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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이방 교회 (행1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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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이방 교회 (행11:19-30)


(행11:19-30)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1. 베드로가 가이사랴 주둔군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가서 그의 식솔들과 함께 식사하고 그들에게 설교하고 세례를 베푼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고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거룩한 민족이라는 의식 가운데, 다른 민족 소위 이방인들은 세리나 죄인, 그리고 창녀들과 같이 상종해서는 안되는 더러운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들과 자리를 같이 하거나 식사를 함께 하면 자신을 더럽히는 죄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 가서 식사로 함께 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할례받은 유대인으로서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과 함께 어찌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느냐?’ 며 여지없이 그를 비난합니다.

(행11:2-3)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이러한 비난에 대해 베드로가 그 사건 경위를 설명합니다.

자신이 욥바에 있을 때 하루는 기도하는 중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보자기 하나가 내려오며 하나님께서 그 보자기에 담긴 것들을 잡아 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보자기에 담긴 것들을 보고,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며 거절합니다. 베드로가 거절하게 된 이유는 그 보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모두 하나같이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 결코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보자기에 담긴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부정한 짐승이라고 규정하여 먹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종도 하지 않던 짐승들이었습니다.

(레11:2-12)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중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10)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신14:3-20) (3)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4)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름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가 흰 노루와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이라 (6)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10)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함이니라 (11)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으려니와 (12) 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3)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14) 까마귀 종류와 (15)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6) 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17)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18)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19) 또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20)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을지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담긴 것들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굽이 갈라져 쪽발이긴 한데 새김질하지 않는 짐승이어서 부정하여 먹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들이 있었는데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매의 종류와 까마귀 종류 등등이었습니다. 또 날기도 하고 기어 다니기도 하는 등 온갖 부정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인 베드로는 태어나서 한 번도 먹지 않았던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먹을 수 없다며 하나님 말씀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행10:14)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10:15)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 환상이 무슨 뜻일까?’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소리쳐 부르며 ‘베드로라는 시몬이 있느냐?’ 고 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보여 주는 뜻을 몰라서 깊이 생각하는 중에 성령의 음성, “(행10: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는 음성을 듣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 가게 됩니다. 고넬료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로 가득한 고넬료 집에 도착하여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유대인이 이방인과 사귀거나 찾아가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속되거나 깨끗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데리러 사람을 보냈을 때 내가 사양하지 않고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불렀습니까?’(행10:28-29) 하고 자신을 부르게 된 목적을 묻게 됩니다. 고넬료는 자신이 기도 중에 환상을 보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주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를 초청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행10:34-35)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며 설교하게 됩니다.

<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느 민족이든지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내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기쁜 소식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 주셨는데 이 예수님이 바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요한이 세례를 전파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 전역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셔서 예수님은 사방으로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3일 만에 다시 살리셔서 그분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증인, 곧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후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우리에게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명령하셨으며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세우신 분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모든 예언자들도 증거했습니다.>(행10:34-43) 베드로가 이같이 설교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됨을 보고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에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 곧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2. 바로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이 고넬료와 그의 식솔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받음으로 이방인들도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 때’, 스데반 집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체포되어 순교당하는 사건, 당시 교회로서는 충격적인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교회에 대한 박해와 핍박은 날로 심해져, 그 박해가 이방인 지역인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박해와 핍박으로 성도들은 더 멀리 이방인 지역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행7:55-8:3)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교회에 대한 박해와 핍박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 그리고 그 범위가 멀리 이방 지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까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베니게’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도시가 속해 있는데, 이미 예수께서 갈릴리 선교 당시 이 두 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바 있습니다.

(막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따라서 베니게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생소한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브로’는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한 섬인데 안디옥과 다소, 그리고 길리기아 지역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오늘에는 ‘키프러스’(Cyprus)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교회에 내놓아 섬긴 바나바가 바로 이 구브로 섬 출신입니다.

(행4:32-37)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구브로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훗날 바울도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행13:4-12) 또한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안디옥은 A.D.1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였습니다.(Josephus)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A.D.37-41년에는 로마 황제 갈리굴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흩어지게 되었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흩어져 숨어 지낸 것이 아니라, 각각 흩어진 그곳에서 그곳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성도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중 일부는 이방인인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20입니다.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박해를 피해 구브로와 구레네에 갔던 유대인 성도들 몇몇이 안디옥에 가서 그곳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중심 도시로서 이곳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의 출신지이기도 합니다.

(눅23:26)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3. 이렇게 해서 안디옥에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가 듣고 교회 사역자의 필요성을 판단하고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를 파송하여 안디옥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사역을 책임질 사도를 찾아야 했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에 부여된 복음 전도 사역에 필요한 적임자는 적어도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는 유대적 전통에서 자라난 유대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이방인들을 동등한 입장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안디옥을 기독교의 중심지로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기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그 위에 교회에 대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격을 막아낼 만큼 충분한 이론과 율법에 박식한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적임자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그에게 가편 투표를 던져 성도들을 박해하는데 앞장 섰고, 더 나아가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까지도 체포하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 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사울이 있습니다.

(행9:4-5)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9:15)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울이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역자로 변해, 다메섹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배신한 사울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를 알고 그를 밤 중에 피신시킵니다.

(행9:20-25)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이러한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사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는 터라, 사울의 제자됨을 두려워하고 그가 변하여 제자가 되려한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그가 다메섹에 박해하려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았다는 것과, 다메섹에 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제자들은 바나바의 인물 됨됨이와 그의 인품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설명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하자 그를 다소로 보냈습니다.

(행9:26-30)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다소가 간 사울에 대해 약 10년간 그의 소식을 전혀 모릅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이었습니다.

(행 21: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행22:3)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의심없이 바울은 약10여년이란 세월을 자기 고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가 맡아야 할 사명, 즉 이방인에 복음 전도의 사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바울을 최초의 이방인 교회 책임자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울이라는 이름이 바울로 바뀌어 나오게 된 곳은 사도행전13:9입니다.

(행13:9)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 후로 바나바보다 바울이라는 이름이 먼저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바나바의 이름이 항상 사울보다 먼저 나왔는데, 이제부터는 사울의 바뀌어진 이름인 바울이 바나바의 이름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전까지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라고 하는 한 지역에 계속해서 머물면서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똑같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똑같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 사람은 한 지역에 계속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역지를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역지를 옮길 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울의 복음 전도 대상이 주로 헬라 사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바울로 바꾼 것은 아닙니다.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사울이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과 헬라식 이름인 바울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또한 정통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울이 주로 만났던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자기와 같은 동족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계속해서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나라들을 다니면서, 유대인이 아닌 로마 제국에 속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즉 이제부터 사울이 만나야 하는 주 대상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가 만나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인 이방인들을 더 쉽게 만나고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사용했던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헬라식 이름인 바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전9:17-23)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위치에 섰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지만 더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고전9:19) 바울이 모든 사람의 종노릇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자신을 만나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사역자로 삼으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사람들을 섬기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제자된 우리들도 모든 사람들을 섬길 때에만 그들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과 관습,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지역에 가서 전도할 때, 그들의 그 모든 것들을 무조건 거절하거나 혐오하거나 하지 말고 복음 전도를 위해 충분히 이해하는 자세로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과거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말이나 한국의 옷과 음식 등을 싫어하고, 자기들이 서양에서 생활하던 모습 그대로 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적어도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자신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적응시킨 것은 결국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아무쪼록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낮고 천한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입니다.”(빌 2:7-8) 바로 이것이 사랑의 원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고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정신이 없으면 복음 전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치 경기하는 자처럼 자기를 쳐 복종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희생적인 절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경기하는 사람이 절제하지도 못하고 자기하고 싶은 것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을 때 그는 훌륭한 경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경기자는 경기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무작정 달리거나 적을 보지도 않고 무작정 공중을 치는 권투선수도 아닌 것입니다.

(고전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성도는 자신의 삶과 복음 전파의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조 코치인 벨라 카롤리가 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의 체조 코치로 나디아 코마네치를 길러낸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휴스턴에서 미국의 체조 선수 300명을 길러 냈습니다. 그는 선수들을 연습시킬 때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평안을 포기하고 코치의 훈련 방향에 순종할 것, 둘째는 생활의 우선 순위 중 체조를 1위에 둘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체조에 헌신할 것 등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평안을 포기하고 자기 희생적인 절제 생활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고, 삶의 우선 순위를 항상 복음 전파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훌륭한 경기자, 즉 복음 전도자는 죄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 영혼을 성결하게 보존해야만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는 복음을 위하여 태어났고 복음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며 이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은혜와 은사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증언합니다.

(롬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으며, 여러분의 존재 가치도 복음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요,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오직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시는, 그리스도 예수만을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기원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울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다른 것들은 얼마든지 희생하고 손해 볼 수 있으며,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받은 소명은 이렇습니다.

(행9:15)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 말씀에서 보면, 사울이 복음 전도를 위해 부름받은 대상은 제일 먼저 ‘이방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지금까지 사용했던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헬라식 이름인 ‘바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로지 받은 바 소명을 위해 정통 유대인으로서의 이름인 ‘사울’ 대신에 ‘바울’을 사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모든 초점을 선교에 맞추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왜 자기 이름을 바울로 바꾸어서 사용했습니까? 그것은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더 잘 감당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을 책임지시고 그가 필요한 것은 다 채워주셨으며, 그가 처한 모든 어려움에서 그를 건져주셨으며, 그가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하셔서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도 사울처럼 우리 삶의 초점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세상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맞추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좀 더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더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하셔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바울과 협동으로 목회한 결과 안디옥 교회는 영적, 물적 큰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행11:25-26)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안디옥 사람들이 교회를 더 이상 유대주의의 한 종파와 일부로 인식하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로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나 ‘성도들’이라고 불렀고, 유대인들은 주로 ‘나사렛 이단’, ‘도를 좇는 자’ 등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안디옥의 기독교 신자들에게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마시거나 먹거나 무엇을 하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얻게 된 별명,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전 세계가 알게 될 이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살아 계신 분으로 말미암아 멸시될 이름을 모든 사람이 놀랄 용기와 사랑의 이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 아가보가 큰 기근을 예언했을 때,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이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곧 사도들의 지시를 좇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유대의 형제들을 사랑으로 돌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제 사역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기 위해 자신들을 가르쳤던 두 선생님들에게 그 임무를 위탁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점을 계시하는 멋지고 은혜로운 행위입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언에 복종하여 앞으로 있을 큰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유대의 형제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서로가 하나됨을 깨닫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한 부분이 고통을 당하는데 다른 한편이 가만히 있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안디옥 교회의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들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성 크리스토퍼라는 성자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오펠로는 시리아에 사는 힘센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의 신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리아 왕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왕은 노래 가사 가운데 악마라는 말이 나오자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 악마를 찾아가서 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나쁜 짓을 하며 금은보화를 훔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마와 함께 교회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악마가 교회 지붕의 십자가를 보고 몹시 무서워하며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악마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십자가는 자기가 제일 무서워하는 예수의 상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펠로는 악마로부터 빠져나와 예수의 부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오펠로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나룻터의 사공이 되어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직 예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사흘 동안 장대같은 소낙비가 퍼부어 홍수가 졌습니다. 오펠로는 물이 불어서 나룻배를 띄우기가 위험해지자 일단 휴업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펠로가 머무는 거처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습니다. 한 소년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위독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당장 나루를 건너가야 한다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펠로는 소년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강을 건너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물결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배로는 어려워 소년을 업고 강을 건너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소년은 더욱 무거워만 갔습니다. 그래서 오펠로는 “너는 무엇을 먹고 자랐기에 이렇게 무겁냐?”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 때 그의 등 뒤에서는 어른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만나려고 하던 예수다.” 이 전설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권력(왕)의 신하나 재물(악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바른 주인인 예수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섬긴다고하는 것은 곧 한 이름없는 아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유대의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낸 것 또한 주님을 섬기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죄악이 가득한 곳에서도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진주가 진흙 속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죄악된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길 때 그 진가(眞價)를 더욱 발휘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죄 많은 곳 은혜가 더욱 넘치는 교회, 형제 사랑으로 뜨거운 교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말씀이 충만한 생명수 넘치는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생명의 빛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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