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존재감을 보이는 교회 (롬13:8-14)
본문
올바른 존재감을 보이는 교회(로마서 13:8-14)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면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할 때 교회의 존재이유가 있고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이런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교회는 존재이유가 없고 잊혀지는 교회 쓸모없는 교회 나아가 비난받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4월 15일 총선이 있었습니다만 그 때 얼마나 많은 정당들이 등록을 하고 유권자의 표를 부탁하였습니까?
그런데 총선이 끝난 후 대부분의 정당은 유권자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다 잊혀진 정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정당을 사람들은 다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면 그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역사 속에서 그 존재감을 잘 드러내는 교회로 시작하여 오늘날 이와 같은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선교초기에 교회는 나라를 살리기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교육을 통하여 국민들을 계몽시켰고 병원을 세워 사람들을 살렸고, 양반 상놈의 악습을 철폐하였습니다.
술과 담배를 금지하고 축첩제도를 금지하여 오랜 관습으로 내려오고 있던 잘못된 문화를 개혁하였습니다.
일제 식민지 36년 동안 교회는 민족 앞에 독립운동의 산실이라는 존재감을 보여주었습니다.
3.1운동당시에 교회는 독립만세운동의 선봉에 섰고 전국에 있는 교회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을 확산시켰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민족을 위하는 뜻있는 사람들이 다 교회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6.25동란당시에는 학도 의용군을 모집하여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모범을 통하여 교회의 존재감을 보여주었습니다.
독재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교회는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사회를 이루는 일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 뚜렷한 목적을 보여주었을 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여러분, 오늘날 교회는 과연 그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오늘의 교회는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를 세상에 어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의 세력과 이익을 확장하는 기관일 뿐이고 사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로
심지어 교회는 이 사회를 더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만드는 기관이라는 그래서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코로나 감염병 사태를 통하여 보여 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여기에는 많은 오해도 있고 무조건적으로 교회를 악하게 보고 험담하는 세력들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왜 존재하고 교회가 왜 필요한 기관인지 교회의 존재감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구나, 꼭 필요한 기관이라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고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다할 수 있고 이 사회에서 존재감을 인정받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과 같이 교회가 일방적으로 비난받고 매도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존재감을 보여준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어려운 과제 앞에 그냥 포기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점점 이 사회에서 잃어버리는 존재가 될 것이고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맛 잃은 소금이 될 것입니다.
어렵더라도 감당해야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애쓰고 힘쓰며 씨를 뿌릴 때 교회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존경받는 교회로 이 사회와 함께 나아가게 될 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가 올바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는, 사랑의 모습을 보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부터 10절까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선 다른 빚을 지지 말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세상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하면서 그 권세들에게 복종하되 특별히 관세와 조세를 바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권세들에게 관세와 조세를 바치면서 시민의 사명을 다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세금을 내는 일에도 빚진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것을 뛰어넘어 성도들의 사랑의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고 여기에 어떤 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사랑의 빚이나 부모님의 사랑의 빚이나 이웃이나 형제들이나 교우들의 사랑의 빚을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지지 않고 살아가는 교우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사랑의 빚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 있는 다른 빚은 많으면 많을수록 정말 부담이 되고 힘이 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심지어 목숨을 끊는 일까지 생기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의 빚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빚을 많이 져서 힘들다거나 고통스럽다고 하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서 떠난 사람은 있어도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넓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을 저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아쉽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힘들다고 하는 자녀들은 없습니다.
배우자의 사랑이 없어서 문제지 배우자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문제가 된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의 빚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훌륭하게 된 것은 이 사랑의 빚을 너무나 많이 졌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로마서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사랑의 빚을 졌음으로 그 빚을 갚아야한다는 생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사랑의 빚을 우리가 졌으매 우리도 그 빚을 갚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더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이 사회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날 사회는 내가 사랑의 빚을 졌다는 개념이 없이 남을 이겨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존경쟁의 시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한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고 그러다 보니까 사랑이 그리워지고 사랑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이 그리워 사랑을 찾아도 어디 하나 사랑을 보여주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갈 곳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헤매다가 쓰러지고 넘어지게 됩니다.
이런 시대에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엄청난 빚을 지고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가 이런 사랑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디서 사랑을 느끼고 찾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사랑의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는 사랑의 집단이고 교회가면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을 잃을 때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존재감을 잃게 됩니다.
주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처음 사랑을 되찾지 않으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찾아야 하고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의 존재감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술 취하지 말고 음란하지 말고 호색하지 말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고,
빛의 갑옷을 입는 것으로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당시 로마사회에서 수많은 방탕한 삶이 자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방탕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니 벗어나는 것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더 경건한 삶을 구별된 살아야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탁한 세상을 살 때 그 혼탁한 세상을 맑게 하는 정화장치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사회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교회가 성도들이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유대인들은 주후 70년에 나라가 망하면서 세계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랑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신앙생활을 저버리지 않았고 율법의 말씀을 따라 경건한 삶으로 살아갔습니다.
그 모습이 사회에 각인되어서 유대인들 특히 유대 여자들은 경건한 귀부인들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 없는 유대인들이었지만 존재감을 인정받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영국은 원래 섬나라 사람으로 해적질을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다에 나가 오래 동안 해적생활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되면 자식들은 누가 책임지고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이들이 생각해낸 것이 기독교인들을 잡아와 억지로 부인을 삼았던 것입니다.
당시에 경건한 자들로 알려진 기독교 신앙을 가지 여자들을 데리고 오면 안전하게 가정을 맡기고 나름대로 자식을 잘 기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교우들이 억지로 잡혀와 가정을 꾸리게 되는데 이들은 자녀들은 기독교신앙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면서 근본적으로 영국사회를 바꾸게 됩니다.
그것이 영국이 해적민족에서 신사나라로 바꾸어지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는데서 가장 잘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하여 교회는 빛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엡5:9)
오늘 우리 교회가 사회에서 존재감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존재의미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것은 주일날 교회 가는 것밖에 뭐가 있느냐? 하는 자조 섞인 비판이 오늘의 우리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시절일수록 더 정직하고 더 경건하고 더 진실 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그 존재감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게 될 줄 믿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 ‘옷이 날개다’라는 말을 잘 아실 줄 압니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고 행동거지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예비군 훈련이 많지 않습니다만 예전에 제대한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몇 년간 예비군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군에서 제대하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에게 군복을 다시 입히니까 예전에 군대에서 하던 추잡한 행동이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옷은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주님으로 영접한 자는 예수의 옷을 입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 예수의 옷을 우리는 항상 어디서나 입어야 합니다.
교회 올 때만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전에 유명했던 책의 제목처럼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으로 가지고 그 질문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예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갖고 사는 자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고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의 옷을 잘 입고 있습니까?
교회 올 때만 입고 다른 곳에 갈 때면 다른 옷으로 바꿔 입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의 옷을 입고 작은 예수로 살아갈 때 교회는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게 될 것이고
성도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이 시대에 필요한 교회로 성도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2020.9.6.)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