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행14:1-28)

본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행14:1-28)



(행14:1-28)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1.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던 바나바와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최초로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됩니다. 이들이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도착한 첫 번째 선교 여행지가, 터어키 해안에서 각각 10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동편에 있는 섬인 구브로 섬(키프로스,Cyprus)입니다.(행13:4) 이곳은 바나바의 고향이고 안디옥 교회 성도 일부가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구브로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마술사 엘루마가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로 방해합니다. 그때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엘루마를 주목하며 “(행13:10-11)...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고 하자 엘루마는 즉시 눈이 멀게 됩니다. 이를 보고 구브로 섬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행13:12)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2. 바나바와 바울은 계속해서 비시디아와 안디옥을 거쳐 이고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고니온은 현재의 터키의 중요한 상업도시인 ‘코냐’(Konya)입니다. 이곳에도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고니온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유대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상당수의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기를 거절하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두 사도에게 악감을 품도록 했습니다. 이에 두 사도는 좀 더 오래 머물면서 더욱 더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믿기를 거절했던 유대인들은 그곳 관리들을 선동하여 그들과 합세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학대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결국 두 사도는 이들과 충돌을 피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로 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일을 두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복음을 전하다 보면 때로는 핍박을 받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핍박을 고스란히 받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피하기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에게 ‘순교자의 피’보다 ‘전도자의 발걸음’을 더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이 두 사도들이 해야 할 사역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해갔던 것입니다. 이곳은 이고니온 성에서 약 38km 남쪽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회당은 없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곳을 마지막으로 제 1차 선교여행을 마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선교 여행에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1차 선교 여행 막바지인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에서의 복음 전도는 핍박이 고조된 그야말로 가시밭과 같은 사역이었습니다. 이곳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태어나면서 앉은뱅이가 되어 전혀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었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을 찾아갈 수가 없었는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두 사도가 왔으니 그 이상 축복의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앉은뱅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를 부르고 또 그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을 만한 때가 있고, 또 은혜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건강과 힘이 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젊음과 물질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복음 전도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늘 전도하고 싶은 생각이 끓어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기도 중에 가족이 생각나고 친구가 생각나고 안 믿는 남편이 생각 나서 가슴이 미어질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상대방의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옥토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그 때를 만나서 놓치지 않고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꾸준히 경청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바울은 그를 주목하여 보는데 그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일어서라!’ 하자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말로 놀라워하며 흥분한 채로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은 주로 말을 하기 때문에 ‘헤르메스’라 불렀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헬라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며 사고방식을 지닌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며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부르며 두 사도를 신으로 숭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우스’는 헬라 신화에서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이고,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대변자로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입니다. 아마 바나바는 당당한 체구와 존경받을 만한 위용(威容)을 지닌 사람(Chrysostom, Zahn)으로 보였기 때문에 ‘제우스’로 불리었을 것이며, 바울은 앉은뱅이에게 말을 했다는 점에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인 ‘헤르메스’로 불리워진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에게는 전해져오는 신화(神話)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때 제우스(Zeus)와 헤르메스(Hermes) 신이 이 세상에 아무도 모르게 변장하고 내려 왔습니다. 지구상에는 아무도 그들을 영접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늙은 농부인 빌레몬과 그의 처 바우시스가 집으로 영접했고 친절하게 해주었습니다. 결과는 빌레몬과 바우시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몰살을 당했는데 이 두 농부는 찬란한 신전의 수호자가 되었고, 후에 죽었을 때는 두 그루의 큰 나무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번에는 전과 같은 실수를 하여 신을 몰라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체격이 건장하고 귀족 같았기 때문에 신중의 왕인 제우스(Zeus)라고 생각했고, 헤르메스는 신들의 소식을 전하는 대변자 신으로 신들의 사자였으므로 말 잘하는 바울을 보고 헤르메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을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거나 신의 장난이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의 무속을 보면 산에 가면 산신령이 있다하여 서낭당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고, 동네에는 토지신이 있어서 그 모습으로 남녀의 장승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귀신들이 많아서 무당들은 굿을 하면서 수많은 귀신들을 달래는 일을 하였습니다. 특히 초대교회의 시대에는 그리스와 로마에 수많은 우상들로 온 도시가 가득 차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1:21-23)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런데 신을 잘 섬기려고 우상을 만들 때 인간들은 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쓰다 남은 통나무요, 산에서 가져다 정으로 조각한 돌맹이일 뿐이며,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쪽이 떨어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지방 문화재 운운하면서 그 우상에게 음식을 바치고 허리가 휘도록 절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병든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그런데 본문을 보면 “(행14:13) 성밖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라고 했습니다. 두 사도가 서 있는 곳이 마침 제우스의 신전이어서 꽃다발로 장식한 황소들을 몰고 두 사도의 발 앞에 와서, 살아 있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겠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수많은 돌부처를 만들어 거기에 음식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며, 심지어 스리랑카 같은 불교 국가에서는 석가가 죽으면서 남긴 이빨이 있다고 하여, 매년 수십만 명의 불교도들이 금과 은과 보석들을 가지고 와서 그 이빨 앞에 바치고, 엄청난 양의 루비와 꽃으로 둘러 쌓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매일 40kg의 쌀밥을 지어 바치면서 복을 빌기도 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대단히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파리(fly) 신에게 소를 잡아 드리는 예식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으나, 한 번도 제사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하고 귀신들렸다고 배척하였는데,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제 산 사람들에게 거창한 제사를 드리겠다고 법석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3. 이에 두 사도는 펄쩍 뛰면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옷을 찢으면서 그들에게 달려가서 소리를 치며 제사 행위를 막았습니다.

(행14:14-15)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

계속하여 두 사도는 자신들이 그들과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죄인이요 허물과 약점을 많이 가진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 말하며, 그 허망하고 부패한 우상 종교를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행14:15-18)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선지자 이사야는 우상 종교의 허망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44:18-19) (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19)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 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그리고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며 거기에 절하는 자들을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되고 망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 동무와 타냐의 대화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 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고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신을 쫓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의 신도 물질의 우상도 조만간 그 손을 놓을 것입니다. 평생이라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기울였던 그 안개 같은 우상들을, 코마로프가 불 붙는 거리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았듯이 얼마 뒤에 그를 배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무한 우상들을 쫓던 외로운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아직 하나님에 관하여 깊이 알지 못했는데,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자 그것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별들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은하수가 보여서 그것을 예배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에 달에 떳는데 그것을 숭배하려고 하니 또 며칠 지나지 않아 달이 기울고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태양을 섬기려고 하였는데 해만 지면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도 포기하고, 결국 영원히 변하지 않고 또 사라지지않는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두 사도의 외침은 바로 그 길만이 인생이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까지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오래 동안 참으시며 기다십니다.

(사48: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유대 사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천사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 때 정의의 천사는 말하기를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들은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진리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들은 온갖 거짓을 다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긍휼의 천사가 말하기를, “사람을 창조하십시오. 그들이 불의를 행하거나, 거짓을 말하거나 누추한 일을 행하면 제가 살며시 그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로 이끌어 오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4.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유한 후에 사람들이 두 사도를 신으로 여겨서 제사를 지내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니, 유대인들은 더욱 시기심이 불타 올라서 흥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사람들을 다시 선동하여 이끌고 루스드라까지 원정을 와서 바울을 돌로 치는 것이었습니다.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피를 쏟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바울이 움직이지도 않자 사람들은 그가 숨이 끊어진 줄로 알았습니다. 분노에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사람들은 침을 밷으며 그 시체를 끌어다가 성밖에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러면 개나 들짐승들이 피냄새를 맡고 와서 그것을 뜯어 먹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생명을 보존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은 죽은 것이 아니라 피를 많이 쏟아서 잠시 졸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일, 즉 사명을 마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심과 충성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지상에서의 여러분의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여러분이 죽임당함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어나 더베로 가서 계속 복음을 전했으며, 안디옥으로 돌아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믿음에 거하라고 권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행14:19-22)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환난에 대한 특별한 마음 가짐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 올바르게 성숙되려면 많은 환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 나쁜 것만이 결코 아닙니다. 환난은 기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아가는, 십자가 다음에 오는 부활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아주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환난을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 기도와 전도밖에 안하는 어느 수도사가 길을 가다가 영안으로 보니까 예배당이 보이는데 예배당 지붕에 마귀들이 새까맣게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웬일이지? 예배당 위에 마귀들이 낮잠을 자는구먼!” 하면서 교회에 들어가 보았더니 교인들이 기도하다말고 모두 자고 있더랍니다. “옳지! 교인들이 자니까 할 일이 없어서 마귀들도 자는구나!” 그 다음에 조금 더 가니까 교회가 있는데 지붕 위에서 마귀들이 창을 들고 지붕을 팍팍 찌르면서 춤을 추며 발악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별일이다.” 하면서 교회문을 열어보니 교인들이 열심히 깨어서 찬송하고 기도하더랍니다. “옳지! 교인들이 열심을 내니까 마귀들도 열심을 내는구나!” 시시한 사람, 벌써 썩은 사람, 그대로 두어도 죽을 사람은 마귀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믿음이 올라간다고 해서 시험과 환난이 물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을 받고도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승리하게 됩니다.

(마5:11-12)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전쟁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있으므로 나라가 강해지고 산업이 발전하고 지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법이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 있어야 민족이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소련에서 살다온 사람은 공산당이고, 미국에서 살다온 사람은 민주주의이며 얼굴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기만 하면 그들은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부득불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긴장관계에 있을 때 그들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 하여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은 축복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음과 극심한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꿋꿋이 지킨 믿음의 선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목이 잘리고, 어떤 이는 톱으로 육신의 상하위가 두동강이나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고, 아사하고, 태형으로 혹은 돌에 맞아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표면적으로 가해지는 핍박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때, 우리는 조금 더 안일하고 조금 더 편안하게만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연단과 시험, 그리고 환난을 피하려고만 하지말고 그것들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일 때 충만한 기쁨과 하늘의 상이 크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하여도 생명의 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 넓은 문 보다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는 천국 백성이 되시고, 복음을 전하는 삶에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이 따른다 해도, 그 길이 하나님 나라에 가는 복된 길임을 믿고 끝까지 사명을 다 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