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얻는 회개 (행11:1-18)
본문
생명 얻는 회개 (행11:1-18)
1. 오늘 본문 1절,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다.’ 는 내용은 사도행전 10장의 내용들입니다. 그 내용을 보겠습니다.
지중해변 가아사랴에 로마 주둔군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하여 온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가난한 유대인들을 많이 구제하며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3시쯤 되어 그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고넬료야, 하나님께서 네 기도와 구제하는 일을 다 알고 기억하시느니라. 지금 너는 사람을 욥바로 보내 베드로라는 시몬을 불러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고넬료는 곧 바로 두 종과 부하 하나를 욥바에 보내 사유를 설명하고 베드로를 초청합니다. 당시 베드로는 비슷한 시간에 기도하는 중 자신이 환상을 본 이후였습니다. 환상은 하늘에서 큰 보자기같은 것이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온갖 네 발 짐승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며 거절합니다. 베드로가 거절하게 된 이유는 그 보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모두 하나같이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 결코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부정한 짐승이라고 규정하여 먹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종도 하지 않던 짐승들이었습니다.
(레11:2-12)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중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10)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신14:3-20) (3)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4)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름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가 흰 노루와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이라 (6)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10)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함이니라 (11)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으려니와 (12) 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3)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14) 까마귀 종류와 (15)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6) 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17)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18)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19) 또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20)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을지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담긴 것들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굽이 갈라져 쪽발이긴 한데 새김질하지 않는 짐승이어서 부정하여 먹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들이 있었는데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매의 종류와 까마귀 종류 등등이었습니다. 또 날기도 하고 기어 다니기도 하는 등 온갖 부정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인 베드로는 태어나서 한 번도 먹지 않았던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먹을 수 없다며 하나님 말씀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행10:14)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10:15)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 환상이 무슨 뜻일까?’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소리쳐 부르며 ‘베드로라는 시몬이 있느냐?’ 고 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보여 주는 뜻을 몰라서 깊이 생각하는 중에 성령의 음성, “(행10: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는 음성을 듣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 가게 됩니다. 고넬료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로 가득한 고넬료 집에 도착하여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유대인이 이방인과 사귀거나 찾아가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속되거나 깨끗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데리러 사람을 보냈을 때 내가 사양하지 않고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불렀습니까?’(행10:28-29) 하고 자신을 부르게 된 목적을 묻게 됩니다. 고넬료는 자신이 기도 중에 환상을 보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주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를 초청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행10:34-35)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며 설교하게 됩니다.
<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느 민족이든지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내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기쁜 소식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 주셨는데 이 예수님이 바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요한이 세례를 전파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 전역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셔서 예수님은 사방으로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3일 만에 다시 살리셔서 그분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증인, 곧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후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우리에게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명령하셨으며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세우신 분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모든 예언자들도 증거했습니다.>(행10:34-43) 베드로가 이같이 설교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됨을 보고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에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 곧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2. 이러한 베드로의 이방인에 대한 선교 사항을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듣고, 마침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곧 바로 베드로를 힐난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를 힐난한 사람들은 ‘할례자들’이었습니다. ‘할례자들’하면 보통 유대인들을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개종하여 교회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자신들은 할례받은 자들이라는 우월의식을 지닌 무리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구분하며 자랑하는 것은 할례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민족들을 ‘무할례자’라 부르며 경멸하여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이방인 블레셋과 전쟁에서 크게 부상당하자 자신이 할례없는 이방인들 손에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자결했습니다.
(대상10:4) 자기의 병기 가진 자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저 할례 없는 자가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 병기 가진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매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니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네 자손은 모두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창17:9-14)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을 자신의 육체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란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할례를 육체의 자랑거리로 삼았으며(갈 6:13)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나눔으로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그대로 지닌 채로 개종하여 교회에 들어왔는데 유대인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접촉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등의 소식을 듣고, 곧 바로 베드로를 정죄하기 위해 힐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자기를 힐난하는 할례자들에게 그간의 선교 내용을 차례차례 설명합니다. 자신이 욥바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의 내용, 즉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안에 담긴 것들을 하나님께서 먹으라 하신 일, 자신이 보니 보자기 안에 있는 것들은 부정한 것들이어서 먹기를 거절했던 일,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 이러한 일이 무려 세 번씩이나 있었던 것,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신 것이 무슨 일인가 할때 이방인 고넬료가 사람들을 보내 자기를 초청했던 일, 자신이 의심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자신에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신 일, 그래서 이방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보니 고넬료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자기를 초청했다는 것, 그들에게 설교를 하자 그곳에 모인 모든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 등, 그 때 베드로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며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할례자 베드로가 무할례자들을 접촉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임을 확실하게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가서 깨닫고 설교한 내용,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유대인이 이방인과 사귀거나 찾아가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속되거나 깨끗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데리러 사람을 보냈을 때 내가 사양하지 않고 이렇게 왔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행10:34-47) 라며, 세례를 베푼 내용은 아예 무시하고 다만 할례받은 유대인으로서 베드로가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힐난받아 마땅하며 이를 정죄해야만 한다고 문제삼으려 하자, 그같이 다시 한 번 구체적 체험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한 것입니다.
3. 할례자들이 베드로의 이같은 체험과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도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교회 안에 “할례자들”이 베드로의 이방선교를 문제삼아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이유로 베드로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어떤 선행이나 교회 전통, 성찬, 세례, 그리고 율법과 할례 등으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할례자들”은 대단히 율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개종하여 교회에 들어와서도 구약시대의 유대인 전통들을 신약의 기독교에 포함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이유로 힐난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방인들,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이유만으로 문제를 삼아 비난했던 것입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생명얻는 회개를 통해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기뻐하기는커녕 전혀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자리를 같이 하자, 그들을 무시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서로 수근거리며 “이 사람이 죄인들을 환영하고 식사를 같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눅15:3-10)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는 않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죄인 한 사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로마서2:25-29을 보겠습니다.
(롬2:25-29)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받은 유대인으로서 죄를 범했다면 그 받은 바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할례받지 아니한 무할례자와 다를 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참 유대인이 아니며 육체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참 할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 유대인이며 기록된 율법이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칭찬을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3:29-31)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5:6에서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5:6)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제 할례받은 유대인이나 무할례자들인 이방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를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22-24입니다. 이 말씀을 풀어서 읽으면 이렇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금 도적질하고, 음란하고, 뇌물 먹으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제외되고 헬라인, 즉 이방인이게만 내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나 가지고 있지 않은 자나 똑같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은 그 받은 바 율법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으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진 자, 율법을 듣는 자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참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가 의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4. 더 나아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갈6:15)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肉), 즉 몸에다 행하는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여 진실로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10:16)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30:6)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렘4:4)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을 자신의 육체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란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표시입니다. 이는 신약 시대의 세례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의 할례는 신약시대 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할례와 세례는 모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킬 때에만 참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고귀한 언약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할례를 육체의 자랑거리로 삼았으며(갈 6:13)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나눔으로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할례와 율법 준수는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입니다. 율법과 마찬가지로 할례라는 의식을 통해 인간이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할례를 받게 하신 것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더 잘 알고 그것을 행하여 모범이 되고 인도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이방인과 똑같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고 할례를 받은 특권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할례는 그 자체로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을 지킬 때에만 율법과 할례가 그 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죄가 전혀 없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라는 껍데기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육체에 할례받은 민족이라는 껍데기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마음 중심으로 실천하는데 실패했고, 할례는 육체의 자랑에 그치고 모든 것은 형식적인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율법을 행하는 이방인들이 할례자로 간주되고 율법을 소유하되 지키지 못한 유대인들은 무할례자와 같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졌다고, 할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무할례자,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혹 우리들은 유대인들처럼 껍데기만의 율법을 가진 자들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정녕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세상 시류(時流)에 따라 제 마음대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나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이방인들에게 욕되게 하는 일은 없었습니까? 자신은 똑바로 섰다고 생각하지만 넘어져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모양만 갖추었다고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의 흔적이 있어서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에 비로소 참된 유대인이 되며 진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단지 착실하게 매주일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신앙생활을 나타내야만 합니다. 껍데기만 기독교인, 즉 유명무실한 기독교인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며 병폐입니다. 수없이 많은 교회와 신자가 있어도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부패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기독교인이 많다는 증거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칼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가지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명실상부한 기독교인으로 이 땅에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너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맡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예수 믿는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할뿐만 아니라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지 않는 자보다 낫기 위해서는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은 예수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보다 나은 생활이 없다면 어느 때나 비판받아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생활이란 높은 교육을 받거나, 돈이 많거나, 세상에서 지위 명예 등 생활수준이 높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만큼 빛과 소금이 되고 있으며,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생활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기독교는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기보다는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적이 더 많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맡았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은 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두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맡은 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너무나 미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불란서의 한 신학자는 기독교 문명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어 간다고 지적하며, 사람들은 교회의 메시지에 점점 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나은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고 주께서 묻고 계십니다. 본문의 질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이 질문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너를 새롭게 해 주었건만 너는 지금 어떠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우리의 믿음 없는 생활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더욱 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히4:12)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라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상에 하나님 말씀이 점점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소멸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맡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능력이 사라지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먼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여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의 능력을 상실해 가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즐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12)면서 사정없이 질타했습니다. 율법을 맡아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이들이 나을 것이 하나 없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돌멩이 하나만 못하다는 책망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 어찌 돌멩이 하나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비의 종류 중에 “칼리마”라는 것이 있는데 “죽은 잎사귀”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날개를 펴고 날 때는 찬란한 색깔이지만 날개를 오무리고 앉아 있으면 누런 색깔로 변하는 모습이 죽은 잎사귀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두 종류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일은 찬란한 총천연색 신자가 되었다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죽은 잎사귀처럼 변하는 이중적 인생을 사는 신자를 말합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자와 예수를 성현이나 선생으로 고백하는 신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신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낮에나 밤에나, 봄이나 겨울이나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영광된 성도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을 변화된 생활로 보여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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