 성폭행당하는 일과 아들들이 살인죄와 노략질하는 죄 를 범해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어떤 결단과 결심을 해야 할까?
가족들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결정을 한다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들이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가 아닌가는 당장에는 잘 모른다.
야곱도 숙곳에 정착하는 것이 이런 일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근 10여 년 동안 비교적 평안하게 살았기 때문에 숙곳에 정착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야곱이 숙곳에 정착하여 머물게 되면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거나 아들들을 살인자가 될 것이라고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숙곳에 정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에서형님과는 멀어지면 멀어져서 사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 숙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정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야곱의 일행들이 숙곳에 정착한 결과가 자식들이 큰 곤경에 처하게 된 요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본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비록 에서형님이 걸림돌이 될지라도 아버지의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아버지의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믿음으로 순종하였더라면 화가 아니라 도리어 축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도 무언가를 결단하여 결정해야 할 때, 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나 마음으로 결단하지 말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으로 결단하고 믿음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감동을 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고, 가족들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와 민족이 평안한 가운데 살아가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결단하고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자기 생각의 테두리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온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받게 된다.
믿음으로 사는 척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 말씀이 이끄는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자기 생각과 마음의 테두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삼위 하나님의 말씀과 감동과 역사하심을 따라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